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3. 도교
  • 2) 수련적 도교의 발전

2) 수련적 도교의 발전

 조선 초기 도교에는 齋醮라는 주술적 의례를 통하여 消災度厄하려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와는 달리 엄격한 자기 수련을 통해 元氣를 질러 登仙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수련적 도교, 즉 內丹學이란 측면도 있었다.

 광해군 2년(1610)에 韓無畏가 지었다는≪海東傳道錄≫은 이러한 수련적 계보를 제시하고 있는데,750) 金侖壽,<東國傳道秘記와 海東傳道錄>(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韓國道敎의 現代的 照明≫), 亞細亞文化社, 1992)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道史는 인조 21년(1643)에 저술된 金諿의≪東國傳道秘記≫이며,≪海東傳道錄≫은 이것과 내용은 같지만, 영조 무렵에 만들어진 위서라고 한다. 그러나≪해동전도록≫이 위서라 하더라도 도맥의 서술에는≪동국전도비기≫와 차이가 없으므로, 자료로 이용한다. 이에 의하면 한국의 道脈은 신라말 渡唐遊學生인 崔承祐·金可紀, 승려 慈惠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당 開元년간(713∼741)에 終南山 廣法寺로 天師 申元之를 찾아갔다가 거기서 鍾離權을 만나 도법을 전수받고 내단을 수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우·김가기·자혜의 생존 시기가 다르므로,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종리권은 중국 金代에 성립된 全眞敎에서 七代祖師로 받드는 전설적인 도사이며, 종리권에게서 한국의 도맥이 시작된다는 기록은 許筠의<南宮先生傳>에도 보이고 있다.751) 許 筠,≪惺所覆瓿藁≫권 7, 文部 4. 따라서 이러한 기록을 통해 한국의 수련적 도교는 중국의 전진교를 계승했다는 인식이 조선시대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752) 金洛必,<海東傳道錄에 나타난 道敎思想>(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 앞의 책, 1987), 129쪽.

 또≪해동전도록≫은 자혜 등에서 시작된 한국의 도맥이 權淸과 원나라 사람 偰賢을 거쳐 金時習(1435∼1493)에게로 이어졌고, 김시습이 洪裕孫에게「天遁劍法鍊磨眞訣」을, 鄭希亮(良)에게는「玉函記 內丹要法」을, 尹君平에게는「參同契龍虎秘旨」를 전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3인에게서 많은 수련도교자들이 배출되었다고 했다. 이를 알기 쉽게 정리하면<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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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海東傳道錄>에 보이는 한국의 道脈
<표 1><海東傳道錄>에 보이는 한국의 道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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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계보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김시습에 비해 근 100년 뒤의 인물인 남궁두753) 許 筠,≪惺所覆瓿藁≫군 7, 文部 4에 수록된<남궁선생전>에 의하면, 명종 10년(1555)에 司馬試에 합격했는데, 그 때 나이가 30세였다고 한다.를 김시습보다 한 세대 앞선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또 윤군평은 김시습으로부터 도맥을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異人으로부터≪黃庭經≫을 전수받아 수련법을 익혔다는 설도 있다.754) 李睟光,≪芝峯類說≫下 권 18, 外道部 仙道. 그렇지만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단학인들 사이에서는 김시습이 수련적 도교의 중흥조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김시습은 유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유교를 공부했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분강개하여 불교에 투신하기도 했지만, 도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755) 김시습의 도교 이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裵宗鎬,<金時習의 道敎觀>(≪東洋學≫15, 檀國大 東洋學硏究所, 1985).
梁銀容,<淸寒子 金時習의 丹學修練과 道家思想>(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 앞의 책, 1988).
그는 老莊思想과 주술적 도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도교의 양생술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체질이 병약했던 것도 작용했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을 그는 승려 생활을 하는 동안 西菴이라는 암자에서 어떤 노인, 또는 關西의 한 백발노인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한다.756)≪梅月堂集≫권 7, 醫藥, 學餌黃精 및 권 9, 遊關西錄, 老翁授我道德經一部. 이들 가운데≪해동전도록≫에 보이는 원나라 사람 설현과 동일인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시습은 이들로부터 배운 도교적 양생법을 실천에 옯겼으며, 또≪修眞≫·≪服氣≫·≪龍虎≫등 이 방면에 관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757) 이상의 저술은≪梅月堂集≫권 17, 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저술은 엄격한 자기 수련으로 몸 안에 음양조화를 이루어 장생불사하려는 자력적인 內丹에 관한 것으로, 내단의 원리와 단을 이루는 방법 등을 설명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김시습은 선약을 복용함으로써 불로장생을 이루려는 타력적 外丹의 방법도 병행했다.

 그렇지만 김시습은 도교의 양생술이 자기 한 몸만 보존하는 것일 뿐 세상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이라고 하여, 수련적 도교의 한계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습은 단학을 수련했다고 하여, 도술을 두리는 능력까지 있는 것으로 신비화되기도 했다.758) 尹春年,<梅月堂先生傳>(≪梅月堂集≫卷首).
崔三龍,<金時習思想의 道敎的 측면>(≪韓國文學과 道敎思想≫, 새문社, 1990), 144∼145쪽.

 이러한 김시습에 대해 홍유손은「從遊之士」였다고 하고759) 尹春年, 위의 책. 또 산수를 함께 방랑했다고 하므로760) 洪萬宗,≪海東異蹟≫, 洪裕孫. 홍유손이 김시습이 수련적 도교를 전수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김시습을 조선시대 도교의 중흥조라 한 것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겠다.

 ≪해동전도록≫에서 김시습이 도맥을 직접·간접으로 계승했다는 인물들은 신분적 한계가 있거나 불우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다. 홍유손은 향리가문 출신이었고,761) 南孝溫,≪師友名行錄≫. 윤군평은 무인 출신이었으며, 守庵 朴枝華762) 박지화에 대해서는 孫燦植,<守庵 朴枝華의 道家的 面貌>(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韓國 道敎思想의 理解≫, 亞細亞文化社, 1990) 참조.는 서얼 출신이었다. 그리고 신선술 연마법인≪龍虎訣≫을 저술한 北窓 鄭은763) 정렴에 대해서는 孫燦植,<北窓 鄭의 現實的 不和와 道家的 克服>(韓國道敎思想硏究會 編,≪道敎思想의 韓國的 展開≫, 亞細亞文化社, 1989) 참조. 아버지 鄭順朋이 관직을 삭탈당하는 바람에 宦路가 막혔고, 또 정순봉이 복직해서는 乙巳士禍를 일으킨 데 대해 괴로워했다. 또 鄭希良은764) 정희량에 대해서는≪國朝人物考≫권 44, 燕山朝罹禍人 鄭希良 참조. 사족 집안 출신으로 자신도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했으나, 戊午士禍 때 유배를 당했다. 따라서 이들이 수련적 도교에 기울게 된 것도 현실에서의 좌절을 도교적 은둔생활을 통해 극복하려 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동전도록≫에 전하는 수련적 도교의 계보에는 慈惠를 비롯하여 明法·明悟·大珠 등 승려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승려들 사이에서 수행의 방편으로 도교적 수련이 행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나아가 한국의 설화에서 승려가 도술을 부리는 것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수련적 도교, 즉 내단학은 불우한 지식인이나 승려층을 통하여 전승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한편 趙汝籍이 찬술한≪靑鶴集≫도 조선 전기 수련적 도교의 도인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조여적이 선조 21년(1588) 과거에 낙방하고, 스승인 片雲子 李思淵을 만나 60년간 따라다니면서 견문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그리고 책명을≪청학집≫이라 한 것은 조여적이 스승의 스승인 靑鶴上人 魏漢祚의 사적을 적는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청학상인 위한조의 제자로는 편운자(이사연)·金蟬子(李彦休)·彩霞子·翠窟子·鵝蘂子·桂葉子·花塢子·碧落子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산수를 유람하며 시문을 짓기도 하고 역사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논하기도 하면서, 세속과 초연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해동전도록≫에 나오는 도인들과 비교할 때 거의가 지방 출신이고, 사회적 신분도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중국 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만주족의 흥기도 예감하였다.≪청학집≫을 통하여 중앙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도교수련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徐永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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