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1) 금속활자의 주조 및 조판인쇄
  • (1) 관주활자

(1) 관주활자

 태종 3년(1403)에 설치한 鑄字所에서 첫번째로 주조한 것은 癸未字였다. 그 印本을 보면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興德寺에서 주조하여 찍은 寺鑄활자본보다 한 단계 앞선 개량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주조방법은 여전히 치졸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2년(1420)에 이를 개주, 庚子字를 주성하였는데 그 주조방법이 크게 개량되었다. 세종 16년에 이를 다시 개주하여 甲寅字를 주성하였는데 이 때 창의적인 개량이 이루어져 마침내 조선의 주자인쇄술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듯 절정에 이르렀던 중앙관서의 활자 주조방법은 成俔의≪慵齋叢話≫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210) 成俔,≪慵齋叢話≫권 7, 鑄字之法. 이를 바탕으로 하고 鑄字跋 등 다른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 그 주조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제일 먼저 주조하려는 활자의 글자본을 정한 다음, 찍고자 하는 책에서 필요한 수의 크고 작은 글자를 조사하여 글씨를 잘 쓰는 자에게 써내게 하였다. 이미 간행된 책의 글자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는 그 책에서 필요한 수의 크고 작은 글자를 가려내고 부족한 글자는 달필가가 닮게 써서 보충하였다. 글자본이 마련되면 나무판에 붙이고 각수로 하여금 정교하게 글자를 새기게 하였는데, 그 나무는 대개 黃楊木을 사용하였다. 글자가 다 새겨지면 하나씩 실톱으로 잘라내어 네 면을 잘 다듬고 크기가 일정하도록 정밀하게 손질하였다. 이 때 나무판 만들기와 활자를 잘라내는 일은 목공장이 맡고, 글자를 새기는 일은 刻字匠이 맡았다.

 한편 활자를 주조하기 위하여 쇠거푸집에 갯벌의 고운 해감 흙을 판판하게 깐 뒤 나무에 새긴 어미자를 낱낱이 박고 잘 다져 글자획이 옴폭 들어가게 자국을 냈다. 그 다음에 그 자국으로 쇳물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홈 길을 내기 위하여 가지쇠를 박았다. 위 거푸집을 씌우고 다져 그 쪽에도 자국을 낸 다음, 어미자와 가지쇠를 빼냈다. 그리고 두 개의 거푸집을 합쳐 하나의 구멍으로 녹인 쇳물을 쏟아부어 홈길을 따라 옴폭 찍힌 자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쇳물이 식어 굳으면 거푸집을 분리시키고 가지쇠를 들어내어 매달린 활자를 두들겨 하나씩 떨어지게 하거나 떼어낸 다음, 활자 하나하나를 줄로 깎고 다듬어서 깨끗하게 손질하여 완성시켰다.

 이러한 방법으로 일정한 어미자를 정교하게 새겨 필요한 수만큼 거푸집의 해감 흙에 자국을 내서 활자를 부어내기 때문에 글자모양과 크기를 일정하게 주성할 수 있었다. 이것이 조선시대 중앙관서의 고도로 발달된 금속활자 주조방법이었다.211) 千惠鳳,≪韓國典籍印刷史≫(汎友社, 1990), 359∼361쪽.

 조판인쇄에 있어서도 단계적인 발전을 하여 갑인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계미자는 네 모퉁이를 고정시킨 틀의 위 아래 변에 계선을 고착시킨 동판을 마련하였다. 그 판의 각 계선 사이의 바닥에 밀랍을 깔고 그 위에 활자를 배열하였다.212)≪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정축. 활자 배열이 끝나면 다음으로 열을 가해 밀랍을 녹인 뒤

 판판한 철판으로 위에서 균등하게 눌러 활자면을 평평하게 하고 식힌 후에 인쇄하였다. 활자의 뒷면은 타원형으로 옴폭 들어가게 한 고려의 㠅 활자와는 정반대로, 그 끝을 송곳처럼 뾰죽하게 개량하여 그것이 밀랍 속에 깊숙이 박혀 움직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만든 솜씨가 아직 미숙하여 옆줄이 맞지 않고 윗자의 아래획과 아랫자의 위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또 작은 활자인 경우는<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에서 볼 수 있듯이 한두 자의 드나듦이 생겼다. 그 뿐만 아니라 인쇄 도중 활자가 자주 움직이고 기울어져서 수시로 밀랍을 녹여 부어 바로잡은 다음 인쇄하여야 했기 때문에 밀랍의 소비량이 많으면서도 하루의 인출량은 전지로 겨우 서너 장밖에 찍어내지 못하였다.213)≪世宗實錄≫권 11, 세종 3년 3월 병술. 그리하여 세종이 즉위하자 계미자의 단점을 개량해서 활자 크기가 그보다 훨씬 작으면서도 가지런하게 만들고 인판틀 또한 판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 판을 짤 때 활자와 서로 잘 맞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인쇄 도중 밀랍을 녹여 사용하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고 끝까지 잘 인쇄되어 하루의 인쇄능률은 20여 장을 밀어낼 수 있었다.214) 위와 같음.
≪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정축.
卞季良,≪春亭集≫권 12, 大學衍義鑄字跋.
徐居正,≪東文選≫권 103, 卞季良鑄字跋.
계미자의 하루 인쇄능률보다 4∼5배나 증가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와 같이 인쇄술이 대폭 개량되었지만, 오늘날 전래되고 있는 여러 경자자본을 조사해 보면 그 인본이 십중팔구는 매 반엽 11항 21자의 고착된 인판을 사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옆 줄이 정연하게 일직선을 이루지 못한 미숙한 조판 상태였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를 또다시 개주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 당시 천문기기 제작에서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일류 기술자를 총동원하여 정밀하게 만들어 냈기 때문에 큰 활자와 작은 활자의 크기를 한결같이 똑같게 그리고 네모를 아주 평정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 결과 조판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대형의 인판을 사용하면서도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막론하고 옆 줄이 정확하게 일직선을 이루고 또 글자 사이의 공간이 일정하게 유지되어 인본이 매우 늠름하고 정연·정교하였다.215)≪眞西山讀書記乙集 大學衍義≫甲寅字本 卷末 金鑌鑄字跋.
≪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정축.
그리고 식자에 있어서는 전혀 밀랍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대나무 등으로 빈 데를 메우면서 판을 짠 다음 인판틀의 마지막 한 변을 닫았기 때문에 틀의 네모 중 어느 구석이 떨어져 있었다. 이것이 곧 완전한 조립식 판짜기이며, 갑인자에 이르러 인쇄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다.216)≪世宗實錄≫권 69, 세종 17년 8월 계해.
成俔,≪慵齋叢話≫권 7, 活字.
그 결과 하루의 인쇄능률이 경자자의 두 배인 40여 장으로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세종대의 발달한 활자인쇄술로 말미암아 조선 말기까지 실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종류의 활자가 주성·조판되어 책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들 활자의 모양은 네모를 평정하게 만들어 조립식으로 판을 짠 것이 있는가 하면 활자의 등을 둥글게 파서 동의 사용을 절약하는 한편 밀랍이 꽉 차서 움직이지 않도록 한 고착식 판짜기를 병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밀랍은 참기름과 같은 半乾性油와 피마자기름과 같은 不乾性油를 배합, 굳지 않게 하여 열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활자를 손쉽게 밀착시키는 단계로 개량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금속활자 인쇄에 있어서 판짜기 방법이 변천되어 왔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갑인자 이후 관서의 조립식 조판인쇄였다.217) 成俔,≪慵齋叢話≫권 7, 列字分擔者. 관계문헌을 참고하여 그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으로 만든 인판틀(우리)을 준비하였다. 그 틀은 적어도 두세 개를 마련하여야 하나, 일손에 여유가 있을 때에는 인쇄업무를 분업적으로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대개 대여섯 개 정도 마련하였다.

 인판틀은 네 변에 둘레를 돌리고 중간에 판심을 마련하되 그 사이에 어미와 흑구 등과 같이 접지와 장책의 기준이 되는 장식을 넣었다. 또 각 줄마다 칸막이를 하는데 필요한 계선을 마련하였다. 이렇듯 인판틀이 준비되면 찍고자 하는 원고 또는 책의 본문을 한자한자 차례로 불렀다. 글자를 부르는 자를 唱準이라 하였으며, 글자를 아는 자가 맡았다. 원고 또는 책의 본문을 부르면 활자를 찾아내어 그 원고나 책의 글자 위에 벌여 놓았다. 그 일은 활자를 간직하고 있는 守藏이 맡았으며, 관서에서는 대개 나이 어린 공노가 맡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擇字匠을 두어 그 일을 맡게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文選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 때 골라 놓은 활자가 한 장 분이 되면 판에 올려 놓는데 이를 판올림 또는 上版이라 하며, 오늘날의 식자에 해당한다. 한판의 활자 배열이 다 끝나면 대나무 조각 또는 파지 등으로 활자를 괴거나 틈에 끼워 판판하면서 직각으로 잘 들어 맞아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또 활자 다지게 등으로 활자를 다져 고르게 하거나 평판으로 활자면을 눌러 수평이 되도록 바로잡는 작업을 하였는데 이 일을 맡아 보는 이를 均字匠이라 하였다. 이들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균자장이 완전하게 판을 짜놓으면, 먹솔로 활자면에 먹물을 고루 칠하되 쇠활자인 경우는 쇠붙이에 잘 묻는 기름 먹물을 써야 했다. 먹물을 칠한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놓고 말총 또는 털뭉치 등의 印髢에 밀랍 또는 기름과 같이 잘 미끄러지는 물질을 칠하여 종이 위를 위아래로 고루 문지르거나 비벼서 밀어 냈다. 그러나 쇠활자의 인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종이를 약간 축여서 습기가 가시면 두 사람이 종이를 판판하게 잡아당겨 활자면에 구김살없이 붙여 한장한장씩 밀어냈던 것이다.218)≪正祖實錄≫권 44, 정조 20년 3월 계해. 이 일을 맡은 이를 印出匠이라 하였다.

 애벌을 밀어내면 朱色으로 오자와 탈자를 비롯하여 거꾸러진 것, 비뚤어진 것, 희미한 것, 너무 진한 것 등을 바로잡고 교정자와 균자장이 서명을 하였다. 이 때 인쇄작업의 감독을 맡은 이를 監印官이라 하였으며, 校書館員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본문의 교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監校官이 지는데, 감교관에는 별도로 문신이 임명되었다.

 교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면 그 책의 머리에 ‘校正’이라는 도장을 찍어 그대로 필요한 부수를 찍어 내게 하였다.≪經國大典≫ 工典에는 활자인쇄에 관계되는 교서관 소속의 장인과 인원수를 규정하였고,219)≪經國大典≫권 6, 工典 校書館. 그 뒤에 나온≪大典後續錄≫에서는 벌칙까지 마련하였다.220)≪大典後續錄≫권 3, 禮典 雜令.

 감인관·창준·수장·균자장은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매를 맞고, 한 자가 더 틀릴 때마다 한 等을 더 벌 받았다. 인출장은 한 권에 한 자가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글자가 있을 때 30대의 매를 맞고 한 자가 더 할 때마다 벌이 한 등을 더 했다. 교서관원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 파직되고, 창준 이하의 장인들은 매를 때린 뒤 50일의 근무일자를 깎는 벌칙이 적용되었다. 이와 같이 활자판을 짜서 인쇄하는 작업에 엄격한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서의 활자본이라면 오자와 탈자가 별로 없고 인쇄가 정교한 것이 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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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관주활자 (세종16년(1434)에 주조한 갑인자로 찍은≪대학연의≫)
<도판 1>관주활자 (세종16년(1434)에 주조한 갑인자로 찍은≪대학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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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조선 관주활자 주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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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조선 관주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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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조선 관주활자 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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