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3) 천문대와 관측기기
  • (1) 간의대의 설치

(1) 간의대의 설치

 조선의 중앙 천문기상대로서의 서운관은 그 천체관측 시설로 簡儀臺를 가지고 있었다. 천문대로서의 경주의 신라 첨성대와 송도의 고려 첨성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세운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서운관이 경복궁과 북부 광화방의 두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간의대는 그 두 서운관에 세워졌다. 경복궁에 세워진 간의대는 규모도 크고 시설도 방대해서 조선왕조의 천문관측 활동의 중심으로 손색이 없는 당당한 것이었다. 세종 15년(1433)에 시작하여 다음해인 세종 16년에 준공된 이 大簡儀臺는≪세종실록≫의 자세한 기록에 의해서 그 규모와 시설의 전모가 확인된다.≪세종실록≫에는 “호조판서 安純에게 명하여 후원 경회루의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31자, 길이 47자, 너비 32자로 하고, 돌로 난간을 두르고 꼭대기에 간의를 설치하고 그 남쪽에 正方案을 부설했다”고 기술하고 있다.076)≪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이 대간의대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황폐된 후, 지금은 돌로 쌓은 관측대마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언제 해체되어 없어졌는지 기록이 없다.
그러니까 간의대는 높이가 약 6.3m, 길이가 약 9.1m, 너비가 약 6.6m로 상당히 규모가 큰 천문대였다.

 이 천문대의 축조양식은 이보다 앞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부 광화방 서운관 자리에 남아 있는 觀天臺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경복궁 대간의대는 높이가 2배 정도, 너비도 2배 정도 크고, 길이는 그보다 훨씬 커서 3배 이상이나 된다. 조선 중기에 창경궁에 축조한 또 하나의 관천대도 거의 같은 양식인 것으로 보아, 이 양식이 조선시대 천문대의 모양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경희궁에 있었던 관천대도 같은 양식이었을 것이다. 지금 현대건설 빌딩 앞에 보존되어 있는 관천대는 높이 3.5m, 넓이 2.4m×2.5m의 화강석대이다. 대 위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고, 대 옆에는 돌계단을 쌓았던 흔적이 있다. 이 천문대는 日影臺 즉 해시계대로 쓰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成周悳은≪서운관지≫에서, 흔히 첨성대라고 불러온 이 관천대는 소간의대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경복궁 대간의대의 축소판이고, 그래서 소간의대로서의 기능을 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간의가 조선시대의 기본 관측기기로 정착한 것이다.

 경복궁 대간의대는 연산군 11년(1505) 11월에 보루각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관측이 일시 중지되고 폐지되었다. 그 후 중종 때에 간의대는 다시 개축되었고, 명종 원년(1546) 6월에 또 중수하여 관측활동이 계속되었다. 선조 13년(1580) 5월에는 簡儀臺 修改都監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30∼40년 마다 보수를 한 것이다.

 간의대는 세종 때에 창설된 이후 여러 번 보수되면서 조선의 중앙 천문관측대로서 서운관에 의하여 그 기능이 활발히 발휘되었으며, 끊임없는 관측이 조직적으로 계속되었다. 간의대는 매우 훌륭한 규모를 갖춘 웅장한 천문대였다. 관측활동도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시설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을 뿐더러, 경회루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므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공개되기를 꺼려했던 국가의 기밀 시설이었다. 이렇게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15∼16세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천문대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임진왜란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어 다시 복구하지 못한 채 폐허가 되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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