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3) 왕실의 불교숭신과 불교행사
  • (2) 척불정책 하에서의 왕실불사

(2) 척불정책 하에서의 왕실불사

 태종은 즉위하면서 종전의 國行佛事를 폐지하였으나 그 원년(1401) 정월에 왕실에서는 여전히 乾聖寺에서 帝席禮懺을 베풀고, 津寬寺와 觀音窟에서 水陸齋를 베풀었다. 이 일에 대해 태종은 궁중의 부녀들이 자손의 수명연장을 바라고 행하므로, 그것을 금하고자 하나 아직 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변명하였다.655)≪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정월 정축. 부왕인 태조에 의해 행하여졌던 국행불사를 폐지한 태종도 직접 자신의 자손을 위해 왕비가 베푼 佛事法席은 금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태종은 부왕의 구병을 위하여서 또는 자신이나 처자 권속들을 위한 불사법석을 많이 베풀었다. 특히 부왕 태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불교의식에 의한 49재와 여러 가지의 법석을 베풀고 그 山陵에는 開慶寺를 세워 齋宮으로 삼았다.656)≪太宗實錄≫권 16, 태종 8년 7월 을해. 또 태종은 개경사를 창건한 이듬해인 9년 8월에 그 모후의 齊陵에 세워져 있던 衍慶寺를 개창하게 하여 그 이듬해 4월에 완공하였는데, 왕은 사재로 法衣와 法鉢을 갖추고 法華經法會를 베풀어 낙성하였다.657)≪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8월 신해 및 권 19, 태종 10년 4월 임인. 그리고 태종은 자신이 젊었을 때 공부하며 머물었던 원주 覺林寺를 중창하게 하였으며658)≪太宗實錄≫권 33, 태종 17년 9월 정묘. 그의 넷째 아들 誠寧大君이 14세에 요절하자 그 무덤 가까이에 大慈庵을 세워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659)≪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4월 갑신.

 이 밖에도 태조의 원찰인 흥덕사 창건을 도우고 흥천사 전탑을 중수하는 등의 불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불사를 행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은 불교를 싫어한다는 뜻을 신하들에게 밝히고 그 입장을 변명하였다. 그 한 예로 태종은 왕후의 병이 위독하여 본궁에서 藥師精勤을 베풀고 100명의 승려에게 경회루에서 허탄한 것임을 알지만 왕비가 불교를 믿기 때문에 빌어보는 것이라고 하였던 사실660)≪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5월 갑신.을 들 수 있다.

 태종보다 더 심한 억불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성종이나, 기불 및 폐불의 군주라 불리우는 연산군과 중종대에도 왕실에서 불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불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대비나 중궁이 행한 경우들이었다.

 성종은 즉위하면서 전왕 예종의 7재를 진관사·奉先寺·藏義寺 등에서 지냈으며, 또 百齋와 小祥齋를 정인사에서 벨풀었다. 성종 5년(1474) 4월에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장의사·진관사·정인사 등에서 7재를 베풀었으며, 가뭄이 심한 때에는 절에서 기우하게 하였는데, 그 당시는 대비가 섭정을 하던 시기였다.

 불교를 배척했던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부왕을 위해 7재와 수륙재 등의 불사를 베풀었는데, 그 역시 두 대비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도승조를≪경국대전≫에서 삭제하고 선교양종과 승과제도를 모두 폐지해 버린 중종도 그 즉위초에 연산군대 몰수당한 모든 水陸·陵寢寺刹의 位田을 돌려주고 또 연산군에 의해 폐사가 된 淨業院 등의 절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는데, 이것 역시 대비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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