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6) 측우기의 발명과 농업기상학의 발달
  • (1)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

(1)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

 근대적 과학으로서의 기상학은 조선 초기에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을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흔히 測雨器라고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자급자족하는 토지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왕조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자연조건 특히 강우량이 농업경작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을 극복하려던 노력의 하나로 측우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기상학은 측우기의 발명과 함께 농업기상학으로 출발했고,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언제부터 제도화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계승되어 내려온 것으로 믿어지는 강우량의 측정법이 조선 초기에 행해지고 있었다. 그 방법은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수치를 각 도 감사가 집계하고 그것을 호조에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정기적으로 집계해서 기록하여 두는 방법이었다. 세종 5년(1423) 5월 3일 “오늘 밤 비가 내렸다. 땅 속에 1치 가량 스며들었다”거나, 세종 7년 4월 1일과 5월 3일 “지금 가물어서 각 도와 군현에 명하여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든 정도를 조사하여 보고케 했다”는≪세종실록≫의 기사들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강우량 측정법은, 측정을 통한 기상관측이라는 태도로서는 훌륭한 것이었으나 측정방법으로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빗물이 땅 속에 스며드는 깊이는 땅이 말랐을 때와 젖었을 때에 따라서 차이가 심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종 23년을 전후해서 거듭된 한발과 폭우가 번갈아 닥쳐 온 일은 그 때까지 시행하던 강우량의 측정법을 거의 쓸모 없는 것이 되게 했다. 각 지방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호조에 보고해 왔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점은 빗물을 어떤 특정한 그릇에 받아서 그 깊이를 측정하는 보다 과학적인 방법을 요구하고 있었다. 장독대에 놓인 독이나 항아리에 고이는 빗물은 그것을 일깨워 주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세종 23년(1441) 8월 18일 조선 농업기상학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새로운 강우량 측정제도가 마련되었다.≪세종실록≫에 의하면, 호조에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종전까지의 강우량 측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측우기를 만들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명시하고, “서운관에 청하여 대를 만들고 깊이 2자 지름 8치의 鐵器를 주조하여 대위에 놓고 빗물을 받아 서운관의 관리에게 그 깊이를 재서 아뢰도록하였다”고 했다. 이 역사적인 기록들은 몇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세종 23년 8월의 기사에는 그 때까지 조선에서 어떤 방법으로 강우량이 측정되고 있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강우량의 측정이 전국적으로 제도화되어 시행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측우기의 발명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으로 과학사의 서술에서 가장 극적인 사실을 증언하는 최고의 자료이다. 이 부분만을 읽어도 강우량 측정의 과학적 방법이 창조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역사적 배경과 동기가 분명하게 떠오른다. 움직일 수 없는 독창적 아이디어의 출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 때까지의 불완전했던 강우량의 측정법이 측정기기에 의한 과학적·수량적 측정 방법으로 개량되었다. 길이 2자(약 42cm), 직경 8치(약 16.8cm)의 원통형의 철제 우량계가 이 때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다.

 이 기사는 또한 강우량 측정법과 집계방법을 어떻게 제도화하였는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지방의 각 관청에서는 서울에서 부어 만든 그릇의 보기에 따라 사기나 옹기 그릇을 써서 객사 뜰에 놓아 두고 수령이 물의 깊이를 재서 감사에게 보고케 하여 감사가 집계·보고하도록 했다”고 하여, 그것이 전국적인 규모로 시행된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러한 역사적인 업적의 창조자가 누구였는지 분명히 하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빗물을 특정한 그릇에 받아서 그 깊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은 문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실록의 기사에서 측우기를 만든 것은 서운관이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으니,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은 서운관에 소속되었던 여러 학자들의 공동연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측우기는 이렇게 세종 23년 가을에 처음으로 발명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드러나서, 다음해 초여름 우기에 접어 들면서 시행단계에 들어서자 보다 완성된 제도로 개량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5월 8일에 마침내 그 구체적 방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고 원통형 그릇은 측우기라고 이름지어졌다.≪세종실록≫에는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호조에서 여쭙기를, 측우기의 일에 대하여 이미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나 미진한 곳이 있어 조례를 다시 구신하나이다. 첫째, 서울에서는 쇠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 측우기라 이름지었는데 길이 1자 5치, 직경 7치로 하여 周尺을 쓰고,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비가 그쳤을 때마다 본관 관원이 강우상황을 직접 관찰하여 주척으로써 수심을 측정하고, 아울러 비가 시작한 때, 날이 개인 때와 수심의 치수를 기록하여 즉시 보고하고 기록케 하며, 지방에서는 각 도와 군·현의 객사 뜰에 두고 수령이 직접 강우량을 치·푼까지 측정하여 보고케 했다(≪세종실록≫권 96, 세종 24년 5월 정유).

 이렇게 세종 24년 5월 8일에 개량·완성된 이 제도는 강우량 측정법에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근대적이고도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이 측정 방법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강우량 측정법과 비교할 때 자(尺)를 따로 씀으로 인한 부피의 증가에서 생기는 오차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그 오차는 무시할 만한 극히 작은 것이다.

 이 때 제정된 규정이 전년도의 것과 달라진 점을 살펴 보면, 그 사이에 뚜렷한 개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측우기의 규격이 달라진 것인데, 깊이가 직경에 비하여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서운관의 과학자들은 아마도 우리 나라의 강우량이 한번에 300㎜ 이상은 내리지 않는다는 그들의 통계를 바탕으로 해서 이 규격을 확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측정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셋째는 자는 주척을 쓴다는 것이며, 넷째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개인 때를 기록하는 일이고, 다섯째는 수심은 자·치·푼까지 정확하게 잴 것을 규정하였고, 여섯째는 서운관은 그 상황을 즉시 보고할 것 등을 명백히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의 첫 기사와 다음해 봄의 기사는 그 때까지 축적된 데이터와 실험적 검토를 근거로 해서 시험적으로 제작된 측우기가 어떻게 조정되어 제도적으로 확정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를 만들었다는 단순한 사실의 기사화에 머무르지 않고, 측정방법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제도화와 보고제도 및 통계기록 보존방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5월의 기사에는 전 해 8월에 발명된 기기를 개량 확정하면서 그것을 ‘測雨器’라고 명명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측우기는 길이 1자 5치, 직경 7치의 철제 원통이다. 그리고 고인 빗물은 주척으로 수심을 측정하여 강우량을 치·푼까지 정확하게 나타내도록 명기하고 있다. 또 관측일지에는 강우시간을, 비가 오기 시작한 일시와 그친 일시를 적어 분명히 하도록 했다. 이 모든 제도는 거의 완벽한 것이다. 15세기 전반기에 이러한 과학적인 기상 측정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측우기의 제작은 정조 6년(1782)에 만든 대리석 측우대에 直提學 沈念祖가 撰한 글에서 볼 수 있듯이, ‘水旱之政을 조심하시고 애쓰셔서’ 만든 것이고 비가 오기를 빌고 기다리는 祈雨의 한 儀式을 치르는 것과도 같은 뜻이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과 아이디어의 창출, 그리고 강우량의 측정법 등은 분명히 과학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또한 자연현상을 기기를 써서 수량적으로 측정하려던 과학적 방법의 출현으로 보는 데에 별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측정된 강우량은 ‘몇 시 몇 경에 비(灑雨)가 내렸다. 강우량의 측우기 수심은 몇 촌 또는 몇 푼’이라는 격식에 따라서 기록·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의 규례에도 나오지만, 조선왕조는 강우량을 그 수심과 함께 그 정도에 따라서 8단계로 분류·기록하는 근대적인 방법도 썼다.

 조선초의 과학자들은 강수현상의 기기에 의한 수량적인 측정방법의 또 다른 한 가지로 하천의 수위를 재는 장치를 창안해 냈다. 서울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과 근교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에 세운 水標가 그것이다.≪세종실록≫에는 이 사실도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청계천 馬前橋 서쪽에 세운 수표는 근대적인 하천 水位計 바로 그것이었다. 한강변의 암석에도 ‘尺·寸·分을 새긴 標’를 세웠다고 했다. 도시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의 물과 근교의 큰 강의 수위를 측정함으로써 평소의 수위와 하천의 범람에 대비한 위험 수위, 갈수기의 수위 등을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수표는 성종 때에 화강석으로 개량되었다. 측우기에 머무르지 않고 수표에 의한 측정을 함께 병행했다는 사실은 강수량의 과학적 측정제도로 완벽한 것이었다.

 이렇게 세종 때의 과학자들은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의 측정을 제도화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에 이미 자연현상을 수량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하고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기상학의 과학적 방법을 수립하였다. 조선왕조에서 15세기 전반에 있었던 이러한 강우량 측정기기의 발명과 과학적 측정제도의 전국적인 시행을, 과학으로서의 농업기상학의 시작으로 규정하려는 뜻이 여기에 있다. ‘農者天下之大本’을 내세운 유교적 농업국가인 조선왕조에서 농업기상학이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보다 일찍이 과학으로 처음 성립했다는 사실은 의의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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