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1. 전통적 자연관
  • 3) 유학사상을 통해 본 자연관-유교정치와 자연
  • (3) 중종대 암탉의 수탉 되기

(3) 중종대 암탉의 수탉 되기

 연산군대는 재이에 대한 지금 우리 기준으로 치면 합리적인 태도가 크게 자라고 있던 시기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유교적 자연관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던 때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런 시대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바로 끝났다. 중종은 그전의 유교적 재이관을 확고하게 자리잡게 해 주는 역사적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셈이기 때문이다.

 중종대의 재이관의 근본적 변화는 연산군 때 문제가 되었던 王安石의 재이관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종 6년(1511) 10월의 경연 자리에서 마침 왕안석이 ‘재이란 하늘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일 뿐이지 인간사의 잘잘못과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는 역사 대목에 이르자, 검토관 蘇世良이 이는 왕안석이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서 당시의 온갖 재변은 모두 왕안석 때문에 생겼다고 말했다. 이에 중종은 “왕안석의 말은 틀렸다. 사람들의 일이 아래에서 감하여 위에서 재변이 응하는 것이다”라면서 최근의 재변이 잦은 것을 걱정했다.062)≪中宗實錄≫권 14, 중종 6년 10월 기묘.

 이 시기의 아주 특이한 재이로는 암탉이 수탉으로 바뀐 경우를 들 수 있다. 한국 역사상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고려 때에 2회(932, 1277년), 조선초에는 세종 19년(1437)과 세종 22년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주 특이하게도 중종 때에는 자그마치 5회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은 중종 9년에 1회, 중종 10년에만 3회, 그리고 중종 14년에 1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암탉이 수탉으로 바뀐 것이 기록되기에 이른 까닭은 물론 당시 章敬王后가 출산 후 바로 죽고, 그 후임 왕비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은 후궁으로서 이미 아들을 낳은 박씨를 사랑하고 있었고, 신하들은 후궁 박씨가 왕비가 되는 일은 위험한 일로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중종이 박씨의 말을 너무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대중의 판단이 닭에 대한 변이를 많이 기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063) Park, Seong-Rae, 앞의 책(1977), 128∼130쪽.

 실제로 당시 신하들 사이에는 공개적으로 닭의 변괴는 임금이 여자의 말을 잘 들을 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 10년 정월의 닭의 변괴에 대해 홍문관에서는 상소를 올려 바로 그런 뜻의 중국 고전의 해석을 보고하고 있다.≪京房易≫에는 “임금이 여자 말을 들으면 닭의 변괴가 일어난다”고 써 있다는 것이었다.064)≪中宗實錄≫권 21, 중종 10년 정월 갑자·기사. 당시에 이런 닭에 관한 변괴가 많았다는 사실은 당시 활동했던 金安老의 글 등 다른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김안로는 갑술년(1514)에 닭에 관한 변괴가 일어났는데, 암닭이 수탉이 되거나 세 발 달린 병아리가 태어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 그 다음 김안로는 중국의≪경방역≫에 “임금이 여자 말을 들으면 닭의 변괴가 일어난다”는 대목을 인용한 다음 중국의 비슷한 기록들을 소개했다. 그래서 식자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었는데, 을해년(1515) 봄에 장경왕후가 죽었다고 이 기록은 전하고 있다.065) 金安老,≪龍泉談寂記≫.

 이보다는 반 세기 뒤의 일이지만 율곡 이이도 그의 일기 가운데 선조 9년(1576) 2월 善山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변괴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이나 논평은 가하지 않고 있다.066) 李珥,≪石潭語錄≫下, 선조 9년 2월.

 당시 대사간 李成童 등이 중종에게 올린 장문의 상소문 가운데 다음에 소개하는 앞 부분은 당시의 재이관을 잘 보여준다.

망망히 뻗어 있는 하늘과 아득하기 끝이 없는 땅 사이에는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입니다. 하오나 사람의 한 가지 선과 한 가지 악이란 울리고 메아리치듯 하늘과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무릇 하늘과 인간은 한 가지 氣로 되어 있고, 기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感하는 바 있으면 반드시 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더구나 임금의 자리는 하늘을 대신하여 하늘의 일을 하는 것이니 … 상서와 변이는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상서란 하늘의 기쁨이며, 변이란 하늘의 노함인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과 노함이란 하늘의 기쁨이나 노함이 아니라, 바로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노함은 임금님의 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님의 하시는 일이 至善이 아님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고, 기쁜 마음은 和氣를 낳아 이 화기가 위와 아래에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면 천지와 자연은 이 화기에 응하고, 천지의 화기는 음양을 순조롭게 하고, 비바람을 때맞게 해주며, 백 가지 사물이 제대로 되어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中宗實錄≫권 31, 중종 12년 12월 병신).

 이 상소문에 대해 이튿날 중종은 이 글이 아주 아름답다며 자기가 세 번을 읽었노라고 말하고 있다.067)≪中宗實錄≫권 31, 중종 12년 12월 정사.

 조선 전기 동안 재이로서의 자연현상은 언제나 왕과 신하들 사이의 언로의 구실을 담당해 왔다. 임금은 재이가 나타날 때면 언제나 이런 재이가 어떤 현실 정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지 신하들에게 求言하게 되어 있었고, 그런 ‘弭災求言’의 기회에 신하들은 아무 거침없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말할 수 있었다. 이이의 유명한 상소문 ‘萬言封事’ 역시 선조 7년 정월에 재이를 계기로 선조가 구언했을 때 올린 장문의 상소문이다. 재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었고,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왕과 신하는 서로의 정치적 견해를 교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이는 왕권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 일면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이 부분에 대해 일부 임금들은 마땅치 않게 여기고 이에 대해 반발하려 했다.

 이와 같은 자연현상이 가진 유교정치적 의미는 결국 조선시대를 통해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방법에 언제나 왕과 신하들 사이에 긴장관계를 조성하기 쉬웠다. 그리고 이런 긴장관계가 유교정치의 핵심에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 마련이었다. 이 긴장관계를 잘 이끌어 가는 임금은 자신의 실권을 알맞게 장악하여 정치를 풀어갈 수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임금은 고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조선 초기의 자연현상 기록은 그 유교정치적 역학관계를 반영하여 기록되고 또 지금까지 남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연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기 보다는 바로 이 유교정치의 역학관계를 함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연현상을 그대로 통계적으로 오늘의 과학적 자료로 이용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보이기도 한다.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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