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3) 유학사상을 통해 본 자연관-유교정치와 자연
  • (2) 연산군의 정치 천문학

(2) 연산군의 정치 천문학

 연산군은 자연현상이 재이로 여겨져 군주의 권력행사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점점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는 유교적 자연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태도였다. 조선 초기에 재이에 대한 임금과 지배층의 태도는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렇게 확립되어 가고 있는 재이관에 대해 슬그머니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연산군 2년(1496) 가을 임금은 이 재이관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대간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당을 세우려는 일과 공신에게 加資하려는 그의 계획이 대간의 반대벽에 걸려 있었다. 대간은 몇 달째 이에 반대하여 자리를 차고 나간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간은 공신에게 가자하고 폐비의 사당을 세우겠다는 임금의 주장이 재이를 일으킨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슬그머니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또 그는 후세의 의론까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투로 나오기도 했다.

 바로 이런 연산군의 주장에 대해 대간은 임금의 이런 태도야말로 王安石의 三不畏說과 같다면서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의 왕안석은 일찍이 ‘천변을 두려워할 것 없고, 조상의 전례를 본받을 것 없으며, 사람들의 비판에 귀기울일 것 없다’고 했는데 임금의 말이 바로 이와 똑같다고 대간이 들고 나선 것이다.054)≪燕山君日記≫권 18, 연산군 2년 10월 무인. 이듬해에는 다시 다른 재이를 놓고 신하들과 갈등하던 연산군은 재변이 일어나는 까닭은 대간이 오랫동안 일은 하지 않고 대궐 뜰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055)≪燕山君日記≫권 21, 연산군 3년 정월 갑자. 연산군의 재이에 대한 태도는 그의 재위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연산군 3년 6월 27일 밤 2경에 宣政殿의 기둥에 벼락이 떨어지자 재이론은 다시 한 번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튿날 임금은 반찬수를 줄이고 정전을 피해 熙政堂에 나가 신하들을 접견했다. “어제 벼락은 실로 짐의 부덕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어찌해야 좋을지 의견을 말하라”는 분부가 내렸다. 여러 사람들의 오랜 논란 끝에 任士洪에게 가자하려던 계획이 취소되었다.≪燕山君日記≫의 이 기사 끝에는 사관의 논평이 있는데, 임사홍은 처음에 천변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죄를 받더니 이제 천변 때문에 가자를 취소당하게 되니 하늘의 응보가 과연 두렵다고 써 있다.056)≪燕山君日記≫권 24, 연산군 3년 6월 무술.

 말하자면 연산군은 선정전에 벼락이 떨어지는 바람에 유교적 재이관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산군 4년에 지진이 일어나자 연산군은 그것을 신하들의 잘못 때문으로 돌리려 했고, 그 다음해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비슷하게 음이 성하고 양이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던 셈이다. 또 연산군은 일식은 임금의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도 말했다. 심지어 그의 집권 말기 갑자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 해의 가뭄도 임금의 잘못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또 연산군은 같은 해인 동왕 10년 7월말에 안에서 꽃을 한 송이 들고 나와 정승 등에게 보여주면서 “겨울에 꽃이 피는 것을 옛사람들은 재이라 지적했다. 전에 창경궁에서 실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대간 한 사람은 이를 재변이라 하여 임금의 행차를 그만두라고 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이 꽃을 보면 이 또한 재변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정승들은 “복숭아나 오얏 꽃이 겨울에 피는 것은 상리에 어긋나는 재이인 것이 틀림없으나, 이제 이 한 가지의 꽃이 우연히 비를 만나 피었다 하여 어찌 재이라 할 수 있으리요. 복숭아·오얏이 꽃을 핀다 해도 만개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057)≪燕山君日記≫권 54, 연산군 10년 7월 계축. 연산군은 적어도 그의 재위 10년 만에 재이에 관한 유교적 해석에 강력히 쐐기를 박아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연산군 11년 11월에 임금은 앞으로 아예 금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이나 유성에 대해서는 보고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연산군 12년 새해는 음침한 날들로 시작되었다. 정월 초여드레 날씨가 음울하자 연산군은 승지 姜渾에게 이런 경우를 재변이라 하느냐고 물었다. 임금의 뜻을 미리 짐작한 강혼은 1일부터 6일까지는 여섯 가지 가축을 주관하고, 7일은 사람을 주관하며, 8일은 곡식을 주관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정초에 날씨가 나쁘면 그 날이 주관하는 가축이나 곡식 등에 나쁘다는 뜻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강혼은 이것이 성스러운 경전에 써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에 대해≪연산군일기≫에는 당시 재변이 계속되어 임금이 재변 소리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강혼이 알아서 옛 책은 모두 믿을 것이 못된다고 응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058)≪燕山君日記≫권 61, 연산군 12년 정월 정유.

 연산군은 이어 그 해 2월에는 또 문신들이 역사책을 끼고 모여 논의하는 일을 일체 금한다고 발표했다. 역사책을 보면서 星變 등을 어떤 일 때문이라고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일이 옳지 않기 때문에 이를 금한다는 것이었다.059)≪燕山君日記≫권 61, 연산군 12년 2월 경오. 또 4월에는 눈이 내렸다는 보고를 했다 하여 觀象監 관계자를 조사하여 처벌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이 때에 눈이 내렸을 이치가 없다고 고집했는데, 이에 대해≪연산군일기≫에서는 당시 임금은 항상 태평세월을 자랑하느라 이런 재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인정하기 싫어했다고 적고 있다.060)≪燕山君日記≫권 62, 연산군 12년 4월 경신·신유.

 연산군의 재이에 대한 반발 의식은 연산군 12년 7월에 그 극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忠公道에서 지진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런 재이에 대해 보고를 올리지 말라고 이미 지시했거늘 어찌 승정원은 아직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또 여러 날 동안 혜성이 길게 나타나자 관상감이 이를 보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의정부와 6조 참판 이상을 불러 모았다. 이들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가 그런 것일 뿐 정치가 잘못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연산군은 이미 이런 재이에 대해 보고하지 말라는데 다시 보고하고 있으니 차라리 관상감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영의정 柳洵 등이 ‘임금님 말씀이 지당하시다’는 답을 얻어 연산군은 관상감을 없애고, 시계와 역산 등을 담당할 司曆署만을 남긴다고 발표했다. 조선시대에서 유일하게 천문관측을 주업으로 하는 관상감이 사라진 기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061)≪燕山君日記≫권 63, 연산군 12년 7월 정해·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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