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2) 자연신
  • (1) 원구제

(1) 원구제

 제천의 의례는 원시 이래의 오랜 신앙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거니와, 우리 나라에서도 유교적으로 제도화하기 이전부터 이미 국가 단위로 그것을 거행하고 있었다.≪삼국사기≫가 인용한 古記의 제례기사 가운데 고구려·백제가 각기 “하늘 및 산천에 제사하였다”, “단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하였다”고 전하는 기록500)≪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이 곧 그것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는 일찍부터 당·송의 제도를 수용하여 지배체제의 제도화를 시도하였거니와, 그 일환으로써 제천의 의례 또한 유교적으로 제도화하였다. 원구제의 채택이 곧 그것이다.

성종 2년(983) 봄 정월 신미에 왕이 圓丘에서 祈穀하고 태조를 배향하였다. 을해에는 籍田을 窮耕하고 神農을 제사하며 后稷을 배향하였다. 기곡·적전의 예가 이에서 시작되었다(≪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2년 정월 신미·을해).

 고려시대에 제도화된 원구제는 실로 천자국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려의 원구단에서는 어느 일방의 天神만이 아니라, 각기 동·남·중·서·북방을 주재한다는 5방의 천신인 청제·적제·황제·백제·흑제 모두와 그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昊天上帝까지를 치제하였다.501)≪高麗史≫권 59, 志 13, 禮 1, 吉禮大祀 圓丘. 여기 昊天上帝는 전체적인 천제요, 5帝는 각기 1方을 지배하는 천신이며, 전자가 천자의 지위라면 후자는 각기 제후의 지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文獻通考≫권 68, 郊祀考). 그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고려왕조가 그 후기에 이르러 원의 직접적인 압제를 받으면서도, 이른바 천자국만이 행한다는 제천의례의 혁파론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충렬·충선·충숙·공민왕대에 계속하여 종묘사직과 아울러 원구에 대한 제례를 단속적으로 거행하였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고려왕조의 원구제에 대한 폐지론이 대두하게 된 것은 고려 말기의 배원친명정책 이후의 일이었다. 주지하듯이 고려 말기 사류층의 배원친명정책은 밖으로는 당시의 국제적인 세력관계의 추이에 따라 추진된 것이었지만, 그 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그들이 기본 교학으로 수용하였던 성리학적 화이론·명분론·정통론 등이었다. 가령 당시의 대표적 사류의 한 사람인 鄭夢周가 “大明이 龍興하여 四海를 다 차지하게 되자 돌아가신 임금(공민왕)이 천명을 밝히 알아 表文을 받들어 신하를 칭하니, 명의 황제가 가상히 여겨 王爵을 封하였다”502)≪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고 한 말에 나타난 그대로 그들의 세계관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이제 명은 천자국이요, 고려는 그로부터 왕작을 받는 것이 당연한「天命」인 것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형세 하에서 明使가 고려에 나와 제천례의 혁파를 종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왕 때의 일이었다.

周卓이 使命을 받들고 나와503) 周卓이 고려에 사신으로 온 것은 우왕 11년(1385) 9월의 일이었다(≪高麗史≫권 135, 列傳 48, 우왕 11년 9월 참조). 우리 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귀국에서는 제천을 한다 하니 그러한가’하여,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주탁이 말하기를 ‘人事를 두고 말하자면 귀국에서 饗禮를 베풀고 (明의) 조정에 청한다면 재상은 혹 참여할 이치가 있겠지만 천자는 비록 정성을 다하여 청하더라도 어찌 귀국에 降臨할 것인가’하였다. 이에 비로소 제천례를 폐지하였다(≪世宗實錄≫권 1, 세종 원년 6월 경진).

 즉 친명정책을 추진한 이후 고려는 국가적인 의례가 이른바 천자국인 명과는 도저히 대비될 수 없으며 천자국의 재상이나 그에 상당하는 제후의 예에 준해야 한다는 明使의 종용이 있었으므로 제천례를 폐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고려말의 원구제 폐지가 명나라 사신의 용훼 한 마디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음에 살피는 바와 같이, 실제로는 그 뒤 조선왕조에 들어온 후에도 제천례는 한동안 ‘해마다 하는 常禮’로서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원을 이은 명의 고려에 대한 자세가 원 이상으로 고압적이었으며 그러한 정세 하에서 고려 말기의 사류층이 배원친명의 정책을 폈고, 뒤이어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면서 그 정책의 기조로 표방한 이론이 성리학적 명분론·정통론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원구제라는 국가제사에도 변동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형세를 조성하였다.

 개혁파 사류는 조선왕조 개국의 다음달부터 명분에 맞는 국가사전의 정비를 발의하면서 원구제의 혁파를 주장하고 나섰다.

禮曹典書 趙璞 등이 글을 올려 ‘臣 등이 엎드려 역대의 사전을 살피건대 宗廟·籍田·社稷·山川·城隍과 文宣王 釋奠祭는 고금에 통행하는 국가의 常田이요…圓丘는 천자의 제천례이니 청컨대 이를 파하소서’라고 하였다(≪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대사헌 南在 등이 아뢰었다…‘옛 법에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하며 대부는 五祀에 제사하고 士庶人은 각기 그 조부를 제사한다 하였으니, 각기 마땅히 제사드릴 바를 제사하는 것입니다. 어찌 스스로 선을 행하지 않고 오로지 귀신을 섬김으로써 복을 받는다 할 것입니까. 원컨대 이제부터는 사전에 등재된 바 이치상 마땅히 제사드릴 대상 이외에는 일체 금단하여 이를 常典으로 삼고, 어기는 자는 통렬히 다스리도록 하소서’(≪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갑술).

 즉 이들은 개국초에 새 왕조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무엇보다도 명분에 맞는 사전의 정리를 발의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는 천자국이 아니므로 원구제는 명분상 혁파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천의례는 유구한 역사 속에 존치해 온 국가적 제례이며 신앙이었다. 고려시대의 예로 보더라도 그것은 祈穀 즉 풍년을 기원하는 가장 현실적인 요청과 결부되어 지켜져 온 국가제사였다. 유교경전에서도 “元日에 上帝에게 기곡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504)≪禮記≫月令. 비록 조선왕조 초기의 지배층이 중국 천자를 의식하여 제후국으로서의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현실적 요청에서 거행되어 온 역사적인 제례와 신앙을 하루아침에 말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또 한편으로 제천례의 존치를 발의하기도 하였다.

예조에서 ‘우리 동방은 삼국 이래 圓丘에서 祀天하고 기곡·기우를 행하여 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가벼이 폐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사전에 등재하여 그 舊制를 회복하되, 칭호를 圓壇이라 하소서’라고 아뢰자, (임금이) 이에 따랐다(≪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무자).

 비록 명분에 맞지는 않을지라도 또한 새 왕조의 가장 시급한 문제인 풍년을 기원하는 의례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섬겨온 천제를 상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실적 요청으로 인하여, 조선왕조는 개국 후 한동안 원단제를 계속하였다. 태종 4년(1404)의 “祈穀 원단제를 漢京에서 행하니 곧 해마다 하는 상례이다”505)≪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정월 신해.라고 한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태종 11년에는 새로운 수도인 한양의 南郊에 다시 원단을 축설하였다.506)≪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11월 을묘. 제천례를 정규의 국가제사로 규정하고, 그 제도를 갖추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농업국가의 절실한 현실적 필요에서 원단제를 거행하면서도 새로운 왕조의 제도를 정비해가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으로서는 역시 성리학적 명분론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곧 역사적 실재와 가치론적 명분과의 사이에서 야기되는 필연적인 갈등으로 그들에게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새로이 원단을 축설하여 제천례를 제도화하기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의 변통을 논의하게 되었다.

영의정부사 河崙과 예조참의 許稠가 단지 동방의 靑帝에게만 致祭하기를 청하되, ‘제후국으로서 祀天한다는 것은 예에 합당치 않으니, 청컨대 단지 청제에게만 치제하소서’라 하니, 임금(태종)이 ‘우리 동방에서는 圓壇에 치제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卿 등의 논의가 옳기는 하다. 그러나 만약 수재나 한재가 일어날 것 같으면 이에 원단에 제사하지 않은 소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인가’라고 하였다(≪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12월 임진).

 즉 조선 초기의 지배층은 우리 나라가 제후국이라는 의식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으며, 그에 따라 이제 만방을 주재하는 昊天上帝에 대한 치제는 포기하고 다만 우리 나라가 위치한 동방만을 주재한다는 청제에 대해서만 제사하자고 발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 같은 명분론의 타당성을 시인하기는 하면서도 전통적 祀天禱雨의 실제적인 요청을 거부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갈등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세종대 이후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함께 전통의 제천례 또한 명분론에 따라 정리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을 전한다.

(卞季良이 말하기를) ‘前朝 2천 년 동안 서로 이어받아 온 祀天을 지금 폐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땅이 4방 수천 리로서 옛날의 백리 제후국과는 비할바가 아니니, 사천하는 데 무슨 혐의가 있을 것입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제후가 사천할 수 없음은 예에 있어서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어찌 땅이 수천 리 된다고 해서 드디어 천자의 예를 僭越할 것인가’라고 하였다(≪世宗實錄≫권 1, 세종 원년 6월 경진).

 명분과 실제를 일치시키기 어려운 이율배반의 현실 속에서 조선 초기의 사류정권은 원단제의 치폐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 대체적 경향은 점차 常祭로 거행함은 불가하지만, 일이 있어서 행하는 것은 오히려 가하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즉 세종대 이후 제천례는 폐지하는 것이 常道요, 그것의 설행은 혹심한 한발이 있을 때에나 행하는 임시의 방편이라는 것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원구제는 국가사전의 정식 치제대상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다.507)≪世宗實錄≫권 128, 五禮 辨祀條나≪經國大典≫권 3, 禮典 祭禮條에 제천의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國家祀典에서 사라진 것이다.

 원구제는 그 뒤 세조 2년(1456)에 갑자기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정식으로 昊天上帝 등에 치제하는 圜丘祭라는 제도로 부활되었고, 세조 10년까지 지속되다 그쳤다. 생각건대 세조대의 환구제는 불의로 왕권을 찬탈하고 많은 신료를 죽인 국왕이 자신의 초월적인 왕권을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실현하였다가, 자신의 왕위가 안정됨에 따라 그같은 요청이 줄어들자 그만 두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국가사전의 정비와 같은 역사적 제도의 수립과는 다소 다른 형태의 일시적 제천의례에 불과하였던 것이다.508) 金泰永,<圜丘壇>(≪서울六百年史≫, 文化史蹟篇, 1987) 제2장 제3절 참조. 그리고 圜丘祭는 19세기 말 朝鮮의 大韓帝國으로, 高宗이 皇帝로 형식적 승격을 보인 光武 원년(1897)에「天子祭天之禮」로 다시 부활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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