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1. 국가제사
  • 2) 자연신
  • (2) 자연신

(2) 자연신

 자연현상에 대한 국가적인 제례도 고려시대까지는 그 대상이 매우 잡다하여, 불교적·도교적 民俗神들이 그 小祀·雜祀의 대상으로 많이 나열되어 있는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이 원 세조의 딸과 결혼함에 따라 중국의 남쪽에 있으면서 水道를 주재한다는 三聖神과 그 북방에 있다는 大國神을 청하여 제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모두 고려의 사전에 올라 있었다.509)≪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7월 갑술.

 그런데 조선 초기 지배층의 祀神觀은 앞서 살핀 바 誠과 敬이라고 하는 인간의 소행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잡다한 국가제사의 대상을 개혁하여 예에 의거하는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또한 새 왕조의 왕권이 자기 나름대로 그 경내의 자연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예우의 질서를 부여할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가 개국한 다음달에 예조전서 趙璞 등은 국가제사의 정비를 주장하는 상소에서, 원구제의 폐지와 함께 諸神廟 및 각 주군의 城隍國祭所는 다만 ‘某州某郡城隍之神’이라고만 칭하고 位板을 설치하여 그 수령이 봄·가을로만 제사지내도록 허용하고, 그 奠物·祭器·酌獻禮는 일체 조정(明)의 예제를 따르도록 하자고 하여 자연신에 대한 정리도 함께 건의하였다.510)≪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이와 함께 道·佛流의 春·秋藏經百高座法席과 七所親幸道場, 諸道殿 神祠·醮祭 등은 前朝의 군왕들이 각기 私願으로 그 때마다 설치한 것인데 후세 자손이 그대로 따라 개혁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혁거하기를 주장하였다. 자연신과 함께 도·불류의 諸神에 대한 잡다한 제례를 대폭 정리하고자 발의한 것이었다. 이는 물론 조선왕조 개국 직후 사전의 정비 과정에서 유교적 예제에 따라 당연히 정리해야 할 것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기실 자연신에 대한 국가제사의 정비에 관한 사항은 이미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명의 사신이 가지고 온 明帝의 詔書에 피력되어 있었다. 즉 岳·鎭·海·瀆이라든가 각 주현 성황의 神號에 대해서 加封한 德號 따위를 모두 혁거하고, 그 本號대로 칭할 것 등을 종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511)≪高麗史≫권 42, 世家 42, 공민왕 19년 7월 임인.

 그런데 조선왕조의 개국초에는 유교적 예제에 따른 사전의 정비를 진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내의 자연신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칭호를 가봉하는 일도 실행하고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국내의 명산대천에 대한 德號의 加上을 더러 실행한 적이 있었다. 가령 妙淸이 西京 천도운동을 일으키면서 八聖堂을 설치하여 그 첫째로 白頭山을 높여서 ‘護國白頭嶽太白山人實德文殊師利菩薩’이라고 하였고,512)≪高麗史≫권 127, 列傳 40, 叛逆 1, 妙淸. 충렬왕대에 원에 보내는 助征軍에 대한 陰助를 기원하면서, ‘紺嶽山 第二子를 都萬戶로 封하였다’513)≪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12년 6월 기묘.는 사실 따위가 그같은 사례에 속한다. 고려시대의 사례는 당해 자연현상에 대한 의존적 신앙의 의식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조선왕조 초기에 경내의 자연신을 분봉한 것은 그 자연현상에 의존하고 기도하려는 특수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전 국토를 지배하는 왕권이 경내의 자연신을 優遇한다는 보편적 의례로써 실행한 것이었다.

吏曹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신을 분봉하도록 청하매, 松嶽성황을 鎭國公이라 하고, 和寧·安邊·完山성황을 啓國伯이라 하고, 智異·無等·錦城·鷄龍·三角·白岳 등의 여러 산과 晉州성황을 護國伯이라 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호국지신이라 하였다. 대개 大司成 劉敬의 陳言에 따라 예조에 명하여 詳定케 한 것이다(≪太祖實錄≫권 3, 태조 2년 정월 정묘).514) 또 吏曹에 명하여 東山을 護國之神으로 봉하게 하였다(≪太祖實錄≫권 8, 태조 4년 9월 병신).

 화령·안변·완산은 조선왕조의 발상과 관련된 곳이며, 나머지는 수도의 鎭山이거나 혹은 전통적으로 五嶽 등과 관련된 명산승지였다. 따라서 이들의 분봉은 모두 그 소재와 역사적 기능이 일정하게 관련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즉 왕권이 그 자신의 왕토 내의 명산경승에 대하여 그 존재에 걸맞는 역사적 역할을 부여하는 의례로서의 분봉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자연에 몰입해 온, 자연에 대한 신앙의식을 지양하여 왕권이 그 지배하의 자연을 파악해가는 적극적 자세의 표현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515) 金泰永, 앞의 글, 122∼124쪽.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재상으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후라야만 그 경내의 명산대천에 제사지낼 수 있다는 禮文에 어긋나는 관행이므로, 국가에서는 중국의 예제를 따라 각 군현에는 社稷壇을 세워 봄·가을로 제사를 거행케 하는 한편, 서민들은그 소재의 里에 里社를 세우고 거기에 제사하도록 한다는 법제를 세우기도 하였다.516)≪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계해.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닌 산천에 대한 민간의 祈福祭儀가 그같은 법령 하나로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도 여전히 “귀신은 속일 수 없으며 산천은 제사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지러이 부쫓아 습속을 이루어, 나라의 진산으로부터 군현의 명산대천에 이르기까지 瀆祀하지 않은 것이 없는”517)≪太宗實錄≫권 24, 태종 12년 10월 경신. 형세가 계속되었다.

 민간신앙으로서의 산천제는 국가로서도 갑자기 변화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국가 자체의 사전은 정비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태종대에는 오랜 논의 끝에, 고려의≪詳定古今禮≫에 실린 중사·소사의 내용을 고전을 참작하여 다소 정리하게 되었다.518)≪太宗實錄≫권 25, 세종 13년 4월 신유.

첫째, 風師·雨師·雷師는 唐代 이래 中祀로 승격되었으며 명의 洪武禮制에는 雲師까지 더하여 풍·운·뢰·우의 신이라 하여 산천·성황과 한 단에서 함께 제사하니, 이제 풍·운·뢰·우의 신을 중사로 올리고 산천·성황을 여기에 함께 제사하기로 한다.

둘째, 文宣王은 국학에서는 중사로 받들지만 주현에서는 소사로 하니 의리상 어긋나므로 송의 제도를 참작하여 주현에서도 중사로 승격한다.

셋째, 그 나머지 여러 제사의 等第는 일체 前朝의 詳定禮를 따른다.

 이 가운데 첫째 항목에 대해서는 세종대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풍·운·뢰·우는 천신의 붙이이며 산천·성황은 地祗의 붙이로서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므로 따로 제사함이 마땅하지만, 한 단에 合祀하는 것이 祖宗朝의 成憲이며 동시에 이른바「時王之制」라 하여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519)≪世宗實錄≫권 47, 세종 12년 2월 경인. 세조대 이후 제천례가 없어지고 “圜壇을 고쳐 南壇이라 하였는데…그 主壇은 風雲雷雨이니 神位가 가운데에서 南面하고 있으며…山川·城隍의 位板을 좌우에 配享하는데 모두 남면하고 있다”(≪正祖實錄≫권 35, 정조 16년 8월 무인)는 기사를 보면, 조선 초기 제천례가 정식으로 혁파된 후로 풍운뢰우제가 그것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는 당·송·명 등의 예제를 참작하여 국내의 저명한 악·해·독 등은 중사로, 여타의 명산대천은 소사로 제사한다는 것을 논의 결정하고520)≪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6월 을묘. 이어서 새 왕조의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사의 대상인 악·해·독·성황과 소사의 대상인 명산대천을 배열하였는데,521)≪太宗實錄≫권 28, 태종 14년 8월 신유. 이는 세종대에 다소의 변경을 거쳐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522)≪世宗實錄≫권 128, 五禮, 吉禮 辨祀.

①中祀(嶽·海·瀆);악으로는 남쪽의 智異山(남원), 중앙의 三角山(한성부), 서쪽의 松嶽山(개성), 북쪽의 鼻白山(정평)이 있고, 해로는 東海(양양) 南海(나주) 西海(풍천)가 있으며, 독으로는 남쪽의 熊津(공주) 伽倻津(양산), 중앙의 漢江, 서쪽의 德津(임진) 平壤江(평양부) 鴨綠江(의주), 북쪽의 豆滿江(경원)이 있다.

②小祀(명산대천·성황);雉岳山(원주) 鷄龍山(공주) 竹嶺山(단양) 亏弗山(울산) 主屹山(문경) 全州城隍(전주) 錦城山(나주) 木覓(한성부) 五冠山(개성) 牛耳山(해주) 紺嶽山(적성) 義館嶺(회양) 永興城隍(함길도) 楊津溟所(충주) 楊津(양주) 長山串(장연) 阿斯津 松串(안악) 淸川江(안주) 九津 溺水(평양) 德津溟所(회양) 沸流水(영흥)

 또 저명한 산악·성황신에 대하여 봉작을 더해 온 관행이 예제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어나, 이의 개정도 단행되었다. 즉 전조 이래 경내 산천에 각기 봉작을 더하고 혹은 처첩·자녀·생질의 像을 설치하여 제사하고, 혹은 太王·太后·太子·太孫妃를 칭하여 미신적 祀神을 설행해 온 것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어느 신이거나 그 처첩 이하 잡신의 이름은 물론 그 신상 따위도 모두 철거하여 主神 일위만 남겨 놓을 뿐 아니라, 종래 거기에 덧붙여 온 봉작 또한 제거하여 다만 ‘某州某城隍之神’이라거나 ‘某海某山川之神’이라고 개칭함으로써 사전을 바로잡는 개혁운동이 거듭 일어난 끝에 세종 19년(1437)에 가서야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523)≪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6월 을묘.
≪世宗實錄≫권 23, 세종 6년 2월 정사·권 49, 세종 12년 8월 계유 및 권 76, 세종 19년 3월 계묘 참조. 전통적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모셔온 神像과 그 붙이들을 철거하는 대신 문자로 쓴 主神 一位의 위패만을 안치하고, 또 태조대에 지리산을「護國伯」따위로 봉작한 것도 이 때 와서는 혁파하고,「智異山之神」이라고만 쓰도록 제도화하였다.

 한편 자연신에 대한 신앙적인 사신이 이제 제도적·사회적인 사신으로 변천해감에 따라, 그 의례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대체로 민간신앙으로서의 자연신에 대한 치성은「百人白祀」의 행태를 지속해 온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하겠거니와, 국가적 사신에 있어서도 여말선초까지는 그 의식이 잡다하였다. 즉 巫女·宦侍·司錀輩 등에게 이를 전담시켜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한다. 조선 초기의 사류정권은 이것을 일괄 정리하고 나섰으니 곧 다음의 기사에서 알 수 있다.

禮曹에서 ‘또한 祀神은 誠敬을 위주로 하는데 淫祀를 함부로 행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아니함만 못합니다…가령 國巫堂과 紺嶽·德積같은 곳은 무녀와 사약을 보내어 아무 때나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일체 금단하소서’라고 아뢰었다(≪定宗實錄≫권 6, 정종 2년 12월 임자).

예조에 명하여 德積·甘嶽·開城大井의 제례를 정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국가에서 전조의 잘못을 이어받아 덕적·白岳·송악·목멱·감악·개성대정·三聖·朱雀 등지에 봄·가을로 祈恩하였는데, 매번 환시·무녀·사약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女樂을 베풀게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임금이 ‘신은 예가 아닌 것을 흠향하지 않는다’하고, 禮官으로 하여금 널리 고전을 상고하여 모두 파하게 하고, 內侍別監으로 하여금 香을 받들고 나가 제사지내게 하였다(≪太宗實錄≫권 22, 태종 11년 7월 갑술).

 즉 조선 초기에는 아직도 전대 이래의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이들 자연신에 대한 국가제사에 무녀 등이 제주로 나아가 기녀의 奏樂 속에서 치제해 오고 있었으니, 이는 곧 그 신에 몰입적으로 祈求하는 諂祀의 형태로서 무당의 굿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祀神은 성경이 위주’라는 입장에서 인간을 위주로 제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류정권은 이 전통적인 양식의 자연신앙을 전면 개혁하여, 무녀 등에게 전담시켜온 사신행태를 아주 폐하고 국왕을 직접 시어하는 別監, 즉 王臣이 직접 나아가 焚香祭를 지내도록 제도화하였다.

 제례에서 무녀 등이 직업적인 제주로 행세하면서 이에 여악을 동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보면 비록 의제상으로나마 정권과는 대조적인 祭權의 독자적 잔존형태인 것 같아서 자못 흥미로운 바 있다. 그러한 고유한 전통은 여말선초까지 상당히 온존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사례를 들면 巫覡의 의제적인 관할 하에 있던 馬牧神에 대한 치제가 태종대에 이르러 혁파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예조에서…‘司僕寺는 巫覡으로 하여금 馬神을 제사지내게 하는데, 淫祀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馬祖·馬步·馬社·先牧의 신을 제사함에는 司僕官으로 하여금 香을 받아 제사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자, (임금이) 이에 따랐다(≪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11월 경진).

 즉 전통적으로 무격이 관장해온 여러 마목신에 대한 제사를, 이제 왕의 신하로서의 사복관이 향을 받들고 나아가 첨사가 아닌 치제의 의례를 행하도록 일원화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의제상의 잔형에 지나지 않지만, 자체의 고유한 전통을 지녀온 무격의 마목신에 대한 제권이 이제 완전히 왕권 속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왕조 초기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정립된 여러 자연신과 그 祭日은 다음과 같다. 즉 우선 중사의 대상으로 풍·운·뢰·우와 악·해·독은 이미 살핀대로 天神·地祗의 종류로서 춘·추의 중월 상순에 제사하는데 그 단은 南郊에 있고 거기에는 성황도 함께 제사하였다. 先農壇은 東郊에 있으며 전설적 농사신인 神農氏·后稷氏를 대상으로 경칩 후 첫 亥日에 제사하며, 先蠶壇은 東小門 밖에 있는데 蠶神인 西陵氏를 季春의 첫 巳日에 제사하였다. 또 동대문 밖에 雩祀壇을 설치하여 孟夏 상순에 정기적으로 기우제를 지냈는데, 木神인 句芒氏·火神인 后土氏·金神인 蓐收氏·水神인 玄冥氏, 그리고 후직씨 등을 함께 향사하였다.

 또한 소사로서의 馬祖는 馬神인 天駟星이며, 先牧은 맨 처음 말을 기른 자이고 馬社는 맨 처음 말을 탄자, 馬步는 말을 해치는 신이라는 것인데, 각기 仲春·仲夏·仲秋·仲冬의 중간 절후를 지낸 후 剛日에 제사하였다. 또 靈星은 풍년을 맡은 天田星이니 입춘 후 辰日에, 老人星은 壽星으로서 추분날에, 명산대천은 춘·추의 중월에, 司寒은 수신인 현명씨를 제사하는데 季冬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춘분날 氷庫의 문을 열 때 제사하였다. 禡祭는 兵亂을 맡은 蚩尤神을 향사하는 것이니 講武 하루 전에 행하고, 纛祭는 軍旗에 대한 제사로 경칩과 상강날에, 그리고 厲祭는 의탁할 데 없는 여러 귀신들에 대한 제사로서 청명날과 여름의 7월 15일 및 가을의 10월 초하루에 행하는데 여기에는 성황신을 함께 향사하였다.

 이 밖에도 현실상의 요청에 직면할 때마다 여러 형태의 기우제 따위는 공공연한 국가적 행사로 계속 거행되었다. 또 가령 수륙의 모든 餓鬼들에게 齋食을 공양함으로써 王家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른바「國行水陸齋」는 사실상 국가적으로 공인된 왕가의 제례이며, 그 항구적 실행을 위해 國行水陸田이라는 분급수조지로서의 특수 사원전을 주고≪經國大典≫에도 이를 無稅地로 규정하였다.524)≪世宗實錄≫권 24, 세종 6년 4월 경술.
≪經國大典≫권 2, 戶典 諸田.
金泰永,≪朝鮮前期 土地制度史硏究≫(知識産業社, 1983), 118∼121쪽.
특히 이전부터의 관행으로서 이른바「國巫堂」이라는 것을 설치해 두고 왕가에서 무당을 파견하여 수시로 산천에 복을 비는 민속적 제의 또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그 나름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왕실뿐 아니라 사대부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무당 따위를 통하여 祈恩·祈福하는 행사는 좀처럼 단절되는 일이 없는 하나의 전통적 민속으로서 존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례들은 조선왕조의 사류정권이 공식적으로 추구하는 성리학적 祀神觀에 입각한 국가사전과는 별개의 것으로 설행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국가의 사실상의 공인하에 왕가에서 설행하는 일이었다 할지라도 이제는 국가의 정규행사로 거행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사적인 일에 속하는 것이었다. 가령 국행수륙전의 경우도, 그것이 비록 국가 공전인 민전의 수조권을 절급한 것이지만, 국용과 왕가의 용도를 확연히 구분하기 어려운 당시의 국가재정이었던만큼 그것은 국가를 대표하는 왕가의 사적 祭儀의 운용을 위한 재원으로써 설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복·기은 따위의 행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사전에서는 사라졌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자연신에 대한 국가제사는 실로 당의≪禮樂志≫와 송의≪文獻通考≫, 그리고 명의≪洪武禮制≫를 비롯한 역대 중국의 유교적 국가제사 관계 예제를 면밀히 검토하고, 한편으로는 전통적 제례들을 참작하여 祭樂·壇祠·祝式·奠物 따위를 일일이 점검함으로써 정비해간 것이었다.525)≪世宗實錄≫권 47, 세종 12년 2월 경인. 거기에는 특히 성리학의 理知的 가치관과 그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 전대에 비하여, 잡다한 자연신에 대한 몰입적 신앙의 관념을 어느 정도 지양하여 그 왕토 위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어루만지고 예우하는 치제 관념의 표현형태로 제도화되었다. 가령 전대에는 없었던 厲祭라는 것을 신설하여 의탁할 데 없는 百神에 대한 제사를 제도화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그같은 사례에 속하는 것이다. 여제가 언제부터 거행되었는지는 기록상 자세하지 않지만, 태종 원년(1401)에≪홍무예제≫를 따라 이를 설행할 것이 건의되었으며,526)≪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갑술. 세종 12년(1430)의 壇祠·祝式 논의에서는 이미 성황단과 동시에 설행하는 여제단의 제도가 논의되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도교·불교류의 여러 잡사를 통하여 임시로 그같은 원혼을 달래는 관행을 지속해 왔으나, 조선 초기에는 여제를 소사로 규정하여 정식 사전에 등재하고 정기적으로 향사하도록 하였다.

 특히 조선왕조에서는 사직단·성황단·여단을 중앙은 물론 지방 각 군현에서도 이른바「三壇」이라 하여 정기적으로 치제하도록 제도화하였다. 토지신·곡신·국토수호신뿐 아니라 왕토 안의 어떠한 無主百神도 국가제사에서 빠지는 일이 없도록 전국적으로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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