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3. 물리학과 물리기술
  • 4) 화약과 화기의 제조

4) 화약과 화기의 제조

 고려말 崔茂宣이 화약을 발명하여 병기제작에 이를 제도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우왕 3년(1377) 이래 화약은 중요한 무기제작 기술상의 혁명이었다. 이 발명으로 조선초부터의 무기기술은 새로운 전환을 겪고 있었다고 할 만하다. 조선초의 모든 군사기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연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재래식 병기가 활·창·칼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면, 화약병기의 발달은 말하자면 새로운「화학적」무기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조선초의 병기기술 발달은 아무래도 일반 재래식 병기 보다는 신무기라 할 수 있는 화약무기에서 큰 발전이 계속되었다. 또 화약병기의 발달로 인한 군사적 우위와 북방과 남방의 이민족과의 쟁투에서 조선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조선초의 북방 및 남방 정벌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화약병기는 중국과 조선에만 알려져 있었으며, 그런 상태가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화약무기 개발은 중단되었다가 태종 원년(1401) 崔海山을 고용함으로써 다시 재출발을 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북방민족과 왜구에 대해 다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해산은 최무선의 아들로 權近의 추천으로 文益漸의 아들 文中庸과 함께 특채되었다. 문중용이 사헌부 감찰로 뽑히고, 최해산은 군기시 주부가 되었다.124)≪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경인.

 이로부터 화약무기 개발은 박차를 가하여 태종 7년 이후에는 그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태종 7년 12월 화약무기 실험에서는 그 위력이 전보다 두 배로 커졌고, 이에 따라 화약무기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특히 火車가 더욱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후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도 더욱 성행한 것을 보더라도 화약의 생산 이용이 확대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125)≪太宗實錄≫권 14, 태종 7년 12월 기유. 태종 7년에서 9년경에 화기는 일기를 획할 수 있을 만큼 대폭 발전했다고 평가되고 있다(許善道,≪韓國火器發達史≫, 陸軍士官學校 軍事博物館, 1969, 19쪽).

 태종 9년(1409) 10월 태종은 최해산의 화차시험을 구경하고 관련자를 시상했다. 화차는 구리통 속에 화살을 수십 개 넣고 이를 작은 수레에 실어 끌고 다니다가 화약으로 발사하는 장치로 그 맹렬함이 적을 제압할 만하다고 하였다. 화차는 흔히 임진왜란 때 邊以中이 처음 만든 것처럼 알려진 일도 있으나, 화차는 화약의 발명과 함께 시작되어 계속 개량되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도 화차를 사용했다는 권근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 있고, 또 문종 원년(1451)에 만든 화차의 그림은≪國朝五禮儀序例≫에 남아 있기도 하다.126) 權近,≪陽村集≫권 4, 賀崔元帥茂先破鎭浦倭船. 화차는 일종의 장갑차로 화기를 차 위에 싣고 다니면서 화살을 쏘게 된 장치로서 문종대에는 더욱 발달하여 神機箭을 싣고 다니며 로켓식으로 발사하는 규모로까지 발달한 것이었다.

 세종대로 들어가면서 화약기술은 더욱 발전한 것이 확실하다. 특히 세종 후기로 들어가면 화약기술이 최해산 혼자의 손을 벗어나 여러 기술자들에게 전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최무선은 죽을 때 어린 아들 최해산에게 전하라며 비밀로 기록해 두었던 화약기술서를 부인에게 남겼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화약기술이 초기에 얼마 동안 최씨 집안의 家傳的 기술 범주에 머물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해산이 특채된 까닭도 꼭 그 아버지의 덕택만이 아니라 그의 기술을 이용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군기시에서 화약개발의 총책임을 맡아 일하던 최해산의 위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 들어 세종 14년(1432) 4월에는 임금과 대신들이 최해산의 외방 전출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가운데, “군기감의 화약기술자들이 이미 그 기술을 해득하고 있어서 최해산이 외방에서 1∼2년 근무하여도 그리 해로울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127)≪世宗實錄≫권 56, 세종 14년 4월 경술.

 이상은 최무선이 고려말 화통도감을 만든 이후 그의 아들 최해산까지 거의 60년 동안 최씨 일가가 주도하던 화약기술이 조선초의 화약기술자들에게 전수되었음을 보여준다. 화약사용이 점차 대량화하여 그 기술을 여러 기술자들이 함께 배워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세종대에는 화약의 가장 중요한 원료가 되는 염초 제조기술이 크게 발달하고 또 대량의 염초를 구워낸 것이 확실하다. 당시의 흑색화약은 염초·황·숯가루를 섞어 만드는 것으로 기술상의 가장 큰 문제는 염초의 제조에 있었다. 염초를 얻기 위해서는 낡은 집의 마루밑에 찌든 흙같은 것을 가마에 넣고 끓이게 되는데, 그 기술은 잘못되면 널리 알려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종대에는 염초 채취가 전국에서 행해졌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로 시행되었다. 지방마다 일정액을 정해서 만들어 바치게 하는 방법과 중앙에서 기술자를 파견해 구워오게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세종대에는 평안도·황해도·강원도에서는 일정액을 정해 만들어 올리게 했고,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는 중앙의 기술자가 파견되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염초 제조기술이 확산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막아 보려는 데 이유가 있었다. 특히 일본에 그 기술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하튼 중앙에서 파견된 기술자가 염초를 구울 때는 일체 다른 사람을 참가시키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전국적으로 염초 제조가 시행되는데 따라 그 기술은 최해산 혼자의 손에 머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해산은 세종 15년 이후 화약 기술 분야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이 가운데 화약 성능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아 대신이 중국의 화약보다 훌륭하다고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마침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에게 불꽃놀이 구경을 시킬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몇 사람이 사신이 원하면 보여줘도 좋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許稠는 이에 반대하면서 “화약량이 제한되었고, 한번 불꽃놀이에 소비도 많을 뿐 아니라, 게다가 우리 화약의 맹렬함이 중국의 것을 능가하기 때문에 중국 사신에게 보여주기 어렵다. 그가 보기를 청하여도 보여 줘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하였다.128)≪世宗實錄≫권 54, 세종 13년 10월 병오.

 이 시기에 화약무기의 종류로는 무거운 발사체를 이용하는 무기가 새로 개발되었다. 조선초의 기록에 의하면 최무선은 이미 다음과 같은 18가지 화약무기류를 만들었다고 한다.129)≪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4월 임오.

大將軍·二將軍·三將軍·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

 이 이름들은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를 마구 섞어서 기록한 것으로 처음 8가지가 발사장치의 종류라면, 다음 10가지는 그것으로 쏘아 올린 발사체의 종류를 가리킨다. 게다가 석포·화포·화통처럼 발사체를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른 것을 모두 나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이름의 차이는 크기와 성능 등의 차이를 나타내거나 단지 이름만 틀리는 것이 모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태종 때에는 이들 화약무기의 종류에 다시 火車·碗口·地字砲·玄字砲·石彈子 등이 추가되었다. 다시 세종 때에는 小火砲·相陽砲 등이 추가되었고, 특히 먼 거리 사이의 통신을 위한 신호탄으로 信砲의 실험이 행해졌다. 세종 중기 이후에는 다시 鐵信砲·玄字鐵翎·黃字鐵翎·鐵丸·鐵箭·金鏃·水磨圓石 등의 새로운 이름이 보인다. 또 휴대용으로는 細統筒·細走火·小火砲 등이 개발·사용되었다.130) 許善道, 앞의 책, 22·48쪽.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종대에 무쇠를 화약무기에 사용하려는 노력은 총통 자체를 무쇠로 만드는 기술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발사체를 대량으로 철제로 바꾸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발사체의 다양화와 함께 화포의 원료를 구리에서 무쇠로 바꿔보려는 노력이 세종초부터 시도되기도 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관리가 구리 생산이 없는 우리 나라에서 구리만으로 화포를 만드는 것보다는 중국식으로 무쇠를 사용해 보자고 건의하여 시작된 이 연구는 그리 큰 효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18년(1418) 8월의 이 건의는 그 후 여러 차례 계속되었지만 세종 26년(1444) 군기감 제조 李蕆의 말을 들어 보면 아직도 이 일이 달성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천은 무쇠가 단단하여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를 단련하여 주조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고, 농기구를 가지고 연철로 만들어 그것을 다시 무기로 만드는 기술이 북방야인에게 있다 하니 이를 배워 오자고 건의하고 있다. 또 필요하다면 야인에게 그 기술을 배운 鏡城 사람을 역마로 불러다가 기술전수를 받게 하자고 건의하고, 왕은 이를 예조에 분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131)≪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11월 병자.

 또한 세종 15년에는 一發多箭法 즉, 한 번에 화살을 2개, 4개 또는 8개씩 쏘는 방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神機箭의 개발로 극치를 이루며 연속 자동발사장치로 기술이 이어졌다. 문종 원년(1451) 2월에 신기전은 불화살 100개를 쏘는 7층 구조의 연발 발사대를 가진 고도로 발달된 형태로까지 나타났고, 그 가운데에는 소신기전·중신기전·대신기전 등으로 나눠지기도 했으며 이들 각각은 2단 로켓으로 발사되는 방식이었다. 또 이 시기에는 사수를 보호하는 장치에다가 방패까지 장치한 화차가 337량이나 제작되기도 했다. 또한 완구도 대완구·중완구·소완구 등으로 구분되어 제작되고 있었다. 사발 또는 절구 모양의 곡사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완구는 크기에 따라 성능이 달랐지만 대완구로는 지름이 1자쯤의 탄알로 되어 있는 진천뢰를 500보 정도까지 날려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화기는 세종 때를 지나면서 규격이 정해져 간 것으로 보인다.132) 화포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許善道, 앞의 책을 참조할 수 있고, 특히 신기전 등의 현대적 복원 노력으로는 蔡蓮錫,≪韓國初期火器硏究≫(一志社, 1981)를 참고할 만하다.

 세종대의 화약무기의 성능은 동왕 7년에는 일단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개량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그가 직접 주도하여 최근까지 완성된 각종 화포의 성능을 전의 것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데, 모두가 2배 이상의 사정거리를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화약 사용량은 오히려 줄었다고 한다. 세종의 설명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33) 이 표는 許善道, 위의 책, 60쪽에 의한 것이다.
≪世宗實錄≫권 107, 세종 27년 3월 계묘.

종전(태종대) 개량후(세종말)
화포이름 사정거리 사정거리(1발1전) 사정거리(1발4전)
天字화포 400∼500보 1,300보 1,000보
地字화포 500보 800∼900보 600∼700보
黃字화포 500보 800보 500보
架子화포 200∼300보 600보 400보
細화포 200보 500보 없 음

<표>화포의 사정거리

 특히 세종 30년(1448) 9월에는≪銃筒謄錄≫ 1책을 완성하여 관계기관에 배포했다. 이를 배포하면서 세종은 화기는 나라의 비밀로 잘 지키지 않으면 안되니 절대로 아전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 책에는 총통의 제조방법과 화약 사용법 등이 잘 설명되어 있는데, 전에는 그 기술이 정교하지 못하여 화살이 기껏해야 200보에서 500보 이상 날기 어려웠으나, 세종 27년 봄 이후에는 화약은 덜 들면서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사정거리를 400보에서 1,500보에 이르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제작방식 등을 그리고 치수를 표시하여 후세에 전하려 한다고 유시하고 있다.134)≪世宗實錄≫권 121, 세종 30년 9월 병신.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흥미있는 기록이 전한다. 세조 12년(1466) 11월 대사헌 梁誠之는 역대 실록을 비롯한 귀한 책들을 다시 인쇄하여 보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총통등록≫만은 불태워 버리자고 한 것이다. 그는≪총통등록≫은 국가의 비밀문서라면서 현재 관계기관에 있는 20여 권의 책 가운데 하나라도 적에게 전해지면 큰 일이니 이를 한글로 써서 남긴 다음 한자로 된 책들은 모두 불태워 없애자고 주장한 것이다. 양성지는 성종 9년(1478)과 성종 13년에도 다시 같은 주장을 하였다. 화포는 국가 기밀인데도 너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면서 20여 권의 예를 들고 이를 한글로 옮긴 다음 나머지 한자본을 모두 태워버리자고 나선 것이다. 화포에 관한 정보가 치수까지 정확하게 적혀 있으니 왜국에 전해질까 걱정스럽다는 것이다.135)≪世祖實錄≫권 40, 세조 12년 11월 을유.
≪成宗實錄≫권 97, 성종 13년 2월 임자.

 이 책에는 모든 병기의 제작법·규격·사용법 등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후 없어져 지금 전하지 않는다. 성종 5년에 나온≪國朝五禮儀≫ 兵器圖說에서 그 대강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군기감에는 16종의 工匠 즉 기술자가 640명 이상이나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숫자는 공장을 가지고 있는 30개 중앙관아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여서 전체의 23%에 해당한다.136) 姜萬吉,<수공업>(≪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356쪽. 그러나 이런 체제로 굳어가는 동안 조선 초기의 화약무기기술은 발달이 정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활발한 발전단계를 거쳐 어느 정도 필요한 화약무기기술에 도달한 다음에는 그 상태의 정상적 화약병기 사용이 그대로 진행되었을 따름이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세조 이후 조선 전기 동안의 화약무기 발달은 그리 눈에 띄는 부분이 없다는 평가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137) 許善道, 앞의 책, 128쪽.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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