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Ⅰ. 과학
  • 4. 의약과 약학
  • 6) 다원적인 의료상황
  • (4) 종교적 의료

가. 무속적 의료

 향약이 정리되고, 중국의학이 국가적 사업으로 수용·정리되었다고 해서 조선 전기의 모든 의료가 경험적이며 이론적 체계를 갖춘 의학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 의료의 대종은 巫術的 의료를 포함한 종교적 의료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르다. 무술적 의료는 단지 민간사회에만 퍼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 왕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무격신앙이 행해지기도 했다.

 조선초부터 국가는 단순히 무격을 인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고치는 것의 다소에 따라, 活人署를 유지하기 위해 무격에게 부과했던 巫稅를 경감해 주는 무격 장려법을 시행하였다. 때로는 國巫라는 이름으로 무격을 궁정에 출입시켜 병과 재앙을 물리치고 善神과 善靈을 감동케 하는 주술을 펼치도록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조선초에 더 두드러졌다. 태종 11년(1411)에는 이전부터 있었던 大國祭를 고쳐서 國巫堂으로 존재하게 하였고, 태종 15년에는 東西活人院에 무격을 나누어 배치하여 병자를 치료케 하여 사람을 구하는 정도에 따라 상벌을 내리도록 하였다. 세종 11년(1429) 열병이 유행하였을 때에는 醫生 및 무격들의 구료성적을 고찰하여 게으른 자는 죄를 논하고, 사람을 많이 구한 자에 대해서는 연말에 무세나 부역을 덜어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무격의 장려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조선 중엽까지도 계속되었다. 성종 5년(1474)에는 서울 바깥지역에서 유행병으로 사망자가 많이 생기자 의생과 무격으로 하여금 약재를 갖추어 구휼케 한 적도 있으며, 이같은 구휼사항은 아예 법조문으로 명시되기까지 하였다. 성종 16년에 나온≪경국대전≫ 권 3, 禮典 惠恤條에 “서울에서는 예조가 무격의 소속을 기록하여 활인서에 나누어 배치하도록 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읍에서 소속을 기록하여 병인을 치료토록 할 것”이라고 명시되었다. 또한 중종 때에는 무녀 돌비가 국무라 칭하고 궁정에 출입하였으며, 연산군 때에는 星宿廳에 국무를 두는 한편, 활인서에 무녀를 두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가하였다.

 이렇듯 무속에 의한 치료가 사회 전체로 널리 시행되었지만, 이는 조선왕조가 이념적으로 표방한 유학과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세종 19년에는 국무 이외의 모든 무녀를 성 밖으로 쫓아낸 적이 있으며,≪경국대전≫ 권 5, 刑典 禁制條에도 서울 사대문 안에 거주하는 무격의 죄를 논하고 있다. 중종 11년(1516)에도 무녀를 성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淫邪를 깨기 위하여 무세를 정지하고 무격을 활인서에서 쫓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모두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동서활인서와 歸厚署의 구료경비가 모두 무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 전기의 사회는 한편으로는 이론적 의학과 경험적 의료를 이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더 넓게 禳病·逐鬼·辟邪 등의 무술적 술법을 治病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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