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3. 물리학과 물리기술
  • 1) 도량형과 자기의 이론

1) 도량형과 자기의 이론

 조선초의 도량형은 고려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리고 시장에서의 공중거래 질서를 담당하는 도량형과 가장 관련이 깊은 관청 京市署 역시 고려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세조 12년(1466) 경시서는 平市署로 이름만 바꾸었다.≪經國大典≫에 의하면 평시서는 종5품 관아로서 令(종5품) 1명, 直長(종7품) 1명, 奉事(종8품) 1명을 두고 그 아래 書吏 8명 등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관청이 국가의 도량형을 새로 제정하거나 대단히 강력한 통제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세종 13년(1431) 4월 공조에서는, 관청마다 그 우두머리가 도량형을 만들어 나눠주는 바람에 척도가 길고 짧은 것이 들쭉날쭉하니 각 관아에서 竹尺을 만들어 중앙에 보내고, 그것을 경시서가 바로잡아 기준척으로 다시 돌려 보내자고 건의하였고 이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095)≪世宗實錄≫권 52, 세종 13년 4월 신축.

 세종대의 도량형 정비 노력은 이 때 만들어진 여러 가지 천문기구의 치수를 정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더욱 절실했다.≪世宗實錄≫에는 경회루 둘레에 만들었던 簡儀·渾儀·渾象·報漏閣·欽敬閣·여러 가지 해시계와 日星定時儀 등의 제작을 설명하는 긴 글 뒤에 바로 도량형의 교정 문제가 함께 거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런 기구들을 제작하는 데에는 대개 周尺을 기준으로 썼으나, 주척을 확정하는 일부터 쉽지가 않았다. 朱子의≪家禮≫에 실어 놓은 척도를 기준으로 하려 하지만, 세상에 돌고 있는 판본이 여럿이어서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조 2년(1393) 판중추원사 許稠가 두 가지 척도를 비교하여 이를 해결한 일이 있었다. 우선 그는 陳友諒의 아들 陳理의 사당에 모신 神主의 치수에서 尺本을 뜨고, 姜碩弟의 아들 집에서는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 곳의 象牙尺에서 떠 온 종이 척본을 얻어 함께 비교했다. 이렇게 비교 연구해 얻은 결과는 서로 어긋남이 없었다. 이로써 당시 조선과 중국의 주척이 같다는 것도 증명되었고, 그로부터 집안의 사당이나, 거리의 표시, 활터의 거리 측정 등을 모두 이 주척으로 하기로 했다. 물론 세종 19년 4월에 완성된 많은 천문기구들 역시 바로 이 주척을 기준으로 하였다.096)≪世宗實錄≫권 77, 세종 19년 4월 갑술.

 이보다 앞서 주척을 교정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세종 12년 9월에 임금은 집현전 부제학 鄭麟趾에게 주척을 考正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주척을 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깨달은 세종은 바로 다음달에는 정인지에게 주척을 만드는 일을 중단하게 했다. 세종은 주척은 시대에 따라 달랐고, 黃鍾管 또한 중국과는 성음구조가 다른 우리 나라의 것이 중국 것과 똑같을 수 없다면서 그것을 지금 만들어 뒷날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만들지 않음이 낫다고 하였다.097)≪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9월 정묘·10월 을유.

 요컨대 도량형의 기준이 된다고 할 수도 있는 주척은 결국 천문기구 등을 대규모로 마련하면서 일단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뒤에 徐居正은 세종 때 허조의 노력으로 주척이 확립된 과정을 회고하면서, “모든 사대부 집 사당의 신주의 천문기구, 도로의 里數, 활터의 거리 등을 모두 여기에 따르게 했다. 그후 司譯 趙忠佐가 명나라에 갔다가 새로 만든 신주를 사 왔는데, 그 치수가 우리 나라와 寸, 分도 틀림이 없었다. 지금 우리 주척이 중국의 것과 같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쓰고 있다.098) 李肯翊,≪燃藜室記述≫別集 권 13, 周尺.
徐居正,≪筆苑雜記≫권 2.
서거정의 글 내용은≪세종실록≫을 그대로 베끼다시피 하고 있지만, 세종의 주척 확정이 1437년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 논평은 꼭 49년 뒤의 것이다. 반세기 뒤에까지 세종의 주척 확정은 별 이론 없이 칭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망설임과 방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세종대에는 도량형 제도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는데, 부피는 세종 28년(1446) 9월 호조의 건의를 따라 斛·斗·升·合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기준으로 쓰는 척도는 새 營造尺이었다.099)≪世宗實錄≫권 113, 세종 28년 9월 임진.

斛(부피 20斗 짜리) : 길이 2척, 너비 1척 1촌 2푼, 깊이 1척 7촌 5푼, 積 3,920촌

 (부피 15斗 짜리) : 길이 2척, 너비 1척, 깊이 1척 4촌 7푼, 적 2,940촌

斗 : 길이 7촌, 너비 7촌, 깊이 4촌, 적 196촌

升 : 길이 4촌 9푼, 너비 2촌, 깊이 2촌, 적 19촌 6푼

合 : 길이 2촌, 너비 7푼, 깊이 1촌 4푼, 적 1촌 9푼 6리.

 과연 조선 초기의 도량형이 지금 기준으로 얼마에 해당하느냐를 계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몇몇 시도가 있었으나 정말로 당시의 기준 척도가 지금 우리들이 믿을 수 있을 만큼 정확한 것일지는 의문이다. 비록 경시서(평시서)에서 표준 도량형을 가지고 교정해 주는 일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지방에 따라 여전히 조금씩 다른 자와 저울·되 등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00) 朴興秀,<도량형>(≪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全相運,≪韓國科學技術史≫(正音社, 1975), 150·152쪽.

 ≪경국대전≫의 도량형 조목에 나오는 상태는 대체로 세종대까지 정리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조 초기의 길이·부피·무게의 기본 단위는 다음과 같다.101)≪經國大典≫권 6, 工典.

길이(尺度) : 1分=10釐, 1寸=10分, 1尺=10寸, 1丈=10尺

부피(量器) : 1合=10勺, 1升=10合, 1斗=10升, 1小斛=15斗 (平石), 1大斛=20斗 (全石)

무게(權衡) : 1分=10釐, 1錢=10分, 1兩=10錢, 1斤=16兩

 또한 이 시기의 자로는 黃鍾尺·周尺·營造尺·造禮器尺·布帛尺 등이 있었는데, 이들의 상호관계를≪경국대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황종척 1척=주척 6촌 6리=6.6

     =영조척 8촌 9푼 9리=8.99

     =조례기척 8촌 2푼=8.23

     =포백척 1척 3촌 4푼 8리=13.48

 이≪경국대전≫의 체제가 뒤에 추가·보충되어 지방 각 관아에는 공조에서 만든 표준 도량형이 제공되었고, 이를 본떠서 각 관청에서 만들거나 개인이 만든 것들을 모두 서울의 평시서나 지방 관아에서 검정을 받아 낙인을 찍어 사용하게 했다. 성종 5년(1474) 申叔舟가 경연에서 건의한 내용을 보면 3년마다 한 번씩 교정한 도량형을 지방에 보내 기준으로 사용케 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신숙주는 또한 쇠로 자를 만들어 지방 기준척으로 보내자고도 주장했으나,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尹子雲은 각 관청마다 목공의 기술이 다르고 정확성이 떨어져 도량형이 통일되기 어렵다고 말하고, “관청의 말과 섬도 서로 다른데, 항차 민간의 경우야 말할 것도 없다”고 평하였다.102)≪成宗實錄≫권 49, 성종 5년 11월 기사.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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