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4) 해시계와 물시계의 제작
  • (2) 자격루와 옥루

(2) 자격루와 옥루

 해시계는 간단하고 정확한 시간 측정기기이지만, 개인 날과 낮에만 쓸 수 있으므로 흐린 날이나 밤에는 쓸모가 없다. 그래서 물시계는 공적인 표준시계로 해시계보다 더 유용하게 쓰였다. 조선왕조가 도성을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지으면서 표준시계로 물시계를 제작한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 사업은 태조 7년(1398)에 이루어졌다. 更漏를 鐘街에 설치한 것이다. 짧은 기사이지만, 조선왕조 최초의 표준시계 제작기록이다. 이 때 서울에는 새 물시계와 함께 鐘樓가 세워지고 새로 만든 큰 종을 걸어서 도성에 표준시간을 알리게 되었다.

 특별한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물시계는 고려말에 사용되던 것과 같은 형식의 유입형 물시계인 浮漏였을 것이다. 7세기에 백제 천문학자들에 의해서 제작된 일본의 3단식 유입형 모델의 물시계와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물항아리 4개로 구성되어, 맨 위의 항아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2개의 중간 단계의 항아리를 거쳐 시각을 새긴 잣대가 떠오를 수 있게 만든 맨 아래 물받이 항아리에 흘러내리게 한, 전형적 동아시아 고대 물시계의 모델이었다. 중국에는 지금도 1316년에 廣東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3단식 유입형 물시계가 남아 있다.

 종로 네거리는 이 때부터 물시계와 큰 종이 있는 거리로 도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국가의 엄격한 관리와 통제로 움직이는 이 鐘漏는 국가의 표준기구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서운관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측정된 시각은 종치는 법에 따라 알리게 규정되어 있었다. 해가 져서 물시계로 밤시간의 측정이 시작되는 初更에는 28宿의 수에 따라 종은 28회 울렸고, 밤시간이 끝나는 五更에는 33天에 따라 33회 종을 쳤다. 초경의 종소리를 인경[人定]이라 하여 성문을 닫았고, 오경의 그것을 바라[罷漏]라 하여 성문을 열었다. 날이 밝아 물시계에 의한 시간 측정이 끝난다는 뜻의 파루인 것이다. 그러니까 밤시간은 하지에는 가장 짧고 동지에는 가장 길었다. 따라서 밤시간을 5등분한 1경은 계절에 따라 그 길이가 달랐다. 그것이 서운관의 천문, 물시계를 관장하는 관리에 의해서 통제된 것이다. 그들은 時制 즉 시각의 법에 따르게 되어 있었다.

 세종 6년(1424) 5월에는 경복궁에 설치될 청동제 물시계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이 물시계는≪세종실록≫에 “중국의 체제를 참고하여 주조한 更点의 器”라고만 씌어 있어, 그것이 어떤 구조의 물시계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새삼스럽게 중국의 체제를 참고했다고 하고, 청동으로 주조한, 경과 점을 알리는 물시계라고 그 특징을 말하고 있어, 분명히 새로운 모델임을 이 간결한 설명 속에 담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다.

 ≪燃藜室記述≫別集에는 이 물시계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이 물시계는 세종 3년에 천문기기 제작을 연구하기 위하여 세종의 특명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蔣英實이 만든 것으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새로운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 자동물시계는 세종 7년(1425) 10월에 준공된 경복궁 서운관의 報漏閣에 설치·가동되었다. 이 공로로 장영실은 노비의 신분을 벗었고 實僉知로 제수되어 물시계를 관장하게 되었다.087) 李肯翊,≪燃藜室記述≫別集 권 15, 天文典故. 그러나≪세종실록≫을 비롯한 조선의 다른 공식 기록에는 이 물시계에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것이라는 설명이 없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의 제작은 세종이 특히 염원하던 것이었으며, 옛 시계제작 기술자들의 꿈이기도 했다. 세종은 그러한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를 만들기 위하여 東萊縣의 관노로 있던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벼슬까지 주어서 그 일에 전념하게 한 것이다. 세종 6년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자동물시계는 중국의 역대 자동물시계를 연구해서 만든 장영실의 첫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것을 거의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겠지만, 그 시기에 문헌에 의한 연구만으로 그러한 정밀 시계장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명에 버금가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更点의 器’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경과 점의 밤시간을 자동으로 시보하는 장치가 붙은 물시계였을 것이다. 또 청동으로 주조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규모는 중국에서 만들었던 자동물시계와 비슷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장영실은 그 후 세종 16년에 새로운 자동물시계를 완성했다. 김빈과 함께 2년이나 걸려 만든 것이다. 자동물시계의 첫 작품을 만든 지 꼭 10년만의 일이다. ‘自擊漏’라고 불리운 이 자동물시계는 경회루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되어, 그 해 7월 1일을 기하여 공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의 새로운 표준시계가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완벽한 정밀 기계 장치의 자동물시계를 표준시계로 정확하게 시보하는 기술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세종실록≫에는 김돈의<보루각기>를 인용,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오늘부터 새로운 물시계를 시동하였다. 임금이 이전에 쓰던 물시계가 정밀하지 못하여 물시계를 고쳐 만들 것을 명하였다. 물을 공급하는 항아리는 4개이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물을 받는 항아리는 2개이며 물을 바꿀 때에 번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며 지름은 1척 8촌이다. 띄우는 잣대가 둘인데 길이는 10척 2촌이며, 잣대의 표면은 12시로 눈금을 매겼으며, 매시는 8각이며 初와 正의 여분을 합하여 1백각이 되며 각을 12등분하였다. … 간의와 맞춰보면 털끝만큼도 틀리는 곳이 없었다. 또한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틀리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임금이 護軍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간을 맡을 나무인형(木人)을 만들어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여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게 하였다. 그 구조는 먼저 전각 3칸을 짓고 동쪽 칸에 2층으로 자리를 만들고 윗층에 三神을 세웠는데 하나는 시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을 맡아 북을 치고, 다른 하나는 点을 맡아 징을 친다. … 누수가 흘러 수수호에 모이면 띄울 잣대가 점점 올라가면서 시간에 따라서 왼쪽 구리판 구멍의 여닫이 기구를 젖혀 주면 작은 구슬이 떨어져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간다. 그것이 구멍으로 떨어져 숟갈 기구를 젖혀 주어 기계장치가 열리면 큰 구슬이 굴러 떨어진다. 그것은 굴러서 자리 아래에 매달아 놓은 짧은 통으로 굴러 들어가 숟갈 기구를 움직여 기계장치의 한 끝이 통안으로부터 올라가 시를 맡은 신의 팔꿈치를 건드리며 종이 울린다. 경이나 점도 마찬가지이다. … 이 모든 기계는 속에 감추어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보이는 것은 冠帶한 나무인형 뿐이다(≪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병자).

 ≪세종실록≫의 원문은 이 인용문의 4배가 조금 넘는 분량으로 자격루의 구조와 기계장치, 그 작동원리, 동력의 전달장치와 제어장치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자격루는 播水壺 4개와 受水壺 2개, 12개의 살대(箭), 동력전달장치 및 자동시보장치로 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내려 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살대를 띄워 올리면 그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어 격발하면 구슬이 굴러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는 것이다. 시간을 알리는 장치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즉 파수호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무인형이 종과 북과 징을 치고, 그 보다 낮은 곳에 회전하는 원반이 있어서 그 둘레에 12개의 時神이 배치되어 각각 1시씩 12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리고 쥐의 얼굴을 한 시신의 인형이 子의 글이 쓰여져 있는 패를 들고 솟아 올라 왔다가 내려가게 된다. 이것들은 정밀하게 설계된 자동장치로 매끄럽게 작동하게 되어 있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자격루는 공학적으로, 부력에 의해 얻은 힘으로써 1차적으로 시보용 시간신호를 발생시키고 그것으로 기계적인 2차 구동신호를 발생시켜 12시 시계와 밤시계의 시보장치를 동작하게 하는 자동시계장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물시계와 시보장치의 접속부분에 액면의 높이, 즉 측정된 시간 간격을 시보용 시간신호로 변환해 주는 시보용 신호 발생장치를 두었다. 이 장치들은 지렛대와 쇠구슬의 위치 에너지를 적절히 활용하여 얻은 기계적인 힘에 의해서 작동된다. 시보장치는 역학적 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초보적인 제어용 장치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전형적인 자동시계장치(clock automata)이다.088) 남문현,≪한국의 물시계-자격루와 제어계측공학의 연구-≫(건국대 출판부, 1995).

 ≪세종실록≫은 장영실과 김빈의 자격루를 가리켜, 그 시계장치가 움직이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보는 이마다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격찬하고 있다. 그 자동장치가 거의 완벽했던 것 같다. 10년 전에 만들어 써오던 물시계가 ‘정밀하지 못해서 고쳐 만들도록’ 한 데서 시작된 자격루의 제작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 자동장치는 11세기 송나라의 蘇頌이 제작했던 거대한 천문시계와 원대에 順帝의 명에 의해서 제작된 궁정 물시계, 그리고 아라비아의 알 자자리(Al Jazari)의 자동물시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그러나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의 추진방식과 격발방식은 이들 자동시계의 것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기술적으로 매우 앞선 독창적인 방식을 개발해 낸 것이다. 그것은 15세기 전반기 첨단기술의 한 모델이었다.

 그런데 자격루는 만들어진 지 21년만인 단종 3년(1455) 2월에 자동시보장치의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다. 장영실이 죽고 공동 설계자였던 김빈도 그 해 10월에 죽었을 정도로 늙어,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없었던 것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자격루가 다시 제대로 움직이게 된 것은 그 후 14년만인 예종 원년(1469) 10월이었다. 연산군 11년(1505) 11월에 자격루는 창덕궁에 이전되었다. 창덕궁이 준공되면서 새로운 자격루 제작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성종 때에 자동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각이 서로 맞지 않게 되면서 더욱 절박해졌다. 그러나 그 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새로운 자격루의 제작이 착수된 것은 중종 29년(1534) 9월이었다. 이것은 자격루가 처음 만들어진지 100년만의 일이다. 새 자격루 조성도감이 설치되어 영의정 金謹忠과 우의정 金安老가 都提調가 되고, 右贊成 柳溥와 공조참판 崔世節이 제조가 되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때까지만해도 자격루의 설계도와 제작에 관련된 기록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루각의 자격루, 즉 장영실과 김빈의 자격루를 개조하고 새 자격루를 설계하는데 그러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그리고≪중종실록≫에는 새 자격루 제작을 전적으로 맡아 수행한 2명의 전문기술자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되어 있다. 郎官 金守性과 自擊匠 朴世龍이다. 새 자격루 제작에는 수수통에 양각된 명문에 적힌 공식 기구에 속한 관리들의 명단에는 나타나지 않은 전문기술자로서의 이 두 사람의 기여가 특히 컸을 것이다.

 새 자격루는 중종 31년 6월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8월 20일부터 정식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새 보루각의 물시계는 그 구조가 대략 세종대의 경복궁 보루각의 자격루와 같은 것이었다. 다만 장영실·김빈의 물시계는 밤시간의 경과 점을 자격할 뿐이었는데, 새 자격루는 인경과 바라를 모두 자격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또 이 누각은 1개의 큰 파수호와 2개의 조금 작은 파수호, 그리고 2개의 수수통으로 된 3단식의 물항아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청동으로 부어 만든 큰 파수호는 직경이 93.5cm, 높이 70cm이고, 꿈틀거리는 듯한 용을 조각한 청동제 수수통은 외경 37cm, 높이 199cm이다. 이 항아리들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중종 때의 자격루도 거대하고 장중한 물시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새 자격루의 제작은 15세기 전반기에 조선이 도달한 자동기계장치의 첨단기술이 16세기까지 이어지고 발전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16세기 조선의 기술수준을 평가하는 주요한 지표의 하나가 된다.

 새 자격루가 새로운 표준시계로 쓰이게 되면서 세종 때의 자격루는 다시 경복궁 보루각에 옮겨져 여러 차례 수리되면서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새 자격루는 창덕궁 보루각에 남아 여러 번 수리되면서 조선의 표준시계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그런데 효종 4년(1653)에 시헌력이 시행되면서 자동시보장치는 1일 96각의 時制에 맞지 않아 쓸 수 없게 되었다.

 관상감은 자동시보장치를 제거하고 漏器만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자격루는 이 때부터 자동물시계가 아닌 보통의 물시계로 쓰이게 된 것이다. 이 물시계는 조선말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지금 덕수궁에 보존되고 있는 물시계의 유물이 그것이다.

 세종 때에 만들어진 자동물시계 중에는 또 하나 玉漏가 있다. 글자 그대로 임금의 물시계란 뜻이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까지 승진한 관노 출신 장영실이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세종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세종 20년(1438) 정월에 완성된 옥루는 天象時計이다. 세종은 이 자동물시계를 경복궁 千秋殿 서쪽에 欽敬閣을 지어 설치하게 했다. 이로써 조선에는 표준시계인 자격루, 천문시계인 渾天儀, 그리고 천상시계인 옥루의 세 가지 자동시계를 갖추게 되었다.

 ≪세종실록≫에는 金墩의<欽敬閣記>를 인용하여 옥루의 구조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풀을 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서 집 한가운데 놓았고, 산 속에는 옥루의 기계바퀴를 설치하여 물로 이것을 돌리게 하였다. 금으로 해(의 모형)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탄환만 하다. 그리고 오색의 구름이 이를 둘러싸고 산허리 위로 지나가게 했다. 태양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으로 지게 되어 있다. 비스듬히 기운 궤도를 따라 돌아 천체의 운행과 같게 하여 북극거리와 일출입 시각을 각각 절기에 따라 태양과 맞게 하였다(≪세종실록≫권 80, 세종 20년 정월 임진).

 이어서 김돈의<흠경각기>는 옥루의 인형에 의한 자동시보장치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인형은, 요령을 흔드는 4명의 玉女와, 시간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청룡·주작·백호·현무의 4신과, 시간마다 종을 치고 경마다 북을 치고 점마다 징을 치는 붉은 옷에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은 3명의 무사와 司辰이 있다. 그리고 산 밑 평지에는 12신의 인형이 있는데, 자시가 되면 쥐의 신 뒤의 구멍이 열리면서 옥녀가 시패를 들고 나오면 쥐의 신은 그 앞에서 일어났다가 자시가 지나면 옥녀는 들어가고 쥐의 신은 엎드린다. 이런 동작은 12시간에 따라 돌아가면서 반복된다. 또 午 자리 앞에는 다른 대가 있는데 그 위에 물이 차면 기울어지는 그릇을 놓고 官人의 인형이 금으로 만든 병을 들고 물을 부으니, 물시계에 쓰고 남은 물이 계속 흘러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바로 서고, 가득 차면 엎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김돈은 “이 모든 기관은 사람의 힘을 받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 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천체운행의 도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든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흠경각에는 또 자동인형시계의 배경에 농가 사시의 광경을 계절에 따라 그린 화폭을 세우고, 사람·동물·나무들을 나무로 조각하여 농촌의 자연을 재현하였다. 하늘의 현상과 우리 나라의 자연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과 농촌의 정경을 입체적으로 구성·배열하여 천상시계의 배경을 파노라마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옥루가 단순한 자동인형시계의 완상품이 아니고, 웅장하고 생동하는 천상시계장치로 차원을 높인 궁정시계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장영실의 옥루는 임금의 시계로서의 감동을, 그리고 보는 사람에게 신기함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옥루는 이와 같이 물레바퀴의 회전을 그 동력으로 해서 움직이는 천상시계이며 자동인형시계였다. 여기에는 송대에 만든 거대한 혼천시계의 기계장치와 조속 및 탈진장치, 그리고 司辰에 의한 시보장치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중세 아라비아 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행과도 같았던 사신과 무사와 그 밖의 인형에 의한 자동시보장치의 영향이라고 믿어지는 자동장치들이 나타나고 있다. 장영실은 그 특징들을 본따서 그것을 조선식으로 재구성하고 변형해서 거기에 태양의 모형을 덧붙혀 새로운 모델의 천상시계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조선식 모델의 자동천상시계를 창조해 낸 첨단기술의 산물이었다.

 이 궁정 천상시계는 그것이 비록 관측과 관련된 실용적인 장치는 아니었지만, 15세기 전반기의 물리학과 그 기술의 원리를 종합적으로 집약하고 응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계장치로 또 자동시계장치로 첨단기술의 성과를 활용한 것이었다. 김돈에 의하면, 중국의 여러 자동시계장치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가야했는데, 장영실의 옥루는 사람의 힘을 조금도 입지 않고 스스로 움직였다고 한다. 장영실이 보다 앞선 정밀한 자동장치의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장영실의 옥루는 그 후 100년이 넘게 궁궐 안의 신기한 자동시계로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명종초에 경복궁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곧 다시 제작되었다. 명종 9년(1554)에 朴民獻·朴詠 등이 장영실의 설계도에 의해서 1년 만에 다시 만들어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궁중과 도성에서는 정밀한 물시계가 국가의 표준시계로 제작 사용되었지만, 각 도 감사의 營과 지방 도시에서는 어떤 물시계가 사용되었는지, 그 구조를 설명한 기록이 없다. 다만 軍陣과 함길·평안의 변방에서는 이동이 가능한 간이 물시계가 사용되었다. 그 휴대용 물시계가 行漏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종 19년(1437) 6월 18일자≪세종실록≫의 기사에는 변경의 군문에 시간을 측정하는 기기가 있어야겠다고 해서 함길도 도절제사의 영에 일성정시의·현주일구·행루 등의 시계와 漏籌通義 각 하나씩을 보내고, 경원·회령·종성·온성에는 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그리고 평안도 도절제사 영에는 일성정시의·현주일구·행루·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강계·자성·여연에는 현주일구·누주통의 각 하나씩을 보냈다고 했다. 이 고을들에는 서운관의 관원을 파견하여 시간측정법을 교습하게 했다. 이 무렵에 제작된 행루는 10개가 넘는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세종실록≫에는 행루의 구조에 대하여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를 만들었는데, 몸체가 작고 제도가 간략하다. 파수호와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인데, 자·묘·오·유시에 渴烏로 물을 갈아 붓는다”089)≪世宗實錄≫ 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행루는 2개의 물항아리를 싸이폰으로 연결하여 물받이 항아리(수수호)에 눈금을 새긴 잣대를 浮子로 떠오르게 해서 시각을 재도록 만든 것이다. 물탱크에 흘러내리는 물이 그대로 눈금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간단한 장치이므로 물의 양에 따라 생기는 수압의 차이 때문에 흐르는 속도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 싸이폰을 썼고, 하루에 4번, 그러니까 6시간마다 물을 갈아야 했다.090)≪明宗實錄≫권 10, 명종 5년 6월 정사의 기사에 행루의 잣대와 구리로 만든 浮龜를 관상감에서 개조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어, 행루에 대한≪世宗實錄≫의 기사를 보충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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