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1) 서운관·관상감의 설치와 그 기능
  • (1) 관장업무와 직제

(1) 관장업무와 직제

 書雲觀은 천문 기상의 관측, 曆書의 제작, 풍수지리에 관한 일을 맡은 관서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개편된 제도에 따라 설치된 이름을 조선왕조에서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태조 원년(1392) 7월 28일에 정해진 관제에 의하면068)≪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정미., 서운관은 天文·災祥·曆日의 推擇 등의 일을 관장하고, 判事 2명, 正 2명, 副正 2명, 丞 2명, 兼丞 2명, 注簿 2명, 兼注簿 2명, 掌漏 4명, 視日 4명, 司曆 4명, 監侯 4명, 司辰 4명 등 정3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34명의 관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루는 물시계를 관장하는 관원이고, 시일은 日變을 관찰하거나 일·월식을 예보하는 직책을 가진 관원이며, 사력은 역서의 편찬을 맡은 관원이고, 감후는 기상을 관측하는 관원이며, 사신은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맡은 관원으로, 그들은 모두 전문기술직 관리들이었다.

 서운관 제도는, 태조 때에는 고려의 그것이 그대로 이어져 관장업무도 천문·재상·역일의 추택이라는 좁은 의미의 천문과 점성술의 테두리에 머무르는 표현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관원들도 전문직 학자와 기술관리로 거의 유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운관은 세종 때에 이르러 천문학과 천문관측의 중요성이 특히 강조되면서 그 구성원이 대폭 증원되었다. 세종 7년(1425)에는 천문의 비밀을 禁漏를 맡는 사람과 같이 공부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여 금루를 따로 떼어 내고, 정원을 천문 20명, 금루 40명으로 했다.069) 成周悳,≪書雲觀志≫권 1, 官職.

 금루란 궁중의 물시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물시계의 일을 관장하는 관원을 말한다. 그런데 세종 15년에 이르러 금루는 다시 천문에 합속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태조 때에 정해진 정원 34명에서 60명이 늘어났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거의 3배에 가까운 94명이 된 것이다.

 세조 12년(1466) 정월에 있었던 관제의 개정에서 서운관은 觀象監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리고 관장업무는 天文·地理·曆數·測候·刻漏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070)≪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정월 무오.

 이것은 큰 변화이다. 조선초의 천문학이 세종 때에 커다란 발전을 거치는 동안에 그 성격과 위치가 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커다란 진보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관상감이라는 명칭은 서운관보다 훨씬 근대적이며, 그 관장업무도 천문·역법과 시간의 측정, 천문·기상관측, 지리학과 지도제작의 영역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어, 과학으로서의 천문기상학을 관장하는 중앙 기구로서 손색없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관상감의 관원은 領事 1명(영의정이 겸임), 提調 2명, 正 1명, 副正 1명, 僉正 1명, 判官 2명, 主簿 2명, 天文學敎授 1명, 地理學敎授 1명, 直長 2명, 奉事 2명, 副奉事 3명, 天文學訓導 1명, 地理學訓導 1명, 命科學訓導 2명, 參奉 3명 그리고 天文學習讀官 10명, 禁漏 30명 등 모두 65명이었다.

 ≪書雲觀志≫에 의하면, 제조는 종2품 이상으로 겸임하게 되어 있었고, 당상관 중에서 왕이 계청하여 임명하는 자는 따로 정원을 정하지 않고 일을 맡기도록 했고, 正 즉 관상감정은 정3품 벼슬로 印信이 있는데 장기간 재임하는 관직에 있는 사람이 맡게 되어 있다고 했다. 첨정은 종4품으로 노비를 관장하고, 판관은 종5품으로 상벌을 관장하였고, 주부는 종6품으로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와 업무 보고서를 맡았고, 봉사는 종8품으로 星變의 기록과 보고서를 관장하였다. 정·첨정·판관·주부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으로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천문학 및 지리학 교수와 훈도는 전문지식을 갖춘 학자로 교육에 종사하고 또 기술직 전문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서운관과 관상감의 직제와 그 관장업무의 규정과 변천에 대해서는≪서운관지≫의 권 1, 관직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관상감은 그 공식 명칭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는 물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서운관이란 이름이 별칭 또는 애칭으로 오래도록 불리었다.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 成周悳이≪서운관지≫라는 책 이름으로 관상감의 역사를 저술한 것도 서운관이라는 명칭에 애착을 가졌던 조선 학자들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조 12년(1466)에 제정된 관상감의 관제는 그대로≪經國大典≫에 법제화되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상감은 天文·地理·曆數·測侯·刻漏의 일을 관장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관상감의 직제와 정원 품계를 규정했는데, 領事 1명(정1품), 제조 2명(정3품), 정 1명(정3품), 부정 1명(종3품), 첨정 1명(종4품), 판관 2명(종5품), 주부 2명·천문학교수 1명·지리학교수 1명(종6품), 直長 2명(종7품), 봉사 2명(종8품), 부봉사 3명, 천문·지리·命課學 훈도 4명(정9품), 그 밖에 천문습독관 16명, 금루 30명으로 구성한다고 되어 있다. 건국 반세기 남짓한 동안에 이룩한 획기적인 기틀이었다.

 관상감은 이렇게 조선왕조의 행정관청임과 동시에 천문학과 지리학의 연구기관이었고, 천문기상 관측소였으며, 또한 전문관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그 최고 책임자는 영의정이 겸임했고, 전문직 관리인 書雲正 또는 관상감정이 정3품, 副正이 종3품이었으니 상당한 대우를 받은 셈이다. 관상감의 상위직과 중위직 관리들은 관료학자로서 전문직이었고, 하위직 관리들은 전문기술직이었다.

 관상감은 연산군 12년(1506)에 司曆署로 격하되어 令 1명, 주부·直長·봉사 각 2명, 참봉 3명으로 크게 축소된 초라한 관서가 되었다. 천문관료학자들이 천문관측에 의한 天象의 변화를 보고하여 왕에게 경고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관상감은 역서를 편찬하여 펴내는 극히 사무적인 일만을 하는 제한된 기구로서의 사력서로 명맥을 잇게한 것이다. 그러나 중하위직 관리 10명이 배치된 사력서는 연산군이 죽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관상감으로 제모습을 찾고 본래의 직제에 따라 정상화되었다. 중종 11년(1516) 10월에 천문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은 관상감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운관 또는 관상감 직원의 선발과 임용방법은 薦擧·科擧·取才의 세 가지가 있었다. 먼저 천거에 의하여 천문, 지리, 命課의 생도를 선발하고, 그 생도가 일정한 교육훈련을 받은 다음 陰陽科에 응시하여 급제하면 그 성적에 따라서 해당하는 품직을 받게 되는데, 일정 기간의 試補 근무를 거치게 했다. 관상감의 관직은 비교적 임기가 짧아서 전임할 때는 취재시험을 거치게 했다. 과거의 성적에서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의 품계를 제수했는데, 원래 품계가 있는 사람은 모두 한 품계를 더해 주었다.

 남아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음양과 합격자의 명부를 보면 관상감 관원들의 가계가 전문가 집단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그런 경향이 있었음을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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