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3) 천문대와 관측기기
  • (2) 간의대의 관측기기

(2) 간의대의 관측기기

 세종 14년(1432) 7월에 왕은 경연에서 曆象의 이치를 논하는 자리에서 鄭麟趾에게 천문을 관측하는 기기를 제작하여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鄭招와 함께 천문의 고전을 연구하여 관측기기를 만들어 관측에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북극출지도를 측정하기 위해서 먼저 간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정인지와 정초가 연구하여 정리한 천문고전자료를 바탕으로 李蕆과 蔣英實이 제작을 감독하여 먼저 나무로 만든 간의를 완성했다. 그들은 이 목간의를 써서 한양의 북극출지 38도 1/4을 측정하였다. 그것은≪元史≫천문지에 실려있는 측정치와 부합했다. 마침내 이천과 장영실은 청동으로 여러 儀象을 부어만드는 일에 착수하여 7년만인 세종 20년 봄에 15가지의 기기를 완성하였다.

 그것은 대간의와 소간의, 圭表, 渾天儀와 渾象, 仰釜日晷·日星定時儀·小定時儀·懸珠日晷·行漏·天平日晷·定南日晷·正方案, 그리고 自擊漏와 玉漏 등이다.077)≪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增補文獻備考≫권 2, 象緯考 2.
金墩이 지은≪簡儀臺記≫에는 간의대의 설립경위와 관측기기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있다. 그는 간의대 꼭대기에 간의를 설치하고 그 남쪽에 정방안을 부설했다고 기술하여 간의대가 대간의를 기본 관측기기로 한 천문대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김돈은 대의 서쪽에는 銅表 즉 규표를 세우고, 혼천의와 혼상을 부설했음을 기술하고, 이들 5가지 기기에 대해서는 古史에 상세하다고 설명하여 간의대가 이들 관측기기를 중심으로 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나 김돈은 간의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설명 밖에 하지 않았다. 먼저 나무로 원형을 만들어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확인한 다음 이 기기를 청동으로 부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간의는 비록 혼의보다 간단하지만 옮겨가며 쓰기에는 어려워서 소간의 2개를 만들었는데 장치가 비록 아주 간단하나 쓰기에는 간의와 같다”고 덧붙이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세종실록≫의 기사에서는 鄭招의 小簡儀銘을 인용해서 기술하면서 소간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증보문헌비고≫권 2, 상위고에서도 간의구조의 항에서, 대간의는≪元史≫에 실린 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다고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소간의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했다. 그 내용은 정초의 명문에 씌어 있는 것과 거의 같다. 소간의가 대간의를 축소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굳이 대간의를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원사≫의 천문지에 설명되어 있는 곽수경의 간의에 대해서는 이순지의≪제가역상집≫에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니까 그 당시의 궁정관료 천문학자들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고 판단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078) Needham, J. et al. The Hall of Heavenly Records, Cambridge, 1986, pp. 64∼70 참조.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기기의 제작에 대한 설명이 다른 기기에 비해서 너무도 간단하다. 그런데 정초의 글에는, “세종 16년(1434) 가을에 이천·정초·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작은 모양의 간의를 만들게 하였는데, 비록 옛 제도를 근거로 했으나 실은 새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전제하고 소간의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 문장은≪증보문헌비고≫를 비롯한 다른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용할 때 뺀 것이다. 그렇다면 대간의는 원대에 곽수경이 만든 것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고, 소간의는 그것을 축소해서 만든 것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 구조를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다.

 김돈이 설명한 소간의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精銅으로 밑받침을 만들고 물홈을 둘러서 수평을 잡고 남북을 맞춘다. 적도환의 면에는 周天度 365도 1/4의 눈금이 표시되어 있고 동서로 움직이면서 7정(해와 달, 그리고 5성)과 여러 별자리의 입수도분(천구상의 위치)을 측정한다. 100각환은 적도환 안에 있는데 12시 100각의 눈금을 그어 놓았다. 이는 낮에는 해시계로 쓰고 밤에는 中星을 확정할 수 있다. 四遊環에는 규형(별을 관측하는 사이팅 튜브)이 장치되어 있는데, 동서로 돌고 남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 여기에 기둥을 세워 세 환을 꿰어서 비스듬히 기대 놓으면 사유환은 북극을, 적도환은 天復(남북극의 중간)을 기준하게 되며, 이것을 똑바로 세우면 사유환은 立運(수직)이 되고, 백각환은 陰緯(지평)가 된다(≪世宗實錄≫ 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이것이 간의에 대한 조선 초기 학자의 공식 설명문이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학자들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간의는 조선 초기 천문관측의 기본 기기로 실제 관측에서 활발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간의에 대한 조선의 관료 천문학자들의 지식도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 같다. 대간의와 같이 중요한 관측기기에 대한≪세종실록≫의 짧막한 설명문은, 세종 때 관료학자들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만약 김돈이 몇 줄의 글 만으로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더라면, 이 중대한 기기의 제작이라는 중요한 사건을 그렇게 간단하게 기록하고 넘어 갔을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079) 위와 같음.

 간의대에 설치된 대간의는 크기가 얼마였는지 설명이 없다. 곽수경의 간의와 같은 크기였으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소간의도 이동하면서 관측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을 뿐, 그 크기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서운관지≫에는 성종 25년(1494)에 소간의를 만든 사실을 쓰면서 세종 때의 소간의를 설명하고 그 직경이 2자(42cm)라고 밝히고 서운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080) 成周悳,≪書雲觀志≫권 4, 書器. 여기에 설명된 소간의의 구조도 그 문장이 김돈의 설명문과 같다. 이 때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李克培·安琛·金應箕·崔溥 등의 설계로 李枝榮과 林萬根이 제작을 감독했다고 한다. 이 소간의에 대하여 제작자의 한 사람인 홍문관 교리 최부가 명을 지었다. 이 글에서 최부는 소간의가 “낮에는 日晷를 측정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관측했다. 器가 간단하고 작아서 세밀하고 온전하게 쓰인다”고 말하고 있다.

 간의는 지금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에는 원나라 때 만든 것은 없어졌으나 15세기 명나라 때 그것을 다시 만든 것이 南京 紫金山 천문대에 남아 있다. 간의는 말하자면 적도식 토르퀘툼(torquetum)이다.≪元史≫천문지에 그 자세한 구조가 설명되어 있다. 그것을 만들 때, 곽수경은 본격적인 주조 제작에 착수하기 전에 먼저 모형을 시험제작하고 그 모형으로 시험관측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081) 山田慶兒,≪授時曆の道≫(東京;1980), 200쪽. 세종 때의 관료 천문학자들이 먼저 나무 간의를 만들어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것과 같은 순서이다. 곽수경의 간의는, 직경 6자의 움직이는 청동제 적위환 또는 四遊雙環(여기에는 망통 즉 규형이 달려 있다)에 직각으로 달려 있는 직경 6자의 움직이는 적도환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커다란 관측기계이다. 그러니까 간의는 몇 개의 환을 같은 중심 둘레에 모아 놓지 않고 이들을 따로따로 벌려 놓은 관측용 혼천의라 할 수 있다. 간략화된 의기 즉 간의가 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간의가 세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간의가 제작되었거나 수입되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데 곽수경이 1280년에 완성한 授時曆이 고려에서 채용된 것은 1281년이다. 이 때 곽수경이 설계 제작한 관측기기들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새 역법과 함께 고려에 전해졌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1308년에 고려가 태사국과 사천대를 합쳐서 서운관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천문대 시설의 정비·개조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간의를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세종 때의 관료 천문학자들이 간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에 간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성 만월대의 고려 첨성대가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의 간의대와 같은 축조물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간의는 경복궁 간의대의 대간의와 소간의 2개가 제작되어 경복궁 千秋殿 서쪽과 서운관에 각각 설치되었다. 그리고 성종 때에 만들어 서운관에서 관측에 쓰였던 소간의가 있었다. 이것들은 청동으로 주조된 정밀한 적도의식 관측기기이다.

 경복궁의 대간의대에는 또 正方案이 설치되었다. 정방안은 방위 결정판이다. 원대에 곽수경이 만들었던 것은, 네모진 판 위에 여러 개의 동심원과 그 중심을 지나는 +자가 그려지고 중심에 노몬(gnomon)이 세워져 있다. 그 그림자가 원과 만나는 점과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여 방위를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큰 정방안은 관측기기를 정확하게 설치하는데 쓰였다.

 ≪元史≫천문지에 기재된 정방안은 아마도 太史院의 간의의 대좌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그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4자였다.082) 山田慶兒, 위의 책, 209쪽.
Needham, J. et al,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3, Cambridge, 1959, p. 370.

 간의대의 서쪽에는 거대한 圭表가 설치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表는 높이가 40자(약 8.3m)이고 청석을 깎아 만든 圭의 표면에는 丈·尺·寸·分의 눈금을 새겨, 태양이 남중했을 때의 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동지점과 하지점을 확정하는데 사용되었다. 세종 25년(1443)에는 간의대 위에 작은 규표를 세웠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지만, 그 크기는 높이 8자(약 1.67m) 정도였으리라고 생각되고 구조는 대규표와 거의 같았을 것이다.083)≪世宗實錄≫권 100, 세종 25년 4월 21일. 소규표는 간의대 위에서 간편하게 관측하는데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명종실록≫에는 4번이나 대규표와 소규표에 의한 관측기록이 같이 실려 있다.084)≪明宗實錄≫권 6, 명종 2년 11월 기묘·권 7, 명종 3년 1월 신묘·권 9, 명종 4년 11월 기축 및 권 29, 명종 18년 11월 임인의 기사에는 대규표와 소규표에 의한 해그림자의 측정 길이가 丈·尺·寸·分까지 기록되어 있다. 유독 명종 때 여러 번에 걸쳐 실록에 규표에 의한 측정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명종 원년 6월 24일에 규표 보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관측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규표의 구조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원사≫천문지에 나오는 높이 40척의 高表와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만든 복원 모델이 몇 가지 제시되고 있어 그 구조를 알아볼 수 있다. 원대 곽수경의 모델과 1699년에 페르비스트(Verbiest)가 세운 8척 규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거기서 중요한 장치는 규의 맨 꼭대기에 해그림자의 끝을 정확하게 투영하게 하는 막대 모양의 보(橫粱)를 달아 놓은 것이고, 표에도 景符 또는 影符라는 핀홀의 원리를 쓴 장치를 붙여 태양의 그림자를 뚜렷하게 떨어지게 한 것이다.085) 나일성·박성래·전상운·남문현,≪과학기술문화재 복원 기초조사 및 설계용역 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92), 77∼82쪽.≪세종실록≫에 기록된 김돈의 글에서 우리는 40자의 높이를 가진 거대한 청동 표와 그보다 2배 이상의 길이를 가진 청석으로 된 규가 얼마나 웅장한 장치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규표는 원대 곽수경 이후 동아시아에 세워진 가장 큰 천문관측기기였다.

 간의대에 부설된 천문기기에는 渾天儀와 渾象이 있었다. 혼천의에 대한 첫 기록은≪세종실록≫권 60, 세종 15년 6월 9일의 기사에 나타난다. 이 기사는 아주 간단하다. “鄭招·朴堧·金鎭 등이 새로 만든 혼천의를 올렸다”는 것이다. 혼천의 제작의 첫 공식 기사로는 너무 간략하다. 그런데 같은 해 두달 뒤인 8월 11일의 기사에는 또 한번 혼천의를 완성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사는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두번째 혼천의는 鄭招·李蕆·鄭麟趾·金鑌 등이 만들었다고 한다. 정초는 두 번 다 제작에 참여한 인물로 꼽히고 있어, 천문학적인 이론과 혼천의의 원리에 통달하여 제작을 총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은 “세자에게 명하여 이천과 더불어 그 제도를 질문하고, 간의대에서 정초·이천·정인지·김빈 등과 더불어 간의와 혼의의 제도를 토론하였다”고 했다. 이 기사는 이 때부터 간의대에서의 실험적·학습적 관측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김빈과 崔濕이 밤에 간의대에 숙직하면서 실험관측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세자와 함께 매일 간의대에서 정초 등과 그 제도를 논했다고 한다.

 이 혼천의가 세종 19년(1437) 4월 19일의 기사에 나타나는 혼천의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혼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먼저 완성된 혼천의를 가지고 실험관측하는 내용의 기사와 이어진다. 이 때에는 아마도 혼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혼천의도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혼천의와 혼상이 물레바퀴로 움직이는 기계장치와 연결되어 혼천시계로 완성된 것은 세종 15년에서 19년 사이였다. 이들 기기와 그 기계장치에 대한 설명도≪세종실록≫의 기사는 의외로 간략하다.

表(규표) 서쪽에 작은 집을 세우고 혼의와 혼상을 놓았는데, 혼의는 동쪽에 있고 혼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의 제도는 역대에 같지 아니하나, 이제≪吳氏書纂≫에 실린 글에 의해 옻칠한 나무로 혼의를 만들었다. 혼상의 제도는 옻칠한 베로 몸통을 만들었는데 탄환같이 둥글고 둘레는 10척 8촌 6푼이고, 가로 세로로 周天度分(365도 1/4)을 그렸다. 적도는 중간에 있고 황도는 적도의 안팎에 드나들게 했는데 각각 24도 1/8이다. 中外官星을 두루 벌여 놓았는데, 하루에 한 바퀴를 돌고 1도를 더 지나간다. 노끈으로 태양을 황도에 매고, 매일 1도씩 물려 놓으면 천체의 운행과 일치하게 된다. 그 물이 떨어지면서 움직이는 기계 장치의 교묘함은 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 아니한다(≪世宗實錄≫ 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이렇게≪세종실록≫은 혼천의와 혼상에 대해서도 세종 때의 관료학자들이 잘 알고 있어서 굳이 특별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설명은 매우 압축해서 몇 가지만을 지적했다. 혼천의의 구조에 대해서는 원대의 吳澄이 지은≪纂言≫에 나오는 혼의의 제도를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 전부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는 식이다. 다만 그 재질이 옻칠한 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이 혼천의가 노천에서 관측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역대의 혼천의들 중에서 원대의 모델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사실에도 유의해야 한다. 세종 때의 관측기기들이 원대의 천문의기들을 모델로 이어받고 있는 또 하나의 보기가 되는 것이다.

 혼상에 대해서도 역시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재질과 크기, 그리고 그 조작요령 한 가지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 박아놓은 별들은 세종 때 별자리 그림의 표준과도 같았던<천상열차분야지도>의 그것과 거의 같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혼상은 혼천의와 함께 기계시계장치에 연결되어 회전하게 되어 있다. 그 시계장치가 水激式 동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이 혼천의와 혼상이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조속기를 쓴 기계시계장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혼천시계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밀 기계시계장치에 대한 설명과 찬사가 거의 없다는 것은, 실록을 쓴 사관의 표현 그대로 ‘속에 들어 있어서 보이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거나, 또는 설명할 수 없어서 생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중국에서 송·원대에 이런 정밀한 기계시계장치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고, 세종 때인 15세기 전반기에도 여전히 매우 해내기 어려운 첨단 기술이다. 그것을 문헌의 연구만으로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그 기술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혼의·혼상은 1090년에 송의 蘇頌이 만든 거대한 혼천시계에서 그 모델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新儀象法要≫에 의하여 그 제도와 원리가 그림과 함께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소송의 혼천시계는, 나무로 지은 탑 안에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가 들어 있고 거기에 연결되어 혼천의와 혼상이 움직이게 설계된 것이다. 세종 3년(1421)에 천문기기의 연구를 위해서 중국에 파견되었던 장영실과 尹士雄은≪신의상법요≫를 읽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조사한 기기 중에 중국의 역대 혼천의와 혼천시계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세종 때의 혼천시계는 혼상의 둘레가 10척 8촌 6푼이라고 밝혀지고 있으니까, 그 직경이 약 72.6cm의 혼상을 가진 비교적 작은 장치였다. 그래서 이 혼의·혼상은 관측전용 혼천시계 장치라기 보다는 실내용 혼천시계, 즉 교육 설명을 병행하는 천문시계로서의 기능을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천문·역법 확립의 표준시계로, 그리고 천문교습을 위한 움직이는 천문기기로 매우 중요하게 쓰인 것이다. 그래서 혼천시계는 이 때부터 조선 천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천문기기로 여러번 제작되었다. 서운관의 천문학자들은 간의에 의한 관측을 혼천시계와 맞추어 조정하는 일을 계속했다.

 세종 때의 혼천시계는 중종 21년(1526)에 수리되고 또 여벌의 혼천시계도 제작되었다. 명종 4년(1549) 정월에는 새 혼천시계가 만들어져서 홍문관에 설치되었다. 표준시계로서 그리고 천문교습을 위한 실험용의 기기로서 학자들의 기관에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혼천시계들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효종 8년(1657)까지 100년 이상이나 새로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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