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개요

 동아시아 문명에서 한국의 역사에 나타나는 과학과 기술은 수용과 창조, 변형과 조화의 전통으로 특징지어진다. 중국의 거대하고 화려한 과학문명은 언제나 우리 나라 전통과학의 커다란 도가니 속에서 용융되어 자기의 거푸집에 부어지곤 했다. 그것은 새 모델을 창조해 냈다. 한국의 자연에 어울리고 그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국인에게 알맞는 모델이었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중국의 그것보다 작고 섬세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美的 감각이 뛰어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과학과 기술은 자주적 성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세종 때에 전개된 과학과 기술은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서 集積된 한국과학을 결산하는 것이었다. 중국과학뿐만 아니라, 문명의 교류에서 얻어진 모든 지역의 과학문명을 하나로 용융시키는 도가니와도 같았다. 거기서 동아시아 과학문명 안에서의 새로운 모델이 부어만들어졌다. 세종 때의 선비 과학기술자들과, 관료 과학기술자들은 자기들의 거푸집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으로 과학문화를 전개하였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문화의 독자적인 전개는 분명히 새로운 발전이었다. 과학·기술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이렇게 수준높은 학문·문화·예술적 성과가 짧은 동안에 이루어진 적은 한국의 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조선식의 창조적인 과학·기술전통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15세기 전반기의 과학기술사에서 세종 때와 같은 유형의 발전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과학사에 있어서의 15세기는 이른바 중세가 끝나는 시기이며, 근대 과학의 여명이 움트려는 시기이다. 그러나 서방 라틴세계 문화의 빛은 아직도 희미하였고 동방 아랍세계의 찬란했던 빛은 차츰 희미해져서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거대한 과학기술의 전통은 宋·元시대 과학기술의 창조적 발전 이후 15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明의 과학은 혼돈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의 과학은 우리 나라의 과학사에서 가장 훌륭한 창조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특히 세종 때의 과학기술은 송·원시대의 과학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다. 천문·역법의 과학은 특히 그러했다. 아랍과학의 전통이 15세기의 조선학 안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의 과학에서 별로 배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世宗實錄≫을 비롯한 세종 때의 여러 문헌들에는 의도적이라고 생각되리만큼 원의 과학·문헌 등을 모델로 하거나 텍스트로 했음을 굳이 기록한 부분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특정한 분야나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테두리 안에서 바라볼 때, 세종 때의 과학은 원대의 과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원대의 과학은 널리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아랍과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가장 많이 받았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이 아랍과학의 꺼져가는 전통을 원대의 과학을 매체로 해서 동방의 작은 반도에서 새롭게 발전시켰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랍과학의 경우와 같이 외부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외국 학자들의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요인의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중국의 전통적 巨大科學의 그늘에서 그 나름의 창조적 발전을 여러 분야에서 이룩하였다. 이러한 창조성은 조선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특히 조선 초기에 있어서의 자주적 문화창조의 기운과 의욕적 노력은 새 왕조의 과학기술 발전에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태종 3년(1402)에 왕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癸未靑銅活字의 주조를 강행하였다. 계미자로 인쇄한 책들은 현존하는 몇 가지 고려 목판본들보다 좋은 印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인쇄의 능률에 있어서도 한 가지 책만을 인쇄할 때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뒤떨어진다. 그리고 소요되는 경비, 노동력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세종에 의하여 훌륭하게 계승됨으로써 조선식 활판 인쇄기술은 크게 발전하고 완성되었다. 이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조선식 청동활자 인쇄술은, 태종이 말한 것처럼 ‘天下의 서적을 모두 인쇄’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에서 사오는 책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태종의 신념이었다. 그것은 ‘百年之大計’를 성취하기 위한 巨視的 정책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그것을 강력히 추진하여 개량하고 완성시켰다. 15세기의 조선 금속활자본이 같은 시대의 어느 지역의 인본보다도 깨끗한 것은, 그 기술적 수준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에 있어서의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전은 중국에서는 거의 내버려졌던 기술이 우리 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노력에 의해서 과학과 문명에 크게 기여한 예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 민족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발전적 업적은 우리 나라 과학의 황금시대로 불리는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雨量計의 발명도 그 하나이다. 세종 23년(1441)에서 24년에 걸쳐서 測雨器와 水標라고 명명된 강우량의 측정기가 발명되어 강우량의 수량적 측정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우량계의 발명은 강우 시기가 7∼8월에 偏在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쓴 조선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우량계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은 중국에서도 행해진 듯하지만 그것은 한정된 지역과 시기에, 필요에 따라서 측정된 것으로 조선에서와 같이 전국적으로 수백 년간이나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측정기 제작의 발상도 완전히 조선의 독자적인 것이다.

 세종 때에는 또한 새로이 천문대도 설립되었다. 大簡儀臺라고 불린 景福宮의 천문대에는 簡儀·水運渾天儀와 渾象·圭表·正方案(方位指示表)·각종 해시계 등이 설치되고, 自擊漏라고 불리는 自動報時 물시계와 玉漏라고 불리는 天象時計 등의 장치가 부설되어 있었다. 7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이들 천문관측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세종은 수학자·천문학자·기술자를 명에 파견하여 중국의 시스템을 연구케 했다. 그리하여 받아들인 것은 원의 郭守敬의 시스템을 중심으로 하는 儀器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선식으로 개량되었다. 이 천문 관측소는 원의 觀星臺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이었다.

 경복궁 천문대의 완성과 천문의기의 제작으로 그 이후의 관측활동은 한층 더 정비되었다. 書雲觀의 관리에게 의무지어진 관측규정은, 그 과학성에 있어서, 현대 천문 기상대의 그것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17세기의 관측일지의 유물에 의하면 관측과 기록 및 보고가 규정대로 시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현상으로 여겨진 天變은 글에 의한 기록과 함께 스케치로도 나타냈는데, 예를 들면 현종 5년(1664) 10월 8일의 관측일지에 보이는 혜성의 관측기록과 정확한 스케치는 조선말에 그것을 발견한 일본인 천문학자 和田雄治에 의하여 ‘세계천문학사상 둘도 없는 보물’이라고 평가되었다. 또한 1664년에서 1669년에 걸쳐서 제작된 渾天時計는 중국의 전통적인 水運式 시계장치의 원리를 서양식 기계 시계장치에 응용하여, 그것들의 장점을 조화시킨 특징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군사기술에서도 조선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식 火砲와 龜船의 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포는 중국의 영향에 의하여 고려말부터 실용화되었는데, 세종 때에 이르러 중국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조선식으로 규격화되어 화포의 전반적 改鑄가 이루어졌다. 세종 때의 화포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 왕대에 나타난 火車는 동시에 다수의 로켓을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였다.

 조선 초기의 戰艦으로 유명한 구선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서 격심했던 倭寇, 즉 일본인 해적집단의 침입으로 속을 썩인 조선정부가 그 白兵戰術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며, 고려의 突擊戰艦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만들어 낸 조선 특유의 전함이다. 구선은 15세기초에 건조되었는데, 그것이 교묘한 전술에 의하여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한 것은 16세기말의 壬辰倭亂 때였다. 구선은 多砲裝 重裝甲의 沿海用 突擊戰船이다. 그것은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기동력을 발휘하였다.

 醫學 분야에서는 한국 醫藥學의 체계화와 동양의학의 집대성이 특히 주목된다. 고려말에서 시작된 한국산 의약에 의한 독자적 처방의 체계화는 조선에 이르러서 더욱 확대되었다.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에 걸쳐서≪鄕藥濟生集成方≫과≪鄕藥本草≫가 편찬되어, 한국산 의약에 관한 의학적·本草學的 지식이 정리되었다. 이것들을 하나로 요약하고 의약학적 연구를 더해서 체계를 세운 것이 세종 15년(1433)에 완성된≪鄕藥集成方≫이다. 여기에는 703종의 한국산 의약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의·약학 분야에서 중국 의존에서의 탈피로서 획기적인 일보 전진이었다. 이들 연구와 병행하여 이루어진 것이≪醫方類聚≫의 편찬이다. 세조 원년(1455)에 완성된 이 의학대백과사전은 우리 나라와 중국의 醫書 153종을 집대성한 것으로 15세기 최대 의서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으나,≪의방유취≫에는 조선의 개성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다. 조선의학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1세기 반 후에 쓰여진 또하나의 의학대백과사전인≪東醫寶鑑≫에서였다. 선조 29년(1596)에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된 이 의서는 저자인 許浚의 의학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점에서≪의방유취≫와 다르다.≪동의보감≫과≪의방유취≫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간행되어 그 나라들의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지금도≪동의보감≫이 널리 읽히고, 중국의 현대 의학 속에 계속 살아남아 있다.

 농업기술도 세종 때에 큰 발전을 보았다. 그 때까지의 한국 농업기술은 주로 중국 농서를 텍스트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농서와 실제의 農法,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사이에 차질을 가져 왔다. 그 차질을 해소하는 길은, 조선의 농법을 더욱 앞선 기술에 의해서 개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씌어진 것이 세종 11년에 완성된≪農事直說≫이다. 그것은 각 지방의 농법을 널리 조사하여 그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발전된 기술을 요약한 것이다. 그 후 이 농서는 조선 농업의 기본 텍스트로 중국 농서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문학은 고려의 것을 계승하며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 훈민정음, 즉 한글의 창제는 단순한 문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 문자생활에 일대 혁명을 예고했다.

 한문학은 性理學을 이념적 바탕으로 삼고 있던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들은 고려시대의 한문학을 지적 토대로 하여 새 왕조의 이념에 알맞은 한문학을 추구해 갔다. 고려시대 한문학이 유·불·도 3교의 기능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이들의 통합된 논리를 추구했다면, 조선 초기의 그것은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을 배척하고 성리학 유일의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鄭道傳이 이러한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불교사상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문학은 ‘載道之器’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文以載道論’은 이후 權近의≪入學圖說≫등에 의해 확고한 이론적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조선 초기 한문학의 주류로 떠올랐다. 또한 성종 때 徐居正 등은 중국의≪文選≫에 대응하여≪東文選≫을 발간함으로써 조선 초기 詞章派 문학의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한문학을 주도한 것은 士林派이며, 이들에 의해 한문학이 꽃핀 것은 이른바 ‘穆陵盛世’라 불리는 선조 때였다. 사림파 한문학은 性情美學을 추구했으며, 이는 곧 품격론으로 이어졌다. 李滉과 李珥는 이러한 사림파 한문학을 주도하였으며, 이황은 ‘溫柔敦厚’를, 이이는 ‘冲澹蕭散’을 문학의 지표로 삼았다. 이 때의 한문학은 성리학의 철학적 체계가 한층 완비되어 가는 상황과 짝하여 문학적 깊이를 더해 갔다.

 조선 초기의 문학은 訓民正音의 창제와 더불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았으며, 그것은 곧 본격적으로 국문학의 등장을 알리는 계기였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사용되면서 문학사에서 큰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국문학의 전개는 최초의 한글 작품인≪龍飛御天歌≫와≪月印千江之曲≫의 창작으로 본격화되었다.≪용비어천가≫는 125장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건국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한 대서사시이다.≪월인천강지곡≫은 釋迦의 全 생애를 소설적 구조로 서사화한 작품이다. 불교의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하여 불교서사시의 전형적 구조를 지닌 것이다.

 국문 시가문학은 樂章·景幾體歌·歌辭·時調로 이루어졌다. 악장·경기체가·가사는 敎述詩이며, 노래로 부르는 시이고 음악이면서 문학이다. 이들은 악장에서 경기체가로, 경기체가에서 가사로 올수록 음악으로서의 구실은 줄어들고 문학으로서의 기능이 확대되었다. 우리말 노래인 악장은 조선왕조의 창업과 더불어 등장했는데, 나라에서 거행하는 공식적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이다. 그러나 악장은 목적하는 바나 나타내는 내용은 아주 뚜렷하지만, 독자적 형식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악장과 경기체가는 한시에서 국문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 문학을 주도했던 악장·경기체가 등의 영역이 줄어들면서 시조와 가사가 국문학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시조는 공적인 기능은 없으며 개인적인 노래로, 서정적 요소가 풍부한 순수문학의 정수로 평가될 만하다. 시조는 사림파들에 의해 즐겨 지어졌으며, 특히 영남과 호남에서 성행하였다. 요컨대 시조는 서울에서 벼슬하는 생활에서보다 향리로 물러나 자연을 찾고 심성을 닦고자 할 때 스승과 제자, 동학과 벗들이 교류하는 데 더욱 긴요했다. 영남지방에서는 李賢輔가 터를 닦은 이래 이황이 그 뒤를 이었다. 이현보의<聾巖歌>, 이황의<陶山十二曲>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이이 또한 이황의<도산십이곡>못지않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특히 이황과 이이의 작품들은, 그들이 한문학뿐만 아니라 국문학에서도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편 宋純이 호남가단을 마련한 이래 鄭澈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으며, 이후 林悌에게로 계승되었다. 반면에 영남가단은 이황 이후에 움추려들었다. 시조는 사대부문학을 기초로 하였지만, 시조의 작자층은 더욱 확대되어 갔다. 요컨대 기생들은 시조를 잘 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짓기도 하였다. 송도의 유명한 기생 黃眞伊는 시조를 통해서 뛰어난 개성과 창조력을 발휘하였으며, 전라도 부안 기생 李桂娘은 아리땁고 애절한 마음씨를 시조로 나타내었다.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은 첫 작품인 丁克仁의<賞春曲>이래, 曺偉의<萬憤歌>, 송순의<俛仰亭歌>등에서 더욱 널리 퍼졌다. 이 가사문학은 정철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정철의 가사는<星山別曲>·<關東別曲>·<思美人曲>·<續美人曲>등 4편으로, 사대부 가사문학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었다.

 조선 초기의 문자생활은 한자로 행해졌다. 나라의 공적인 기록이나 문서, 즉 역대의 실록이나 각종 법령, 關文이나 牒呈 등은 모두 한자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 가운데 실무와 관련된 법령이나 공문, 외교문서 등은 한자와 함께 이두〔吏讀〕가 쓰였다. 이처럼 이두를 포함하여 한자로 행하는 문자생활은 공적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자들의 문집은 한문으로 이루어졌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재산매매나 증여의 文記, 和會文記 등은 이두로 작성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생활은 일반백성들의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세종 25년(1443)에 훈민정음, 곧 한글이 창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한자에 의한 문자생활을 대신하지는 못하였다. 공적인 문자생활은 여전히 한자로만 행해졌다. 공적이 아닌 문자생활에 국한하여 한글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자나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서거나 백성의 교화나 종교의 홍보를 위한 문헌의 간행에, 아녀자들의 주고받는 편지에 한글이 사용되었다.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한자와 한글에 의한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이중구조는 조선시대 전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한글은 공적인 문자생활에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창제 이후 꾸준히 보급되어 사용의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조선 초기에는 건국과 함께 새 문화창조의 기운으로 음악·미술 등 예술 분야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조선 초기 음악은 禮樂사상에 의한 雅樂부흥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세종 때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조선 초기의 음악문화를 특징짓는 아악부흥은 새 왕조가 성리학의 지배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악사상을 중요시한 결과로 이루어졌다. 아악부흥은 중국문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래의 음악문화를 자주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아악부흥의 과정에서 아악은 왕립음악기관의 左坊에 소속되었고, 고려 때 좌방에 소속되었던 唐樂은 右坊의 鄕樂과 함께 통합되었다. 조선 초기를 아악부흥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세종∼성종 때까지의 음악적 업적은≪樂學軌範≫에 정리되었다. 이는 고려의 향악·당악·아악·고취악 등을 전승한 바탕 위에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제함으로서 음악문화를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결과이다. 이 때에는 아악부흥과 함께 井間譜를 위시하여 五音樂譜와 合字譜 등의 새 기보법이 창안되었다. 새 기보법들은 당시의 향악·당악·아악·고취악 등과 같은 음악의 실상을 후대에 남겨주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정간보는 有量樂譜의 일종으로, 그 기보법의 창안은 동양음악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때에는 이 밖에도 왕립음악기관의 정비, 새 율관의 제작과 악기제조,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의 창제, 새 향악곡의 창제, 악보편찬 및 악서편찬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회화는 고려시대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또 중국의 화풍을 수용하여 다양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조선 중기는 물론 일본 室町시대의 수묵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 회화사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때에는 山水畵를 비롯하여 人物畵·翎毛畵·花鳥畵·草蟲畵 등 다방면의 회화가 발전하였다. 이의 제작에는 王公·士大夫 출신의 화가들과 화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승려화가들에 의한 불교회화의 발전도 주목할 만하였다. 한편 국초부터 圖畵院(圖畵署)이 설치되는 등 繪事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이 세워져 국가의 회화수급에 적절히 대처하고 이를 중심으로 직업화가인 화원들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회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여러 가지 화풍들이 수용되었고 자리를 잡았다. 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영향력이 컸던 것은 安堅의 화풍이었다. 안견은 그 이전의 전통을 폭넓게 섭렵하고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참조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북송의 郭熙派 화풍과 남송의 馬夏派 화풍을 참고하였다. 안견은 花卉·梅竹·蘆雁·樓閣·駿馬·儀丈圖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가장 특장 분야는 산수화였다. 특히<夢遊桃源圖>는 안견의 대표작으로, 전체적인 구도와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세부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탁월한 창의성과 지혜, 고도로 숙달되고 세련된 표현력과 묘사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 등의 시와 글씨가 어우러져 이른바 ‘詩·書·畵’ 三絶의 경지를 이루고 있어 일종의 종합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서예는 원의 새로운 서풍을 받아들인 고려말의 전통을 이으면서 발전하여 갔다. 고려말에 유입된 원나라 趙孟頫의 松雪體가 널리 확산되어 조선 제일의 서체로 자리잡았으며, 우리 나라 전래의 서풍에 큰 영향을 끼쳤던 王羲之體의 전통이 조선 초기에도 변함없이 존숭되어 서예의 기반을 이루었다. 이 밖에 고려말 서풍이 조선초로 이어져 金石과 寫經에 그 영향을 다분히 나타내었다. 아울러 훈민정음 반포 초기의 한글서체는 점차 쓰기에 편리한 筆寫體로 변화하였다.

 도자기 공예기술에서 高麗靑磁는 조선에 이르러 특징있는 粉靑沙器를 거쳐 白磁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자기와는 형식과 성질이 다른 조선백자로 변모한 것이다. 분청사기와 백자는 각기 다른 특성과 外形을 지니고 있으나, 분청사기는 백토 扮裝으로, 백자는 백토로 이루어지므로 표면이 백색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분청사기는 태토가 청자와 같으며 유약은 색이 청자보다 훨씬 엷고 투명한 백색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純白磁는 순도높은 백토로 빚어 조선 특유의 온화한 흰색을 내는 데 성공한 도자기로 꼽힌다. 청화백자는 세종 때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입되어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사기인데, 그 기형과 청화문양의 주제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조선백자는 기술적으로는 세종 중기부터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중국의 것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되었다.

<全相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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