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Ⅰ. 학문의 발전
  • 4.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의 제작
  • 2) 국내지도의 제작
  • (3) 조선방역도

가. 제작시기

 朝鮮方域圖는 정척과 양성지가 만든 東國地圖의 전통을 이어 명종 12년(1557)경에 濟用監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제용감에서는 전국 8도의 진상품을 파악하기 위해 이 지도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이 지도는 임진왜란 때 왜군에 약탈되어 대마도 宗家에 소장되어 있었다. 1930년대 朝鮮史編修會에서는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관련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마도의 宗家文書도 덕혜옹주의 부군이었던 宗武志로부터 입수하였다. 이 지도는 대마도 종가문서와 함께 수집되었고 광복 이후 國史編纂委員會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430) 1923년 朝鮮史編修委員이었던 栢原昌三의 對馬島史料採訪 復命書에 의하면, 대마도에는 朝鮮圖 1권, 東國地圖 1권, 江原·全羅·慶尙·京畿·黃海·咸鏡道 등의 地圖 6장, 朝鮮地圖 1권 등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맨 나중의 조선지도 1권은 彩色지도로서 萬曆 이전에 제작된 지도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이 지도가 조선방역도를 지칭한 듯하다.

 이 지도는 상단에「朝鮮方域之圖」라고 횡서되어 있고 중심부에 조선전도를 그렸으며 그 하단에는 제작자의 座目이 있다. 이러한 양식은 16세기「契會圖」의 전형적인 제작양식인데,431) 安輝濬,≪朝鮮繪畵史≫(一志社, 1990), 143쪽. 고지도 중에 이런 양식으로 그려진 것은 조선방역도가 유일하다. 조선방역도의 제작자 좌목에 의하면, 이 지도의 제작관청은 정3품 아문임을 알 수 있다. 정3품 아문은≪경국대전≫에 의하면 31개 관청이 있다.432)≪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 正三品衙門. 그러나 좌목에 나타난 숫자인 9명의 관원을 정원으로 삼고 있는 관청은 제용감과 繕工監 밖에 없다. 그런데 선공감은 前僉正이었던 朴蘋이 전출해 간 관청이므로, 이 지도는 제용감에서 전국의 공물진상 내용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조선방역도는 8도의 주현을 표시한 8도주현도이다. 이 지도의 제작시기는 다음 세 가지의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명종 12년(1557) 8월부터 명종 13년 2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첫째, 惟新縣의 置廢경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8도주현도이므로, 전국의 주현명칭을 8도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圓으로 표시되었다. 즉 경상도는 적색, 전라도와 충청도는 황색, 강원도는 연록색, 경기도는 연황색, 황해도는 백색, 함경도는 청색, 평안도는 녹색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도에서 忠州가 유신현으로 표기되어 있다.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강등되었던 시기는 명종 4년부터 선조 즉위년(1567)까지의 19년간이다. 충주목이 유신현으로 강등된 것은 李洪胤獄事 때문이었는데, 이 옥사는 이홍윤의 형인 李洪男의 고변으로 인하여 1개월간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忠淸道가 淸洪道로 개명되었으며, 충주목은 유신현으로 강등되었고, 李는 3년 후에 영의정으로 승차되었다.433)≪明宗實錄≫권 9, 명종 4년 5월 경인. 또 이흥남은 고변의 공으로 3년 후에 재등용되었다.434)≪明宗實錄≫권 9, 명종 4년 5월 임진. 그 후 선조가 즉위한 후 대신들의 주청에 따라 충주는 지역이 넓고 문물이 융성하여 현감이 통치하기에는 벅차다는 이유로 충주목으로 復號되었다.435)≪宣祖實錄≫권 1, 선조 즉위년 10월 계사. 이와 같이 충주가 유신현으로 불리워진 기간은 명종 4년부터 선조 즉위년까지 19년 동안이다. 이 지도에서는 충주가 유신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기간 안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花梁鎭에 신설된 京畿水營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방역도에는 경기수영이 남양만의 화량진에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경기수영은 조선 초에 설치되었다가 성종 16년(1485)에 폐기되었다.436)≪成宗實錄≫권 185, 성종 16년 11월 을해. 그러나 삼포왜변을 비롯하여 사량진왜변 등 왜구가 다시 창궐하고 해안가를 노략질하므로, 조정에서는 다시 수군을 강화하고 군진을 보강하였다. 이러한 조처의 일환으로 명종 11년(1556)에 경기 수영을 남양만의 화량진에 신설하였다.437)≪明宗實錄≫권 20, 명종 11년 정월 갑자. 조선방역도에 경기수영이 화량진에 표기된 것은 이 지도가 명종 11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셋째, 좌목에 나타난 제작자들의 활동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좌목에는 제작자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들 중 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濟用監正 李頣, 副正 尹緯, 僉正 尹確, 前僉正 朴蘋, 前僉正 安士雄·柳智善을 들 수 있다.438) 李相泰,≪朝鮮時代 地圖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1), 19∼20쪽. 이이는 加平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通訓大夫로 安陰縣監을 지낸 李長卿이다. 그는 주로 淸華要職인 홍문관·사간원·사헌부 등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중종 23년(1528)에 홍문관 著作郞에 임명되었으며, 중종 29년 2월에는 사간원 正言으로 승진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사헌부 持平으로 다시 승진되었다. 다음해에는 奉正大夫로서 사헌부 掌令이 되었다. 중종 35년에는 외관인 丹陽郡守로 활약하였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여기 좌목에 나오는 대로 명종 12년경에는 제용감정으로서 이 지도를 만드는 책임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행적은≪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고, 또 그의 족보에 의하더라도 후손이 끊겼기 때문에 그 이상의 행적을 알 수는 없다. 안사웅은 廣州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安子欽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11년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사간원 司諫에 임명되었다. 또 이 지도를 만들 때에는 봉정대부로서 內贍寺 副正이었다. 그러므로 이 지도는 명종 11년부터 명종 13년 2월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그는 명종 14년에 사헌부 執義, 다음해에는 승정원 同副承旨, 명종 16년에는 兵曹參議가 되었다.

 좌목에 기재된 사람들 가운데서 행적이 가장 뚜렷한 인물은 유지선이다. 그는 중종 30년에 홍문관 저작랑으로 임명되었으며, 33년에는 奉常寺 判官으로 승차되었다. 중종 36년에는 弘文錄에 뽑혔고, 39년에는 문관으로는 드물게 鍾城府使가 되었다. 그 후 사간원 大司諫·승정원 同副承旨·의정부 參贊·승정원 都承旨·兵曹參議·兵曹參知를 거쳐 명종 10년(1555)에는 掌禮院 判決事, 12년에는 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그가 이 지도의 좌목에 있는 刑曹參判에 임용된 것은 명종 12년 8월이다. 명종 15년 정월에는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가, 명종 15년 7월에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 때는 林巨正이 횡행하던 때인데 그를 체포하지 못하여 4개월 만인 그 해 11월에 교체되었다. 유지선은 선조 6년(1573)에 開城留守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므로 그가 이 좌목에 나타난 대로 형조참판에 있었던 시기는 명종 12년 8월부터 명종 15년 7월까지의 3년간에 해당된다.

 행적이 뚜렷한 인물인 안사웅과 유지선을 살펴보면, 유지선이 이 좌목에 있는 형조참판으로 재직하던 시기는 명종 12년부터 명종 15년까지의 3년간이다. 또 지도가 제작된 시기는 안사웅의 행적으로 더욱 좁힐 수 있다. 안사웅이 이 좌목에 나타난 대로 봉정대부로 있었던 시기는 명종 11년 5월부터 명종 13년 2월 사이이다. 이 두 사실을 종합하면 이 지도는 명종 12년 8월부터 명종 13년 2월 사이에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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