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2. 천문 기상학
  • 6) 측우기의 발명과 농업기상학의 발달
  • (2) 농업기상학의 발달

(2) 농업기상학의 발달

 농작물에 미치는 기상의 영향 중에서 강우량 다음으로 중요시 된 것은 바람이었다. 大風 현상을 災害로 기록한 것을 우리는≪증보문헌비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이라 불렀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으로 暴風이라고 했다. 대풍과 폭풍은 자연현상에서, 특히 風異로 기록되었다. 災異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姜希孟의 이론은 조선 초기 경험적 농업기상학의 이론 중에서 특히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농가의 재앙으로 물난리와 가뭄 다음으로 바람에 의한 해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리 나라 땅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넓은 들이다. 북에는 험산준령이 있는데 그것은 꺾어져서 동쪽을 덮고 남쪽에 이르러 끝나고 있다. 그래서 그 지세는 동쪽과 북쪽은 모두 산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들판이다. 바람이 바다를 거쳐 불어오는 것은 따뜻해서 쉽게 구름과 비가 되어 식물을 자라게 한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는 것은 차다. 그러므로 그것은 식물에 해를 끼친다. 嶺東 사람들이 농사철에 동풍이 불기를 바라지만, 湖西·京畿·湖南 사람들은 동풍을 싫어하고 서풍이 불기를 바라는 까닭은 그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는 까닭이다(姜希孟,≪衿陽雜錄≫諸風辨 4).

 이렇게 그는 우리 나라는 지세로 보아 바다를 지나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며 雲雨를 만들고, 산을 거쳐 오는 바람은 차서 농작물을 손상하며, 풍해 중에서는 동풍에 의한 것이 많다고 했다. 그의 글에는 한국의 자연지리적 이론과 기상학의 이론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있다. 그의 이론에는 Föhn현상이 이미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가 머무르고 있던 경기지방에서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던 사실을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동쪽에 산맥이 가리워 있는 경기지방에서는 동풍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가 매우 커서 심할 때는 논밭의 물고랑이 모두 마르고 식물은 타버리며 적을 때도 벼잎과 이삭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벼이삭이 싹트자마자 오그라들어 자라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을 경험적으로 전개한 이론 중에서 선구적인 것이다.

 이렇게 농작물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선 초기의 기상학자들은 풍향을 특히 정확하게 관측했다. 서운관에서는 풍향의 관측을 위하여 風旗竹 즉 풍향 관측기를 설치하였다. 풍향의 계통적인 관측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종 때부터는 풍기죽을 風旗臺에 꽂아 놓고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관측하고 대체적인 풍속을 가늠했다.

 일기예보는 주로 경험론에 의한 강우의 예보, 즉 農家占雨의 기술이 예로부터 주로 농서를 통해서 전해내려 왔다. 그러한 일기예보술은 크게 3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는 중국의 고문헌에서 인용한 것이고, 둘째는 陰陽說에서 나온 占雨法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셋째는 경험에서 얻은 지식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예보의 특징은 대부분 오랜 경험에 입각해서 얻은 지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희맹은 그의 저서에서 음양설에 의한 점우법을 들고 그 비논리성을 지적하면서, 우리 나라는 언제나 남풍일 때 큰 비가 내리고 북풍이 불면 오래 개인다는 사실은 음양설의 점우법과 상반되는 현상이라 하고, 경험과 관찰에 의한 과학적인 통계에서 얻은 이론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17세기 중엽,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농서로 판을 거듭한≪農家集成≫이 세종 때의≪農事直說≫·≪四時纂要≫그리고 강희맹의≪衿陽雜錄≫으로 구성된 것은, 강희맹의 저서가 갖는 비중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농업이론은≪농사직설≫의 경험적 농법과 함께 중요한 농사지침서로 기여한 바 컸다. 그러므로 강희맹의≪금양잡록≫에서 조선 초기 농업기상학 이론의 한 편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그 후≪산림경제≫와≪임원십육지≫등에서 점철되고 있다. 이런 자료들의 정리와 체계화가 자연현상의 관찰·측정과 같은 기계적 데이터의 정리와 함께 재구성되어야만 조선 초기의 농업기상학의 모습이 제대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 밖에 기상관측으로는 지진과 白虹貫日 및 白虹貫月이 이상현상으로 특히 주목되었고, 햇무리와 달무리, 극광, 무지개, 우뢰와 번개, 우박, 서리, 안개, 눈, 구름, 해일과 큰 파도, 밀물과 썰물 등이 계통적으로 관측 기록되었다.

 측우기와 수표의 발명, 그리고 전국에 걸친 근대적 강우량 측정은 조선의 농업기상학 발전의 전기가 되었다. 그 제도는 그 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성종 때에는 청개천의 수표가 화강석으로 개량되어 새로이 설치되었다.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중종실록≫에 나타나는 강우량에 대한 기사는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중종 25년(1530) 7월 9일의 “밤에 비가 내렸는데 깊이 2푼이었다”는 기록과 중종 37년 5월 29일의 “28일부터 오늘까지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측우기의 수량이 5푼이었다”는 기록은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이 계속되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 19년(1586) 5월 3일의≪선조실록≫기사는 세종 때에 확립된 측정 제도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가 왔다. 수심이 布帛尺 1촌 1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측정에 쓰인 자가 지정된 표준척인 주척이 아니고 포백척으로 바뀐 것이다. 세종 24년(1442) 5월에 제정된 측정법이 지켜지지 않고, 측우기만이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마저 얼마 후 전란으로 측우기가 모두 유실되면서 지켜질 수 없게 되었다. 강우량 측정법은 겨우 수표에 의한 측정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094) 全相運,<朝鮮前期의 科學과 技術-15세기 科學技術史 硏究 再論->(≪한국과학사학회지≫ 14-2, 1992), 156∼159쪽 참조.

<全相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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