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2) 도첩제와 부역승
  • (2) 승려의 부역과 그 신분 하락

(2) 승려의 부역과 그 신분 하락

 삼국시대 이래로 승려들은 道人·和上(上人)으로 존경받아 왔다. 특히 신라에서는 그 이름 밑에「師」자를 붙여서 스승으로 공경하였고, 또 고려에서는「福田」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승려들은 국가 工役에 동원되어 막노동하는 승려(赴役僧)로까지 전락하였다.

 개국 초부터 부역승의 존재가 확인된다. 태조 2년(1393) 11월에 新都의 경영을 위해 놀고 있는 승려들을 부역승으로 모집한 사실617)≪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1월 경신.이다. 그 이듬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이 景福宮을 짓는 공사에 많은 승려들을 모집하여 역승으로 동원하였다.618)≪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12월 을사 및 권 7, 태조 4년 2월 을축. 그 때 대궐을 짓는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은 일꾼(丁夫)들을 돌려보내고 승려들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첫째, 工匠卒徒가 수만 명이나 소요되는 국가의 큰 공사에 농민들만으로 다 충당한다면 농사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일도 오래 걸리며 또 건축기술이 없어서 일솜씨가 서툴다. 반면에 농사일도 없고, 가정도 없는 승려들 중에는 전문적 기능과 일솜씨를 지닌 자들이 많으므로 그들을 모집하여 일을 시킨다면 일도 능률적이고 농사일도 그르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개국 초에 처음 도승의 기준을 정하지 않아서 승려의 수가 전체 백성의 10분의 3이나 되며 그 중에서 부역에 가능한 자가 또한 3분의 2나 된다. 특히 승려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먹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無常한 곳에 머물러 僧堂에서 마음을 닦는 이가 최상이며, 법문이나 강설하며 말을 타고 다니는 승려는 중간이고, 齋를 올리는 데나 초상난 곳에 다니며 옷과 밥을 얻는 자는 하류이다. 그러한 하류의 승려들을 국역에 동원시킨다는 것이다.619)≪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2월 계미.

 여기에서 승려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물론 고려시대에서 조선 개국초인 당시에까지 해당이 된다. 新宮 조성 때의 동원 이후에는 한참동안 부역승에 관한 기록이≪조왕조실록≫에서 보이지 않다가 태종 중반 이후에야 보이기 시작했다. 태종 12년(1412) 5월에 도성의 좌우 행랑과 창고 등을 조성할 때, 놀고 있던 승려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다.620)≪太宗實錄≫권 23, 태종 12년 5월 을사. 그리고 이듬해인 13년 6월에는 동서 別窯와 행랑공사에 참여했던 부역승들을 돌려보냈다고 하였다.621)≪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6월 무신. 동별요와 서별요의 事役에 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으나, 행랑공사와 비슷한 시기에 기와굽는 일에도 승려들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내용이 너무 간단해서 역승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각 절에 소속된 노비들이 절 안팎의 모든 노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승려들이 직접 힘든 노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 개국 초에는 遊手僧을 포함한 승려들이, 또 태종대에는 유수승도가 국역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정한 寺籍이나 소임도 없이 떠돌아 다니며 승려로서의 行儀에 충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놀고먹는 승려라는 뜻으로「유수승」이라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태종 당시에 서울과 지방의 각 官司에서 營繕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승도들을 징발하여 일을 시켰는데 이들을「請衆」또는「請僧」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도첩을 주거나 승직을 주는 조건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듯하다. 태종은 17년(1417) 11월에 예조에 교지를 내려 전국의 모든 관사로 하여금 청승의 법을 일제히 금하게 하였는데, 별요에서 청승들에게 기와굽는 일도 시키지 못하게 하였다.622)≪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1월 임자.

 그 뒤 세종대에 이르면 이 부역승은 매우 빈번히 동원되고 그 노역의 대가로 양식을 받거나 도첩 및 직첩을 발급 받기도 하였다. 세종 8년(1426) 2월에는 지방 승려들이 징발되어 별요에서 기와굽는 일을 도와 옷과 양식을 받았으며,623)≪世宗實錄≫권 31, 세종 8년 2월 계미. 11년 3월에는 太平館의 역사에 동원된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도록 하였다.624)≪世宗實錄≫권 43, 세종 11년 3월 무진. 15년 2월에는 각 도의 승군 1,000명을 징발하여 태평관의 역사에 일하게 하였고,625)≪世宗實錄≫권 59, 세종 15년 2월 을해. 17년 5월에 興天寺 舍利塔新殿을 공사할 때에 역승 동원의 일을 繕工監에게 맡겼다.626)≪世宗實錄≫권 68, 세종 17년 5월 임진. 20년 2월에는 흥천사 舍利閣의 공사에 역승군 600명을 동원하였다. 이 때 자원한 역승에게는 30일을 채우면 도첩을 주고, 자신이 양식을 가지고 와서 일하는 자는 15일이 차면 도첩을 주었으므로 사방에서 승려들이 모여들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627)≪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2월 계유.

 그 밖에도 세종은 지방 군사도로의 확장 및 院館의 건립공사 등에도 승려들을 동원하였으며,628)≪世宗實錄≫권 91, 세종 22년 11월 계축. 山陵의 역사에 도첩 없는 승려들을 모아 일을 시켜 도첩과 직위를 주기도 하였다.629)≪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3월 을미.

 한편 불교를 신봉하던 세조는 4년(1458) 8월부터 楡岾寺 등 여러 곳에 부역승 46,598명을 동원하였는데, 그 중에 43,894명에게 도첩을 주었으며, 懿墓와 刊經都監의 역사에서 도첩을 받은 자는 셀 수 없었다. 또 檜巖寺의 중수 때에는 17,080명의 역승 중 15,274명에게 도첩을 주었으므로 그 후 무식한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머리를 깎아 그 폐단이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세조 8년 4월에 예조에서 부역승에게 도첩을 주지 말 것을 아뢰자 왕은 그에 따랐다.630)≪世祖實錄≫권 28, 세조 8년 4월 기사.

 숭유배불에 철저하였던 성종도 부역승을 많이 동원하여 그 노동의 대가로 도첩을 주었다. 성종 14년(1483) 3월에서 15년 9월 사이에 있었던 昌慶宮 건립공사에 4,000여 명의 부역승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도첩을 주었는데, 14년에 3,000명의 승려가 동원되었고, 15년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부역하였다.631)≪成宗實錄≫권 163, 성종 15년 2월 경신·계해·을축. 이 때 조신들로부터 많은 반대와 항의를 받았으나, 성종은 백성들의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고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구실로 그 밖의 공사에도 승려들을 동원하였다.

 ≪경국대전≫에서 度僧條를 삭제하여 선·교 양종이라 일컬어지던 당시 불교의 존립 근거를 없앤 중종도 부역승을 적지 않게 동원하였다. 중종 30년(1535)에 계획을 세운 安行梁(충남 태안반도 서쪽) 運河공사의 試行工役으로 한강 상류의 犬項 防塞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31년 7월 준공하였는데, 거기에 동원된 3,000여 명의 부역승들에게 號(戶)牌를 주었다.632)≪中宗實錄≫권 82, 중종 31년 6월 갑오·8월 신묘. 호패는 국민의 신분증이었으므로 승려에게는 도첩을 주어야 하는데 당시는 이미≪경국대전≫에 도승조가 삭제되어 승려이면서도 도첩을 지닐 수 없었으므로, 신분상 국가로부터 보장받을 근거가 없어진 승려들에게 도첩 대신에 노역의 대가로 호패를 주었다.

 불교 말살론을 주장하는 朝臣과 儒士들이 역승에게 호패를 지급하는 일에 대해 묵과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견항역사에서 호패를 받지 못한 승려 1,500여 명과 또 新川에 공사가 있다 하여 모여든 1,300여 명이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호소하였으므로, 관리들이 내쫓으면 10여 리 사이에서 서로 아우성치며 엉켜 늘어졌다.633)≪中宗實錄≫권 81, 중종 31년 5월 갑자. 그러한 작폐까지 겹쳐 역승의 호패문제가 조야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왕은 안행량의 공사를 중단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중종 32년 2월에 착공하여 7월에 마쳤는데, 물론 거기에도 수천 명의 승려를 동원하였고 그들에게도 호패를 주었다. 공사 시작 이전부터 논란이 분분하였던 僧給牌의 문제는 그 공사가 끝나자 다시 제기되어 견항과 蟻項의 공사에서 역승에게 준 호패를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치듯 하였다. 그 때 중종은 “역승의 근본 뜻은 오직 抑僧에 있으며, 호패를 주는 것은 억승의 규모이다”634)≪中宗實錄≫권 83, 중종 32년 2월 기묘.라고 변명하였으며, 영의정을 비롯한 원로 대신들의 논의에 따라 이미 준 호패는 몰수하지 않고 그들이 쌓은 제방과 뚫은 運路를 영구히 수축하도록 하되 거기에 응하지 않는 자는 호패를 몰수하고 호패가 없거나 공사를 피해 도망간 자는 색출해내어 군인으로 충당시키도록 하였다.635)≪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9월 무술.

 이와 같이 불교를 억제하던 시대에는 승려가 되기 위해 부역에 동원되어 도첩을 얻었고, 廢佛의 때에는 노역에 나아감으로써 도첩이 아닌 호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는 노역에 동원되어도 호패조차 얻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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