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1. 농업과 농업기술
  • 2) 농업기술
  • (5) 경법과 쟁기

(5) 경법과 쟁기

 ≪농사직설≫에서는≪제민요술≫의 그것과 같이 ‘耕地’편이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는 쟁기질이 영농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202)≪農事直說≫ 耕地. 이처럼≪농사직설≫은 이미 소에 의한 쟁기질을 전제로 한 농법으로 경법을 논하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미≪농사직설≫의 경법은 한국의 토양이 중국의 그것보다 토양저항이 크다는 점을 전제로 하며, 그리고 그러한 기경지 외에도 이 시대에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던 황무지의 개간에 쟁기질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추경과 춘경, 深耕과 淺耕, 火耕과 掩耕의 구분이 명확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벌써 쟁기질을 파종보다는 시비작업이나 熟治·覆種 등의 摩田작업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었다. 再耕 이상을 행한 작물의 경우에 있어 초경은 有鐴犁에 의한 平坦耕이었고 재경은 주로 파종구 작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초경으로 행해진 평탄경과 녹비의 엄경 등에서는 有鐴反轉犁가, 高田작물의 작묘에는 耕畦犁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개간지나 나머지 다수 작물의 파종구 작성에서는 作條犁가 사용되어 兩側撥土耕을 행하였다.

 이 시대의 가장 일반적인 경법은 바로 ‘초경∼재경’을 행한 것인데, 특히 모든 벼와 삼·보리·밀 등 9개 작물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초경만 행한 작물도 7종이나 되었으며 쟁기질을 전혀 행하지 않은 작물도 4종이었으므로 이 시대는 대체로 조방적인 경법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족종법’으로 파종한 기장·조·콩·팥 등은 ‘초경∼재경·추경’을 행하는, 당시로서는 극히 예외적이라 할 정도의 집약적인 경법을 행하였다.

 한편≪訓蒙字會≫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 가장 널리 사용된 쟁기는 바로 파종구 작성에 쓰인 볏(鐴)이 없는 作條犁인 ‘발외[把犁]’였는데 이는 淺耕犁였으며 주로 양측발토경을 행하였다.203)≪訓蒙字會≫ 器皿. 이처럼 작조려가 가장 널리 사용된 쟁기(耕犁)였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파종법이 주로 條播法이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 시대 농업의 조방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두둑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던 作畦用 쟁기로서는 鏵와 같은 쟁기날을 가진 ‘’이 존재하였다. 추경·엄경, 그리고 삼밭의 ‘縱三橫三’경에는 유벽반전려가 동원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의 有鐴犁인 ‘보’는 ‘狹小鐴犁’라 불릴 정도로 쟁기날이 좁았을 뿐 아니라, 두 마리 소에 의해 견인되었다. 이 ‘보’쟁기는 일제시대까지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볏을 떼어낸 것은 ‘가데기’라고 불려졌다 한다.204) 李鎬澈,<農具와 水利施設>(앞의 책), 326∼327쪽.

 한편 이 시대에는 축력을 이용한 쟁기들 외에도 다수의 인력에 의한 수경구가 사용되고 있었다.≪훈몽자회≫ 등에서 나타나는 ‘삷·가래·가래·보·卦伊’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인력 수경구들은 축력이나 대농기구를 구비하지 못한 소농민층에 의해서 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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