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3) 유학사상을 통해 본 자연관-유교정치와 자연
  • (1) 일식과 태양 관련의 자연현상

(1) 일식과 태양 관련의 자연현상

 하늘에 두 태양은 있을 수 없다(天無二日)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을 더 밀어 부쳐 하늘에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태양은 본래의 밝음을 어둡게 하는 일체의 자연현상을 더욱 중시하는 태도로 발전한 것은 임금 중심의 정치사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태양은 제 빛을 마음껏 밝게 비치며 휘황찬란해야 마땅하다. 이는 마치 임금이 그의 위광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밝게 정치를 해 가는 것과 같았다. 만약 태양이 어떤 이유로 그 본래의 밝기를 잃는다면 그것은 임금이 또한 그럴 것을 예고하거나, 이미 임금이 그런 상태인 것을 경고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생각은 우선 일식에 대한 해석에서 뚜렷하다. 조선 초기부터 이미 최대의 사상가로 꼽히기 시작한 宋의 朱熹(朱子)는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일식이란 규칙적이어서 미리 수학적 계산으로 예측까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임금이 정치를 잘하면 일어나려던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046) 朱熹,≪朱子大典≫권 14.

 실제로 주자의 이 말을 인용해 가면서 일식에 대한 유교정치적 해석을 한 사실은 인조 4년(1626) 7월 초하루의 일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일식을 이틀 앞두고 홍문관은 주자를 인용하면서 정치가 잘 되면 일어나려던 일식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들고 나왔다. 물론 일식은 미리 계산하여 그 일어날 시각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워 음이 성하고 양이 쇠약해지면 일어나려던 일식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만일 임금이 정치만 잘 하면 일어날 일식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금이 덕을 쌓고, 훌륭한 인재를 쓰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면 능히 양은 성해지고 음은 밀려나 예정된 일식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047)≪仁祖實錄≫권 13, 인조 4년 6월 기사·경오 및 7월 신미.

 주자를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식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세종 6년(1424)의 경연 자리에서 세종은≪詩經≫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일식·월식에는 규칙성이 있지만 임금이 덕을 닦아 나라를 다스리면 당연히 일어날 일식·월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 세종은 이 말이 진정 옳다고 논평하였다. 비슷한 상황은 연산군 때의 경연에서도 벌어졌다. 연산군 9년(1503) 2월 경연에서 成俔은 일식이 규칙적이어서 미리 계산할 수도 있지만, 임금이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면 일어날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048) 박성래, 앞의 글(1992), 234∼235쪽.

 이처럼 일식은 천문학적으로는 예정된 것이면서도 가장 열심히 관측하고 성실하게 대응한 재이였다. 고대부터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일식이 있을 때면 조선 초기에도 救食儀가 아주 열심히 행해졌다.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북을 치며 일식이 그치기를 기다리는 의식이 엄숙하게 행해진 것이다. 중종 2년(1507)에는 설날에 일식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겠다며 좌의정과 우의정이 사의를 표했다. 이에 대해 임금은 이는 자신의 부덕 때문이지 신하들의 잘못이 아니라면서 거부했다.049)≪中宗實錄≫권 2, 중종 2년 정월 을해.

 다음은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 우리들에게 이런 현상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낮에 보이는 금성 즉 ‘太白晝見’은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권위를 저해하는 꽤 중요한 자연현상으로 여겨졌다. 앞의 통계에도 보이는 것처럼 태백주현은 아주 많이 나타난 이상현상임이 분명하다. 조선 초기 130년 동안에 1,231회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596회는 중종 전반기 19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중종 때에는 연평균 31회가 기록된 반면 세종 때에는 연평균 2회밖에 되지 않는다.050) 이 통계는 박성래, <한국과학사상사>(≪과학사상≫10, 1994), 239쪽 참조.

 그 원인을 간단히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현상 역시 태양의 밝음을 저해하는 현상으로 기록된 것이고, 따라서 임금의 총명을 어지럽히는 어떤 현상을 비판하는 의식이 퍼져 있을 때 이런 현상에 더 민감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가능한 일이다.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중종은 신하들에 휘둘려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고, 세종은 자기 일을 자기 주장대로 처리했다는 정도의 대체적 평가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의 반응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연산군 5년(1499)에 ‘태백주현’에 대해 金應箕는 그것이 전쟁이나, 외척의 발호, 또는 여자의 득세 등을 뜻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4년 뒤의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금성이 낮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인데, 그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연산군의 태도 때문이겠지만, 이 시기에 태백주현은 거의 매일 기록되어 있지만, 이렇다 할 당시의 반응은 발견할 수 없다. 중종 때에 특히 이 재이가 많이 기록되었음은 이미 앞에 지적한 바와 같다. 이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중종의 측근 공신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신진사류들의 비판 대상이 되어 임금의 총명을 가로막는 소인들로 여겨지던 시대적 상황에서 태백주현이 많이 기록되기에 이른 것으로도 보인다. 예를 들면 중종 4년 12월 대간이 올린 상소에 의하면, 태백주현은 천둥번개보다 심한 재변인데 소인배를 물리쳐야 이런 재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소인들이 정치에 관여해서 금성이 낮에 보인다는 뜻이다.051) 박성래, 위의 글, 241쪽.

 비슷한 정치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여겨진 재이의 하나는 햇무리(日暈)이다. 앞의 통계에서 햇무리의 기록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이 가운데 태종 2년(1402) 3월의 햇무리는 태종이 여인을 맞아들여 정사를 돌보지 않은 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성균관 樂正 權弘의 딸을 맞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자 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말렸지만, 결국 태종은 이 여성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선조 13년(1580) 2월에는 河原君이 역관의 딸로 예쁜 여자가 있다고 천거하여 임금이 그녀를 궁중에 들어오게 했다. 이 때부터 태양이 광채를 잃은 것이 여러 날이었다는 것이다.052)≪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3월 경인.
李珥,≪石潭語錄≫下, 선조 13년 2월.

 ≪선조실록≫에는 아예 선조 13년 정월, 2월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이가 전하는 역관의 딸에 대한 것도 그 때문에 해가 빛을 잃었다는 기록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선조실록≫이 부실하여≪선조수정실록≫을 냈는데, 거기에는 원래≪선조실록≫에는 아무것도 없던 그 해 정월, 2월 기록이 8가지가 추가로 기록되었다. 그 가운데 역관의 딸을 들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그 때 태양이 빛을 잃었다는 기록은 없다.053)≪宣祖修正實錄≫권 14, 선조 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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