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4. 의약과 약학
  • 1) 의약정책
  • (3) 중국 약의 이식과 재배

(3) 중국 약의 이식과 재배

 조선왕조는 국내 향약의 채취와 재배를 권장하는 한편, 이와 함께 외국산인 당재들을 수입하여 국내의 토질에 맞게 그것들을 재배하는 데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麻黃·零陵香·甘草·良薑·胡椒·木香·椰子·柚子·柑子·石榴·木瓜 등이 이식 재배되었고, 전갈도 양육되었다.

 마황은 세종 20년(1438)에 朴洪이 경상도 長鬐縣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앙에서는 의생을 파견하여 그것을 산지에서 정성스럽게 배양하도록 하는 한편, 연해의 모든 관리들에게 마황의 산지를 서서히 알리게 하였다.

 영릉향은 세종 20년에 “典醫監 提調 黃子厚가 제주도산을 잘 말려 쓰면 중국의 것에 대용할 수 있으리라”146)≪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5월 갑진.고 아뢴 기록으로부터 이를 국산화하고자 했던 의도를 살필 수 있다.

 감초는 일찍이 태종 11년(1411)에 “開城留守 李文和가 연전에 씨를 뿌린 감초 한 화분을 올렸다”147)≪太宗實錄≫권 21, 태종 11년 5월 경진.는 기록에서 재배가 시도되었음을 엿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재배는 세종 20년부터였다. 즉 전라·함길 양도에서 왜인이 바친 감초를 감사의 책임 아래 심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감초의 재배는 쉽지 않았다. 성종 3년(1472)에 감초가 잘 자라지 않아 거의 절종되었다고 하였고, 성종 16년에는 감초가 잘 자라지 않는 까닭이 책임을 맡은 수령들이 게을렀거나, 아니면 땅이 척박해서이거나 잡초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척박한 곳의 종자는 차차 옮겨 심도록 하고, 잡초를 베어 없애서 감초를 잘 자라게 하는 대책이 마련되었다. 감초의 재배·육성책은 성종 23년에 나온≪大典續錄≫권 2, 禮典 雜令條에 특별히 명시될 정도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각 도의 감초와 마황의 재배 상황을 매년 한 번씩 내의원 관원과 傳香別監이 조사하여 공조에 보고한 후 내의원에서 장부를 만들고, 이에 따라 수거토록 하라는 것이었다.

 양강은 남해와 동래 지방에서 재배되었는데, 언제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의 수입 약재 중에 이 품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인들이 헌납한 것을 남해·동래같이 온화한 해안지역에서 이식·재배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호초는 귀한 약재였고 중요 무역품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도 열심히 재배하였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성종 13년(1482)에 조선정부는 일본국 사신에게 호초의 종자를 보내주도록 청하였는데, 일본에서는 호초가 자국산이 아니기 때문에 줄 도리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에도 조선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을 통하여 호초를 얻고자 노력하였지만 허사였다. 일본이 이같이 완강하게 호초의 씨앗을 구해 주기를 꺼렸던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이 종자가 그 당시 일본에서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만일 우리 나라에서 호초의 재배에 성공한다면 물품의 교역에서 크게 손해를 보리라는 일본측의 우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향과 야자에 대해 살펴 보면, 성종 25년 琉球 中山府主가 보낸 승려 天章 등이 來憑할 때 가져온 방물 중에 목향 씨앗통 1개, 야자 씨앗 2본, 藤 씨앗통 1개 따위의 묘종을 헌납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묘종들은 당연히 땅의 토질에 따라 적절하게 재배되었을 것이다.

 유자·감자·석류·모과는 세종 때부터 재배되기 시작했다. 세종 8년에 각 도에서 생산되지 않는 유자·감자를 전라·경상도 연변에 재배하여 열매가 맺는 상황을 호조에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세종 10년에는 上林園의 청에 따라 강화부에 유자·감자·석류·모과 등의 과실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전갈은 약초는 아니지만 제약에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전갈이 사육된 사실은 약의 자립정책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된다. 성종 20년 명에 사신으로 간 李孟孫이 왕명으로 살아 있는 전갈 100마리를 얻어 왔는데 이 중 40마리는 내의원에서, 나머지 60마리는 궁궐 안에 두어 따로 기르도록 하였다. 이렇게 두 군데로 나누어 기르도록 한 것은 전갈의 생육에 그만큼 신경을 썼기 때문으로, 전갈 양육에 필요한 적절한 방법을 이맹손으로 하여금 강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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