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3. 도교
  • 1) 소격서 중심의 과의적 도교

1) 소격서 중심의 과의적 도교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기조로 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했던 만큼, 유교에 입각하여 문물 제도의 정비를 추진하였으며, 이를 위해 과거의 문화전통 가운데 유교와 배치되는 요소들을 청산하고자 했다. 도교도 이러한 것의 하나였는데, 도교의 정비는 고려시대 왕실을 중심으로 한 재초의 번잡함과 이를 주관하는 도교기관의 잡다함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대한 논의는 고려말 鄭道傳이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이미 지적된 바 있었지만704)≪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3월. 조선왕조 건국 직후부터 구체화되었다. 즉 태조 원년(1392) 8월 禮曹典書 趙璞 등은 국가의 祀典을 유교이념에 맞게 고칠 것을 건의하면서, 그 일환으로 고려 때 설치되었던 여러 道殿과 神祠의 재초를 모두 폐지하자고 했다.705)≪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8월 경신. 그리고 3개월 뒤에는 예조에서 다시 星醮를 하는 장소가 많으면 오히려 불경한 것이 된다 하여 福源宮·神格殿·九曜堂·燒錢色·大淸觀·淸溪拜星所 등의 도교기관을 모두 없애고, 昭格殿 한 곳만 존속시키자고 건의했다.706)≪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11월 무인.

 이 중에서 태조는 조박 등의 도교기관 및 재초의 전폐 주장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 함흥 남쪽 都連浦에 祭星壇을 쌓고 太白金星에 제사한 적이 있었고,707)≪增補文獻備考≫권 61, 禮考 8, 祭壇. 즉위 후에는 여러 勳臣들과 더불어 도교의 풍습인 守庚申을 거행했던 점708)≪龍飛御天歌≫권 9, 제78장 大注. 守庚申이란 사람 몸속에 있는 三尸蟲이 하늘로 올라가 사람이 잘못을 보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신일에 밤잠을 자지 않고 지키는 행사를 말한다. 등으로 미루어, 개인적으로는 도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후퇴한 예조의 건의는 받아들였다.

 이로써 고려시대에 남설되었던 도교기관이 정리되어 소격전과 대천관만이 남게 되었다.709)≪太宗實錄≫권 7, 태종 2년 4월 신묘의 金瞻의 상소. 그러나 대청관은 한양천도 후에도 개성에 남아 있다가 세종 4년(1422)에 폐지되고 말았다.710)≪世宗實錄≫권 18, 세종 4년 11월 경오. 따라서 조선시대에 공식적인 도교기관으로서 각종 재초를 주관한 것은 소격전이라고 할 수 있다.711) 소격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李鍾殷,<昭格署관계 역사자료 檢討>(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道敎와 韓國文化≫, 亞細亞文化社, 1988).
李秉烋,<昭格署의 革罷論議와 士林派>(≪嶠南史學≫1, 1985).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조는 도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위기간 동안 소격전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곳에서 時令의 조화를 비는 太一醮를 거행했다든지,712)≪太祖實錄≫권 4, 태조 2년 11월 신유. 한양천도라는 국가 중대사의 가부를 점쳤다는 것은713)≪太祖實錄≫권 6, 태조 3년 8월 기묘.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그래서 한양으로 천도하여 新都를 경영할 때에도 지금의 서울 삼청동 부근에 소격전을 새로 조영했다.714)≪太祖實錄≫권 9, 태조 5년 정월 기사.

 한편 태종대에는 소격전 등에서 행해지는 재초의 제반 규정을 詳定하고자 했다. 태종은 공양왕대 密直司 代言으로서 강화도 摩利山에서 재초를 주관한 적도 있었지만,715)≪世宗實錄地理志≫권 148, 京畿 江華都護府. 유교적 소양을 가졌기 때문에 부왕인 태조와는 달리 재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중국의 역대 왕조나 고려에서 재초를 거행했으므로 이를 답습한다는 입장을 취하여,716) 이러한 사실은 태종 17년 11월 예조참판 許稠가 소격전 改營을 주청했을 때, 태종이 天皇과 星辰에 초례를 드리는 일의 실제 이치는 모르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와 고려에서 모두 초례를 지냈으므로 이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1월 무진). 2년(1402)에는 개성에 다시 소격전을 건립했으며717)≪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경술. 당시는「제1차 왕자의 난」이후 개성으로 환도한 상태였다. 재위 18년간 20회에 걸쳐 각종 재초를 설행했다. 그러므로 태종은 재초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관한 제반 규정의 정비가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태종 4년에는 우선 국가의 제례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 조선왕조의 제례 정비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金瞻에게 星宿醮禮를 상정케 했는데,718)≪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2월 신묘. 이 때에는 한 차례 물의가 있었다. 그것은 김첨이 평소 불교와 도교를 신봉하고 있어,719)≪太宗實錄≫권 35, 태종 18년 5월 계축의 金瞻의 卒記 참조. 이 기회에 대청관을 수리하여 천황대제를 제사하자고 하는 등 도교의 위치를 국가적인 종교로 끌어올리려 한 데 대하여 權近·河崙 등이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빚어진 것이었다.

 한편 태종 8년에는 소격전 提調로서 수련적 도교에 조예가 깊은 孔俯를 중국에 파견하여 道家醮祀之法을 배워오게 했다.720)≪太宗實錄≫권 16, 태종 8녀녀 10월 경진. 이 밖에≪太宗實錄≫에 나오는 중요한 도교 관련 행사의 정비사실을 들면 다음과 같다.

태종 8년(1408) 정월 기사;本命醮 폐지    9년(1409) 12월 경자;太一醮의 祭日을 三元과 四立日로 정례화    12년(1412) 3월 병신;鎭兵醮禮를 古制에 맞추어 개정    13년(1413) 3월 경진;眞武醮를 거행하는 시간을≪眞武經≫에 의거해서 5更 초로 개정

 제초의 상정과 함께 소격서 직제의 정비도 이루어졌는데, 태종 5년에는 소격서가 예조에 소속되었으며,721)≪太宗實錄≫권 9, 태종 5년 3월 병신. 세종대에는 그 구성원의 숫자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즉 세종 5년(1423)에는 3명이던 提調와 提擧를 1명씩 줄이고, 1명이던 別坐를 1명 더 증원했다.722)≪世宗實錄≫권 19, 세종 5년 2월 경신. 그리고 세종 16년에는 書題職을 혁파하고 소격전에 소속된 道流들로 하여금 서제의 임무를 담당하게 했으며,723)≪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9월 을해. 20년에는 副提調를 한 명 줄였다.724)≪世宗實錄≫권 80, 세종 20년 3월 병신. 따라서 세종대의 소격전 직제 조정의 전체적인 방향은 소속 관원의 정원을 줄여나가는 것이었다. 또 세조는 6년(1460)에 임기에 구애됨이 없이 근무하는 久任官員의 정원을 정했고,725)≪世祖實錄≫권 21, 세조 6년 8월 기미. 12년에는 소격전을 昭格署로 개칭했다.726)≪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된 소격서의 직제가≪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이에 의하면 소격서 從五品衙門으로서 제조 1명, 令 1명(종5품), 別提 2명(정6품, 종6품 각 1인), 참봉 2명(종9품)이 있었으며, 잡직으로는 도류 15명이 있어 尙道(종8품)와 志道(종9품)에 差任되었다.727)≪經國大典≫권 1, 吏典 京官職·雜職. 그리고 잡학의 하나로 도류를 양성하는 道學이 있었고,728)≪經國大典≫권 3, 禮典 生徒. 도류를 선발하는 취재에서는 禁壇(재초때 독송하던 도가의 術書)을 외우게 하고≪靈寶經≫을 읽게 하며,≪延生經≫·≪太一經≫·≪玉樞經≫·≪眞武經≫·≪龍王經≫중에서 3가지를 골라 해석하도록 했다고 한다.729)≪經國大典≫권 3, 禮典 取才.

 소격서에는 三淸殿·太一殿·十一曜殿·直宿殿 등의 건물이 있어,730) 李能和,≪朝鮮道敎史≫(李鍾殷 譯, 普成文化社, 1977), 148쪽. 여러 신들을 모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성종대의 인물인 成俔의≪慵齋叢話≫에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즉 태일전에서는 七星과 여러 별을 제사했는데, 그 像은 모두 머리를 풀어해친 여자의 모양이었고, 삼청전에서는 玉皇上帝·太上老君·普化天尊·梓潼帝君 등 10여 위를 제사지냈는데 모두 남자의 상이었다. 그리고 이 밖에 내외이 여러 단에는 四海龍王·神將·冥府十王·水府의 모든 신들을 모셨는데, 위패에 이름을 쓴 것이 무려 수백이었다고 한다.731) 成 俔,≪慵齋叢話≫권 2. 이 중 옥황상제는 도교의 최고신, 태상로군은 老子, 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은 玉淸經에 거주하는 雷神으로 인류 및 만물의 생사여탈권을 가졌으며, 재동제군은 도교에서 문장과 학문의 신으로 받드는 文昌帝君의 다른 이름이다.732) 窪德忠,≪道敎諸神≫(簫坤華 譯, 四川人民出版社, 1986) 참조. 따라서 소격서에서는 각종 도교신을 화상 또는 위패의 형태로 모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들은 三檀으로 나누어 모셔졌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상단에서 노자를, 중단에서 星辰을, 하단에서는 閻羅를 제사했다고 하고,733)≪中宗實錄≫권 13, 중종 6년 5월 병인의 朝講에서 知事 金應箕의 말. 또는 상단에 옥황상제, 중단에 노자, 하단에 염라왕을 모셨다고도 한다.734)≪明宗實錄≫권 5, 명종 2년 5월 병사의 夕講에서 特進官 崔演의 말. 그렇다면 전자에서는 노자가, 후자에서는 옥황상제가 최고신이 되는데, 이 중에서는 후자가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東文選≫권 115에는 재초 때 사용하는 축문인 靑詞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조선 초기의 것이 10여 종인데, 이들에서 기원의 대상이 되는 최고신을 上帝라 했기 때문이다.735) 金勝惠,<東文選 醮禮靑詞에 대한 宗敎學的 考察>(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道敎와 韓國思想≫, 汎洋社出版部, 1987), 114∼115쪽에서는≪동문선≫에 수록된 초례청사를 분석하여, 초례에서 마지막 기원의 대상이 되는 최고신은 상제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를 최고신인 것처럼 기술한 것은 소격서의 이단적 성격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736) 李鍾殷, 앞의 글. 99쪽. 따라서 소격서에서 신앙되는 신들은 옥황상제를 최고로 한 서열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소격서에서는 이들 여러 신에 대해 실로 다양한 종류의 재초가 거행되었으니, 이들은 재초의 대상이나 기원 목적에 따라 명칭을 달리했다. 즉 太一醮·北斗醮·太陽獨醮·火星獨醮·金星獨醮·六丁神醮·三元醮·三界醮·祈雨醮·祈晴醮·禱病醮·鎭兵醮·開福神醮(왕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재초)·捲草禮(왕자 탄생일에 災禍가 없는 대신으로 하여금 3일간 소격전에서 올리게 하는 재초)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재초는 국왕과 왕실의 장수, 평안 및 治病,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나 천재지변(星變·우박·가뭄·홍수·산사태)의 祈攘을 위해 설행되었는데, 그 중에서 기우초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따라서 재초는 왕실 내지 국가 차원의 의례로서 國泰安民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재초는 원칙적으로 왕의 이름으로 거행되었으나, 실제로는 대신을 파견하여 소격서 관원과 함께 거행하게 했다. 이 때 왕은 문신으로 하여금 왕을 대신하여 축문을 짓게 했는데,737) 원래는 藝文官 參外官이 지었으나, 세종 25년 이후는 知製敎로 하여금 청사를 짓게 했다(≪世宗實錄≫권 99, 세종 25년 7월 경오). 이 축문은 靑藤紙라는 푸른 종이에 붉은 글씨로 축원의 내용을 기록했기 때문에 靑詞라 했다.

 재초의 절차에 대해서는 성현의≪용재총화≫권 2에 언급이 보이는데, 이에 의하면 獻官과 소격서의 관원은 제사 3일 전부터 모두 흰 옷에 검은 두건을 쓰고 齋戒했다. 또 제사 때에는 관을 쓰고 笏을 들고 예복을 입었으며, 여러 가지 과일·떡·차·과자·술 등을 차려놓고 焚香百拜했다. 그리고 道流는 머리에 逍遙冠을 쓰고 몸에는 얼룩얼룩한 검은 옷을 입었는데, 경쇠를 24번 울리고 난 뒤에 두 사람이 道經을 읽고 청사를 태웠다고 한다.

 재초는 소격서 이외에 지방의 태일전과 강화도 摩利山 塹城(星)壇에서도 거행되었다. 지방의 태일전이란 太一星이 하늘에 있는 宮을 45년마다 옮겨 다닌다고 여겨 태일성이 머무는 지역에 건립한 것인데, 세종 16년(1434)에는 경상도 義城縣 氷山에 두어 정월 보름날 중앙에서 향을 내려보내 제사했고, 성종 10년(1479) 이후 충청도 泰安郡 白華山으로 옮겼다.738)≪成宗實錄≫권 77, 성종 8년 윤 2월 병진.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39, 道敎仙書道經辨證說.

 단군이 祭天하던 곳으로 전해지는 참성단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재초가 행해졌는데, 조선시대에는 춘추 정기적으로,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行香使739) 처음에는 代言이 파견되었으나, 세종 12년(1430) 이후로 그 격을 높여 2품 이상의 관리를 파견했다(≪世宗實錄地理志≫권 148, 京畿 江華都護府).와 소격서의 관원을 파견하여 옥황상제·노자·28宿를 비롯한 星神·염라왕 등의 지방을 상하 2단으로 벌여놓고 재초를 올렸다.740) 徐永大,<崔錫恒의 塹城壇改築記에 대하여>(≪博物館紀要≫1, 仁荷大 博物館, 1995) 참조.

 이렇듯 소격서는 각종의 재초를 주관하는 관청으로는 유일한 것이었지만, 사림파가 등장하고 유교정치가 진전되는 성종대 무렵부터 이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것은 성종 자신이 발의한 것이었는데, 이 때는 혁파까지 가지는 않았고 제사상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741)≪成宗實錄≫권 162, 성종 15년 정월 갑진.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에는 소격서를 종실 安陽君의 집으로 옮기는 조치가 취해졌는데,742)≪燕山君日記≫권 54, 연산군 10년 7월 신해. 이것은 사실상 국가기관으로서의 소격서가 혁파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중중은 즉위 다음 달인 원년(1506) 10월에 원래의 소격서를 급히 수리하게 하여 관원을 새로 임명함으로써, 안양군의 사가로 옮겨졌던 소격서를 부활시켰다.743)≪中宗實錄≫권 1, 중종 원년 10월 무신. 이후 소격서의 혁파를 둘러싸고 중종과 신하들간의 논쟁이 거듭되었는데, 중종 6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차례 있었고, 11년 10월부터 12년 2월까지 또 한 차례 있었다. 이 때 신하들이 주장한 혁파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소격서가 이단인 도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제천함은 유교적 명분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종은 조종조부터 있던 유래가 오래된 것이므로 쉽게 없앨 수는 없는 것이라 하여, 소격서의 혁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왕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으므로 혁파 주장은 수그러들고 말았지만, 중종 13년 8월 초하루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趙光祖의 소격서 폐지 상소를 계기로744)≪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무진. 이에 대한 논의가 재연되었다. 그런데 이 때는 신하들의 태도도 강경하여 혁파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臺諫들이 일제히 사퇴하여 곧 시행될 과거에 지장을 주었으며, 조광조 등도 대궐에서 물러가지 않고 밤을 세워 혁파를 주청하였다. 이에 중종도 결국 굴복하여, 마침내 9월 3일에는 소격서 혁파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 때 충청도 태안의 태일전을 철거한다는 결정도 함께 내렸다.745)≪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9월 경자.

 그러나 중종은 기묘사화로 말미암아 조광조 등이 죽임을 당한 후, 소격서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우선 소격서 복립에 대한 대신들의 의향을 타진하다가,746)≪中宗實錄≫권 40, 중종 15년 정월 경술. 마침내 17년 병환 중의 慈殿, 즉 어머니께서 소격서의 복설을 희망한다는 것을 구실삼아 소격서를 다시 세웠다.747)≪中宗實錄≫권 46, 중종 17년 12월 병술. 물론 이 때에도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었으나, 중종은 자전에 대한 효성을 내세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로써 소격서는 혁파된 지 3년 만에 복설되었는데, 그렇다면 중종은 소격서 혁파에 왜 그렇게 반대했을까가 궁금해진다. 물론 중종은 혁파를 반대하는 이유로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오래되었기 때문에, 또 소격서를 없애지 않았던 조상들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중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소격서를 복설할 정도로 소격서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음을 생각할 때, 혁파 반대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격서를 존속시킴으로써 왕권강화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748) 李鍾殷, 앞의 글, 111쪽. 즉 소격서의 재초를 통해 상제와 직접 연결됨으로써, 왕권이 天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것이다.

 소격서는 임진왜란 후 없어졌고, 이후 소격서를 복립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749)≪仁祖實錄≫권 23, 인조 8년 8월 기유.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과의적 도교의 전통은 소격서의 폐지와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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