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1) 종묘와 사직

1) 종묘와 사직

 종묘는 先王의 神位를 봉안하는 왕실의 家廟로, 사직과 더불어 국가제사의 대종으로 간주되어 왔다. 국가의 중요한 일은 반드시 종묘에 먼저 고하는 의례 절차를 거친 다음에 의결되고 시행되었으며, 한발·홍수 등과 같은 국가적인 천변지재가 발생하였을 경우 先祖英靈의 陰佑를 기원하는 祈禳祭가 빈번하게 이곳에서 행하여졌다. 전근대사회의 가부장제적 조상숭배 사상에 연원을 두고 있는 이러한 종묘는, 왕권의 존엄성을 내외에 과시하고 통치체제를 공고히 다지며 지배이념을 재해석하는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상징적인 聖所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종묘의 기원은, 사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三國史記≫를 보면 신라에서는 남해차차웅 3년(6)에 始祖廟를 건립하고, 고구려에서는 대무신왕 3년(20)에 시조인 東明王廟를, 백제에서도 온조왕 원년(B.C. 18)에 동명왕묘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는 모두 국가 형태를 수립한 초기에 왕권을 확인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왕가의 선조를 제사하는 사당을 세운 일이었으므로, 곧 종묘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일찍이 태조 2년(919)에 曾·祖·考 3대를 추존하여 각각 廟號를 제정한 바 있지만, 성종 8년(989)에 가서야 “비로소 大廟를 營建하기 시작했다”477)≪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4월 을축.
≪高麗史節要≫권 2, 성종 8년 하4월.
는 사실로 보아 종묘제도를 후대의 그것과 비견할 수 있는 모습으로 정비한 것은 성종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종묘 제사는「天子七廟」·「諸侯五廟」478)≪禮記≫祭法.라고 하는 유교경전의 의례와는 다소 다르게, 가령 昭穆의 次序를 고려 나름대로의 법식에 따른다든지 혹은 공덕이 큰 선왕의 신위를 그대로 두어 11室이 된다든지 하는 형태로 거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당대에도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479)≪高麗史≫권 61, 志 15, 禮 3, 諸陵 정종 2년 12월·인종 2년 7월 및 공민왕 6년 8월 李齊賢 上議 등 참조. 후세에 와서도 누누히 지적되는 바였다.480)≪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정월 을묘의 河崙 참조.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종묘는 당연히 새로 영조되었으며 그 祭儀 또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성리학이라는 보다 이지적이고 보편적인 유교이념의 구현에 따라 어디까지나 禮에 의거하는 사전의 정립을 추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왕조의 몰락을 내외에 알리고 새로운「天命」을 받들어 개창하게 된 새 왕권의 존엄성과 새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었다.

 1392년 7월에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아직 ‘國號는 옛 것 그대로 高麗’로 한다고 발표하면서도 태조는 즉위교서의 첫 조목으로 우선 종묘·사직의 제도를 일신할 것을 말하였다.

천자 7묘, 제후 5묘와 左廟右社는 옛 제도이다. 前朝에서는 昭穆의 차서와 堂寢의 제도가 경전에 맞지 않았다…바라건대 禮曹에서 자세히 강구하여 의논을 내어 제정하도록 하라(≪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태조는 전조의 태조를 麻田郡으로 移安하여 때로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고려 성종은 중국을 경모하여 문물을 일으켰으며, 문종은 훌륭한 치세를 이루었고, 공민왕은 홍건적을 섬멸하고 중국을 잘 섬겼으니, 모두가 東方에 공덕이 있다고 하고 각기 마전군에 있는 고려 태조묘에 附祭하도록 조처하였다.481)≪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정사·신유. 도성 안에 있는 전왕조의 태조 이하 종묘의 신위를 외방으로 옮기면서도, 그 가운데의 훌륭한 공덕을 평가함으로써 전왕조를 계승하여 일어난 새 왕조의 善治를 약속하는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또 도성 안에는 吉地가 없다는 書雲觀의 계청에 따라 고려의 종묘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 왕조의 종묘를 짓기로 하고 大廟造成都監을 설치하였으며, 장자인 鎭安君 芳雨를 시켜 태조의 선조 4대의 神主를 孝思觀에다 임시로 안치하였다.482)≪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무신 및 10월 정사·을축.

 그런데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옛 터에 새 종묘를 건립하고자 했던 당초의 구상은 태조 3년(1394) 8월 漢陽이 새 도읍지로 결정됨에 따라 자연히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다시 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近臣들을 한양에 보내어 종묘와 사직·궁궐·朝市·도로 등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483)≪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9월 무술·병오. 그리고 그 해 10월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484)≪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0월 신묘·갑오. 이 때 종묘와 사직은「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종묘는 새 궁궐인 景福宮 동쪽의 蓮花坊에, 사직은 서쪽의 仁達坊으로 그 위치가 정하여졌다. 그래서 제도에 따라 종묘와 궁궐의 영건이 완공된 것은 태조 4년 9월이었고, 곧 개성에 있는 선대의 신주를 옮겨와 종묘에 안치하였다.485)≪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9월 경신·윤9월 기축. 이후 조선왕조의 종묘는 4대 이상 된 선왕의 신위를 祧遷하여 별묘로 이안하는「제후5묘」의 원칙에 따라 운용되었다. 즉 不遷位인 태조와 현재의 왕으로부터 가까운 4대의 선왕인 二昭·二穆 이외의 신위는 永寧殿으로 옮겨 안치하는 제도로 운용되었다. 그리고 종묘의 제향은 四孟月 즉 1·4·7·10월의 上旬과 臘日에 거행하도록 규정하였다.486)≪經國大典≫권 3, 禮典 祭禮.

 이와 같이 종묘의 외관을 구비하는 한편, 그 제사의 내용도 점차 고려시대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제도로 정비되어 갔다. 즉 역대의 군주들은 酌獻禮 행하기를 꺼려하여 혹 한 해에 한번 들어가거나 혹 평생토록 들어가지 않는 수도 있었으므로, 지금에 이르도록 종묘에 들어가는 것을 세상에 드문 盛典이라고 여겨 왔다.487)≪太祖實錄≫권 29, 태종 15년 정월 을묘. 그러나 새 왕조에서는 이러한 관행에서 벗어나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국왕이 종묘의 四時祭享을 친행할 것이 강구되었다.

나라를 보유하는 典禮로는 제사가 큰 일입니다. 古人은 제사 때를 맞이하면 7일 동안 戒하고 3일동안 齊하므로 天神이 감동하고 人鬼가 흠향하게 되는 터이니, 모두 자기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종묘와 籍田의 제사에서는 반드시 7일 동안 계하고 3일 동안 제하며 친히 작헌례를 행함으로써 후세에 법을 전하고, 만약 유고시에는 세자로 하여금 이를 섭행케 할 것입니다(≪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6월 임인).

도읍을 정한 시초에 먼저 종묘를 영건하여 時祀를 받들고 時物을 친신함은 報本의 정성이 지극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四時의 제향에 매양 대신에게 명하여 섭행케 하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상시로 천신하는 것을 제외하고 4시의 大享에는 반드시 친히 작헌하여 奉先의 예를 밝히고 보본의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임금이 기꺼이 시행토록 하였다(≪太祖實錄≫권 11, 태조 6년 4월 정미).

 그리하여 국왕의 親享禮度節次가 마련되고, 宗廟親享行事의 亞獻·終獻官 등의 집사관원이 규정되기도 하였다.488)≪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2월 을미.
≪世宗實錄≫권 128, 五禮, 吉禮序禮 獻官.
그것은 모두 송대 이래 채용된 제도로서 초월적인 왕의 권위를 장엄하게 과시하려는 데서 만들어진 의식절차였다. 물론 그 절차가 마련된 이후에도 종묘 제향이 대신들에 의해 섭행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 아닌 임시병통의 운용이었다. 그리고 종묘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宗廟署를 두었고, 그 관원으로는 종5품의 令 1인과 그 아래 直長·奉事·副奉事를 각 1인씩 두었다.

 한편 종묘가 새로 건립된 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보수 증축의 공사가 불가피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은 세종대 종묘의 別廟인 永寧殿이 영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종묘는 처음 영건시에 정전인 大室 안에 同堂異室의 神室 5칸을 만들어 穆祖 이하의 追尊 4代의 신위를, 그리고 나중에는 태조의 신위를 안치하였으므로 그 이후의 역대 왕들의 신위를 봉안할 여지가 애초부터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시일이 지남에 따라 신실의 부족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세종 원년(1419)에 정종이 죽고 그의 신위를 마련할 곳이 없게 되자, 이에 대한 대처방안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논의는 결국 송의 옛 제도를 따라 별묘를 세워 추존 4대의 신위를 봉안한다는 것으로 수렴되어, 세종 3년에 종묘의 大室 서쪽에 별묘를 짓고 이를 영녕전으로 칭하게 되었다.489)≪世宗實錄≫권 12, 세종 3년 7월 무진. 이 때 지어진 영녕전은 본전 4칸에 동서로 협실 각 1칸씩을 두고 기타는 대개 종묘와 동일한 규모로 축조되었다. 영녕전의 제향은 봄과 가을의 첫달 상순에 거행하도록 규정하였다.

 영녕전의 영건 이후 태조 이전의 4대의 신위가 차례로 종묘로부터 이곳으로 이안되었으며, 연산군대에는 정종의 신위가 옮겨졌다.490)≪燕山君日記≫권 12, 연산군 2년 정월 무술. 그런데도 종묘의 신실 부족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과제로 남아 명종대에는 종묘의 대실을 4칸 늘리는 제도를 강구하게 되었다.491)≪明宗實錄≫권 4, 명종 원년 9월 계미·갑신.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로도 필요에 따라 증축과 수리를 계속하였다.

 한편 토지신인 社와 곡물신인 稷에게 제사하는 단을 社稷壇이라고 하는데,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설치하였다. 토지와 곡식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 자체가 지배적인 생산수단과 그 생산물을 의미하였으므로, 토지신과 곡물신에 대한 숭앙은 이미 고대로부터 그 의미가 중시되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국가제사로 정립되고 치제되어 왔다. 사직이 종묘와 더불어 국가제사의 대종을 이루어 온 것은 그러한 인식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 사직에 제사를 지낸 기원은 이미 삼국시대부터였던 것으로 확인된다.492)≪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條를 보면 신라는 선덕왕대에 사직단을 세웠고, 또 고구려본기 6에 의하면 고구려는 고국양왕 9년에 유사에게 명하여 國社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고려시대는 성종이 사직을 제도화 한493)≪高麗史≫권 59, 志 13, 禮 1, 吉禮大祀 社稷 성종 10년 윤 12월 敎에, ‘내가 듣건대 社는 토지의 主인데, 땅은 넓어서 다 공경할 수 없으므로 땅을 封하여 社로 삼아 功에 보답하고, 稷은 五穀의 長인데 穀이 많아 두루 제사할 수 없으므로 稷神을 세워 제사한다고’고 하였다. 이후로 고려 일대를 통하여 각종의 제의와 祈雨祭·祈穀祭 등을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조선왕조가 수립된 후, 태조 3년(1394) 11월에 경복궁의 서쪽 仁達坊으로 사직의 위치가 결정되고, 다음해 정월부터 사직단의 축조를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사직단의 축조는 정종대의 開京 환도로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고, 또 종묘·궁궐·성곽 등 대규모 공역이 동시에 진행되는 관계로 백성들의 노동력 징발이 여의치 않아, 태종 7년(1407) 5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494)≪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5월 을해. 사직단이 완성되자 단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神室과 神門을 세웠다. 그리고 태종 16년에는 단 주변의 齋室을 마련하였는데,495)≪太宗實錄≫권 32, 태종 16년 9월 경자. 이는 사직에 재실을 두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관행496) 明使 張溥 등이 社稷을 가서 보고 거기에 齋廬를 영건하지 아니한 것을 貴하게 여겼다는 기사가 보인다(≪高麗史≫권 135, 列傳 48, 우왕 11년 9월).
韓㳓劤, 앞의 글, 157쪽 참조.
과는 다른 일로, 종묘·사직의 제향에 국왕이 친림한다는 새로운 사전의 원칙을 준수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세종 8년(1426)에는 唐의 옛 제도에 의거하여 사직단을 社稷署로 승격시키고, 그 관원으로 태종대 이래 社稷壇直 2인만을 두어온 것을 확대 개편하여 壇直을 錄事로 삼고 그 위에 종7품의 丞 1인을 두었다. 그리고 이 사직서 승은 종묘서 승 아래에 서열시키고, 奉常寺 主簿로서 겸직하게 하였다.497)≪世宗實錄≫권 32, 세종 8년 6월 신미. 사직서의 직제는 이후 다시 고쳐져 종5품의 令 1인, 종9품의 參奉 2인을 그 관원으로 두게 되었다.498)≪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

 사직단에는 仲春·仲秋의 첫 번째 ‘戊’字가 든 날과 臘日에 제향을 받들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정월에는 기곡제를, 그리고 가뭄·한발 등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祈雨·祈晴 등 祈禳祭를 가끔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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