•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2) 국내지도의 제작
  • (2) 동람도의 제작

(2) 동람도의 제작

 東覽圖는≪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는 八道總圖와 八道州縣圖를 가리키는데 지도의 版心에 동람도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이 지도는 판각된 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인데 지도의 정확성이나 정밀성 등을 살펴보면, 태종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의 조선도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도가 만들어졌고, 정척과 양성지가 만든 동국지도는 상당한 수준의 지도였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동람도가 그렇게 엉성하게 제작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지도의 제작기술이 후퇴했기 때문이 아니라 김종직이≪동국여지승람≫의 발문에서 밝혔듯이, 동람도에서는 국가에서 제사지내는 嶽瀆과 명산대천, 그리고 각 주현의 鎭山만을 표기할 목적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이다.421)≪東國輿地勝覽≫金宗直 跋.

 조선이 건국된 후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부문에서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산천신에 대한 제사문제는 태조 원년(1392)에 禮曹典書였던 趙璞이 제기하였다.422)≪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그는 역대 국가에서 산천신에게 제사지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각 주현의 城隍神을 ‘某州某郡 城隍之神’이라는 위판을 마편하고 해당 고을의 수령이 봄·가을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태조 2년에 이조는 명산대천과 성황신·해도신에 봉작할 것을 건의하였다.423)≪太祖實錄≫권 2, 태조 2년 2월 정묘. 宋岳의 성황신은 鎭國公에, 和寧·安邊·故州의 성황신은 啓國伯에, 智異山·無等山·錦城山·鷄龍山·紺岳山·三角山·白嶽山의 신들은 護國伯에 봉작하고 나머지 명산대천의 신은 護國神에 봉작하였다. 이는 대사성이었던 劉敬의 건의를 받아들여 예조로 하여금 자세히 고증한 후에 조처한 것이다.

 그후 태종 13년(1413)에 祀典을 정비하여 사직·종묘 등은 大祀를 드리고, 先農壇과 文宣王 등은 中祀를 드리도록 승격시켰다.424)≪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4월 신유. 山川祀典制가 확립된 것은 태종 14년 8월로, 唐의≪禮樂志≫와≪文獻通考≫등을 참조하여 비로소 제사 등급을 나누어 확정하였다.425)≪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 즉 海嶽瀆神은 중사, 산천신은 소사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경성의 삼각산신과 한강신, 경기도의 松嶽山神과 德津神, 충청도의 熊津神, 경상도의 伽倻津神, 전라도의 지리산신과 남해신, 강원도의 동해신, 풍해도의 서해신, 영길도의 鼻白山神, 평안도의 鴨綠江神과 平壤江神 등 13개소의 해악독신에 대해 중사를 드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경성의 木覓山神, 경기도의 五冠山神·감악산신·楊津神, 충청도의 계룡산신·竹嶺山神·楊津溟所神, 경상도의 于佛山神과 主屹山神, 전라도의 全州 城隍神과 錦城山神, 강원도의 雉嶽山神·義館領神·德津溟所神, 풍해도의 牛耳山神·長山串神·阿斯津神·松串神, 영길도의 永興城隍神·咸興城隍神·沸流水神, 평안도의 淸川江神·九津溺水神 등 23개소의 山林川澤神에 대해 소사를 드리도록 구분지었다. 이러한 중사와 소사는 해당 소재관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경기도의 龍虎山·華嶽山, 경상도의 晋州城隍, 영길도의 顯德鎭·白頭山 등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제사처는 아니지만 소재관이 스스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제사지내던 永安城·貞州牧監·九龍山·因達巖 등은 모두 제사를 폐지하였다. 또 개성의 大井과 牛峯의 朴淵은 이미 명산대천에서 제외되었지만 화악산의 예에 따라 소재관이 스스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 때에 확립된 산천사전제가 상당 기간 계속된 듯하며 동람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표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제정된 산천사전제는 고려시대의 사전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에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개성을 중심으로 짠 사전제이기 때문에 서해신이 경기도에 있지 않고 풍해도에 있게 된다거나, 태조의 興運地인 함흥의 용흥강이 제사처에서 빠져 있거나, 방위가 한양을 중심으로 할 때 어긋난 점이 많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 2년(1456)에 양성지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426)≪世祖實錄≫권 3, 세조 2년 3월 정유. 그는 한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중의 岳·鎭·海·瀆을 정하자고 하였다. 즉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으로 하고, 白岳山을 중진, 태백산을 동진, 송악산을 서진, 錦城山을 남진, 묘향산을 북진으로 하며, 또 동해신을 江陵, 서해신을 仁川, 남해신을 順天, 북해신을 압록강 상류의 甲山으로 정하여 제사지내도록 하며, 龍津을 동독, 대동강을 서독, 한강을 남독, 두만강을 북독으로 정하고, 목멱산·감악산·오관산·계룡산·치악산·오대산·의관령·죽령을 명산처로, 웅진·臨津·菩堤津·龍興江·청천강·洛東江·蟾津江을 대천으로 삼아 제사지내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 그 중요성이 많이 감소된 楊津2處와 德津2處, 가야진·주흘산·우불산·우이산·비백산·장산곶·아사진·송곶·비류수·구진닉수 등은 제사처에서 제외시켜 사전을 바르게 하자고 하였다. 그는 고금에 걸쳐 제사지내는 곳이 34곳인데 예전대로 17곳은 남겨두고 13곳은 폐지시키며 13곳은 중요도에 따라 새로 추가하고 4곳은 제사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양성지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합리적인 방안이며 국토를 균형있게 파악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은≪고려사≫지리지,≪팔도지리지≫,≪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지를 편찬하고 동국지도 등의 지도를 제작한 경험으로 인하여 전국의 명산대천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성종 13년(1482)에 올린 그의 상소문에 의하면,≪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동람도는 그의 작품427)≪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동람도에 표기된 산천신에 대한 제사처에는 그의 주장이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는 태종 14년(1414)에 확정된 산천사전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동람도>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람도는 산천사전제에 의한 중사처와 소사처를 표기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8도총도에 기재된 내용은 이러한 제사처를 제외하고 표기된 곳이 없다. 단지 백두산만은 예외적이다. 이는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백두산을 우리 나라의 祖山으로 보기 때문으로, 우리 나라 고지도에는 백두산이 반드시 그려져 있다. 둘째, 濟州道가 순천 밑에 판각된 것은 판각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우측으로 옮겨 새긴 것이다. 셋째, 于山島가 울릉도의 안쪽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산도는 독도를 뜻한다. 넷째, 바다를 파도무늬로 판각하였다. 이는 조선 초기 고지도의 독특한 표현양식이다. 다섯째, 두만강이 압록강보다 위도상으로 낮게 표기된 것은「8도총도」라는 제목의 판각 때문에 낮추어 그린 탓이다. 여섯째, 대마도를 반드시 명기한 점이다. 대마도에 대한 영토의식의 발로이다. 일곱째, 8도총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조선도나 조선방역도 보다 매우 엉성하게 그려진 까닭은 양성지가 성종 13년에 올린 상소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는 예로부터 지도는 국가기밀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고 이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인의 소장을 금하고 춘추관 사고에 비장하여 유출시키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428)≪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그런데≪동국여지승람≫은 刊印되어 널리 유포되었다.429)≪東國輿地勝覽≫도 간행하여 관청에 비치하여 열람할 수는 있었으나 민간인이 소장하는 것은 역시 금하였다(≪燕山君日記≫권 58, 연산군 11년 7월 무술.) 그것은 국가기밀을 지키기 위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보인 중사처와 소사처를 표기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동람도보다 앞서 만들어진 혼일강리도의 조선도와 조선방역도를 동람도와 비교해 보면, 조선 초기의 지도 제작기술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동람도가 조잡하게 만들어진 것은 국가기밀 유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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