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2)<천상열차분야지도>
  • (2) 관측연대와 조선 천문도

(2) 관측연대와 조선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464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3세기초에 만들어진<三家星圖>의 283座 1,464星과 일치한다. 그런데 李純之의≪諸家曆象集≫에 의하면, 陣卓은<삼가성도>에 의해서 310년에 처음으로 천문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문도의 바탕이 된 고구려의 천문도는 4세기 후반까지는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고구려 천문도의 제작 시기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또는 6세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연구는 그 보다 훨씬 앞선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도설에 씌어 있는 춘추분점의 위치를 가지고 세차를 보정하여 3세기경으로 관측연대를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한 연구 결과는 도설에 나와 있는 춘추분점 이외에 28수 거성의 거극도, 28수 적도수도 등을 세차와 고유운동을 보전하여 그 관측 연대를 B.C. 1세기∼A.D. 1세기로 계산하기도 했다.074) 朴明順,<天象列次分野之圖에 대한 考察>(서울大 敎育學 碩士學位論文, 1992).

 이렇게 관측기사와 별자리의 위치에 의한 천문학적 관측연대의 추정이 1세기에서 3세기경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들을 종합하여 볼 때<천상열차분야지도>의 바탕이 된 고구려 천문도의 성립 시기는 아무래도 4세기 후반에서 6세기초 사이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태조 때의 천문학자들은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해서 28수의 거극도나 적도수도는 고구려 원본의 것을 그대로 옮겨 圖說에 썼으나, 별자리 그림의 별들의 위치는 석각할 때의 시대에 맞게 바로 잡아 다시 그렸다.≪증보문헌비고≫권 2, 상위고 2에, “을해년(태조 4;1395) 여름 6월에<新法中星記>가 완성되었는데, 그 24기의 저녁과 아침의 중성이 옛 천문도에 비하여 점차 차이가 났다. 그래서 星象은 옛 그림에 따르고, 중성은<신법중성기>에 따라 돌에 새겼다”라고 쓴 것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 후 조선 천문도의 주류를 이루는 표준 모델과도 같이 이어졌다. 세종 15년(1433)에 새로 석각되었다는 천문도에 대해서는≪世宗實錄≫에 기록된 바가 없고, 그 유물도 알려지고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천상열차분야지도>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 세종 19년 4월에 완성된 혼천시계에 가설된 渾象도 원주 10척 8촌 6푼의 천구의인데, 거기에는 적도 남북의 별과 성좌들이 배열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서 그것이<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탕으로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두 별자리 그림이<천상열차분야지도>를 참고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때 또 하나의 석각본이 있다. 가로 108.5cm, 세로 206.5cm 크기의 이 천문도는 태조 때의 석각본이 몇 차례의 전란 때문에 보존이 잘 안되어 마멸되고 흐려져서 다시 새긴 것이다. 이것은 ‘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제자를 별자리 그림의 위로 옮겨 새기고, 천문도 도설의 구성을 보다 균형있게 배치하였을 뿐, 그 내용은 태조 때의 것과 같다.≪증보문헌비고≫권 3, 상위고 3, 儀象 2에는, 인본을 가지고 다른 돌에 다시 새겼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인본은 태조 때의<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과는 다른 인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宣祖實錄≫에 의하면, 선조 4년(1571) 11월에 천문도 120폭을 만들어 문신 2품 이상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목판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최근에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국내에 전해지고 있는 탁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선조 때의 120폭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숙종 때의 석각본과 같다. 태조 때의<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선조 때에 목판에 옮겨 새기면서 숙종 때의 석각본과 같이 재구성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선조 4년에 목판본으로 인쇄된<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때에 돌에 새겨져 새로운<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 되었다.

 새 천문도 각석은 돌의 크기는 조금 작아졌지만, 별자리 그림의 크기나 도설과 論天 기사 등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가 거의 태조 때의 것과 같다. 이 천문도 각석은 창덕궁 밖의 관상감의 작은 각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영조 46년(1770)에 왕명에 의하여 새로 欽敬閣을 지어 경복궁에 있는 옛 천문도 각석을 옮겨 나란히 보존하였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17세기 숙종 때의<천상열차분야지도>, 즉 새 석각본의 탁본으로 된 판본은 10여 개가 알려져 있는데, 그것들은 이 무렵에 탁본으로 만든 것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8세기초에 서양 천문도가 조선에 도입되기까지 조선 천문도의 표준이었다. 인본과 탁본 이외에 별자리 그림과 도설 및 논천 기사를 필사하여 천문학 교육용으로 썼다. 천문도 필사본들은 매우 정밀하게 그리고 채색하여 아름답고 당당하게 만든 것들이 많다. 그러나 목판으로 인쇄한 것은 일본에서 발견된 것 이외의 판은 아직 알려지고 있지 않다. 탁본은 영조 때 한번만 만들었는지, 그 후에도 몇번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또<천상열차분야지도>를 인쇄하여 제작했다는 기록도 선조 때의 기사 이외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천상열차분야지도>는 일본에도 전해져 江戶시대의 일본 천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涉川春海가 1670년에 만든<天象列次圖>와 1677년에 만든<天文分野之圖>는<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바탕으로 해서 그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075) 宮島一彦,<同志社大學 所藏 元綠14年製天球儀の位置つけ>(≪同志社大學 理工學雜誌≫21-4, 1981), 291쪽. 이들 천문도는 그 당시 일본 천문도의 기본 교재가 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옛 전통적 우주관의 영향하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권근이 쓴 논천 기사는 그것을 잘 요약하고 있다. 권근은 그 글에서, 옛부터 하늘을 논한 것에 여섯 학파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 학설을 열거하였다. 그것은 첫째가 張衡의 渾天說이고, 둘째는 周髀의 법인 蓋天說, 셋째는 宣夜의 설인데 선야는 중도에서 끊어져 이어지지 않았고, 넷째는 虞喜의 安天이고, 다섯째는 姚信의 昕天이며, 여섯째는 虞聳의 穹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통적 우주관은 혼천설이라 하고 개천설도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들이 혼천설을 그들의 우주설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설들은≪禮記月令≫과≪舜典≫에 보이며, 가장 자세한 기사는≪晋書≫ 天文志에 後漢의 靈帝 때 학자 蔡邕에 의하여 기록되었다. 권근은 그의 논천설을 晋志 즉≪晋書≫천문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후한까지 남아있던 중국의 옛 우주설은 혼천설과 개천설이었고, 이 두 과학적 우주설이 중국의 천문사상을 대표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 아마도 신라와 고려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전통적 우주설로 고려말 조선초의 천문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혼천설은 조선 학자들의 우주관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천문사상의 바탕이 된 것이다.

 태조 때에 제작된<천상열차분야지도>의 각석은 지금 덕수궁의 궁중유물전시관에 보존되고 있다. 이것은 일제시대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창경궁의 노천에 놓아두어 심하게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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