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3) 목판의 판각 및 인쇄

3) 목판의 판각 및 인쇄

 우리 나라에서 목판인쇄는 일찍이 삼국시대에 싹터 전파된 이후 고려시대에 고도로 발달하였고, 그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목판에 판각하여 인쇄해내는 과정 전반에 대하여 폭넓은 인쇄사적 사례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저작의 내용을 새기는데 필요한 나무판을 마련하여야 했는데 그 재료는 다양하였다.≪林園十六志≫ 怡雲志에서는 대추나무·배나무가 가장 좋으며 가래나무는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228) 徐有榘,≪林園十六志≫권 6, 怡雲志 7, 圖書藏訪 下, 鋟印 鏤版法(서울大學校 古典硏究會, 1960), 386쪽. 그러나 대추나무와 배나무는 중국에서 주로 사용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는 과수목으로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대개 산과 들에 자생하고 있는 교목인 가래나무를 사용하였다.229) 李睟光,≪芝峰類說≫권 3, 制度 鑄字印書.
李裕光,≪林下筆記≫권 17, 文獻指章編 7, 木板鑄字之辨.
그 밖에 박달나무·돌배나무·산벗나무·자작나무·후박나무 등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30)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上, 권 24, 鑄字印書辨證說.
朴泳洙,<高麗大藏經板의 硏究>(≪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 44쪽.
金斗鍾,≪韓國古印刷技術史≫(探求堂, 1974), 82쪽.
이들 나무는 도처에서 손쉽게 입수할 수 있고 또 경제적이어서 책판용 재료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판각과정은 먼저 입수하기 쉬운 나무를 구하여 나무판 작업부터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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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8>목판의 제작·판각·인쇄 및 활자의 조판 장면
<도판 8>목판의 제작·판각·인쇄 및 활자의 조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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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나무판을 켜서 바다의 짠물에 일정한 기간 담갔다가 새기기 쉽게 나무결을 삭이는 작업을 하였다. 짠물에 담글 수 없는 경우는 웅덩이의 민물을 이용하여 결을 삭이는 작업을 하였다. 그런 다음 잘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뻐개지지 않게 하는 처리과정을 밟았는데,231) 徐有榘,≪林園十六志≫권 6, 怡雲志 7, 鏤版法. 양질의 책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밀폐된 곳에 넣고 쩌서 진을 빼고 살충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좋다. 현재 海印寺 藏經板殿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완전한 처리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7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상태가 양호하다. 그런 처리과정을 거치지 않은 책판들은 반세기만 지나면 판이 뒤틀리고 뻐개지고 마손되어 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폐기된 것이 많다. 판각용 나무판이 마련되면 목수가 판 양쪽 표면을 대패질하여 반드럽게 하고 양쪽가에 마구리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처리과정을 鍊板作業이라 일컬었으며, 사찰판 중에는 간행기록의 다음에 그 일을 책임 맡은 이의 이름과 목수의 이름을 표시한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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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9>판각된 책판과 밀어낸 인쇄물
<도판 9>판각된 책판과 밀어낸 인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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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처리한 판목에 저작의 내용을 새기는 절차는 먼저 판각하고자 하는 크기의 匡郭, 계선 및 기타의 판식을 갖춘 套式板을 만들어 얇고 질이 좋은 楮紙로 필요한 수만큼 밀어내서 글씨를 잘 쓰는 달필가나 명필가가 저서의 내용을 깨끗하게 정서하였다. 이를 판각용 정서본, 개판용 정서본이라 일컬었고, 줄여서 판서본이라 하고, 글씨 쓴 자를 판서자라 하였다. 판서본의 명칭은 그 밖에도 상재용 정서본 또는 등재용 정서본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전적에서 달필 또는 명필의 판서자가 판각용 정서본을 마련한 사례를 살펴보면 초기의 명필가인 成達生과 成槪 형제를 비롯하여 省琚·空菴·黃振孫 등이 독특한 필법으로 부드럽고도 아름답고 힘있게 썼다.232) 千惠鳳,<朝鮮前期 佛書板本>(≪韓國書誌學硏究≫, 三省出版社, 1991), 674∼686쪽.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새긴 목판본은 역시 당대의 명필가인 姜希顔·鄭蘭宗·成任·安惠·黃五信·柳睆·朴耕 등이 총동원되어 육중한 송설체의 둥근 필의로 해정하게 큰자·중간자·작은자를 늠름하고 아름다우면서 조화있게 정서하였다.233)≪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漢字本) 上·下, 刊經都監本 刊記.
≪牧牛子修心訣諺解≫(國譯本), 刊經都監本 刊記.
판서자의 이름은 사찰본의 권말에도 표시된 것이 적지 않다.

 판각용 정서본이 마련되면 각 책장을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고 비쳐 보이는 반대 글자체의 글자획과 판식을 각수가 그대로 새겨냈으며, 한 판의 새김을 다하면 판심에 제목과 권·장의 차례를 새기고 판 끝 또는 적당한 곳에 간행기록과 각수 이름 등을 새겨 한 판의 판각을 마무리하였다.

 한편 이미 간행된 책을 바탕으로 삼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 경우에는 간행된 책을 해책하여 책장을 하나하나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이되, 책장이 두꺼워 글자획이 잘 비쳐 보이지 않는 것은 종이를 축축하게 축인 다음 몇 겹을 벗겨내고 그대로 충실하게 새겨냈다. 이것을 飜刻本이라 일컬었다. 일본에서 일컫는 覆刻本에 해당한다. 일류 각수가 정교하게 새긴 경우는 글자체와 판식 등의 형태가 바탕이 된 책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거듭 번각한 경우는 첫번째의 번각보다 글자체가 정연하지 못하고 글자획의 굵기에도 차이가 심하여 판각이 정연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바탕이 된 책의 글자 원형만은 그런대로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번각본 중 고려판본에는 중국의 송판본·원판본을 바탕으로 번각한 것이 적지 않았고, 조선초에도 송판본·원판본·고려판본을 많이 새겨냈지만, 뒤에는 활자본을 바탕으로 새겨낸 것이 많아졌다. 특히 활자본의 번각은 조선 말기까지 성행하였다. 따라서 활자본과 그 번각본의 감정에 있어서 혼돈과 착각을 일으키는 사례가 빈번한데, 이런 경우는 바탕이 된 책과 번각본을 대사하여 새김의 흔적, 글자체의 균정도, 판식상의 여러 형태, 종이 상태와 지질 등에서 차이점을 찾아내어 이판임을 가름해야 한다. 이와 같이 책을 번각하여 만들게 되면 경비와 시간이 절약되고 오자와 탈자 없이 바탕 책의 본문을 그대로 재생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바탕 책이 판각에 사용되어 없어지는 것이 큰 단점이었다. 우리 나라의 귀중한 전적이 후세에 별로 전래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렇듯 번각이 성행된 데 기인한다 하겠다.

 목판의 새김이 끝나면 본문을 검토하여 잘못이 발견되면 그 곳을 도려내고 다시 새겨 메웠다. 이를 象嵌이라 하였다. 일본에서 일컫는 埋木에 해당한다.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새긴 국역본≪능엄경≫ 중 잘못된 곳을 성종 때 대비들이 찍어낼 때는 인장에 고쳐 새겨 종이에 찍어 붙여서 바로잡았다. 그런데 연산군 원년(1495) 원각사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인경할 때는 그 잘못된 곳을 도려내고 나무로 메운 다음 정식으로 고쳐 새겨서 찍어냈던 것이 그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234)≪國寶≫12, 書藝·典籍(藝耕産業社, 1985), 162·282쪽.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과정을 거쳐 새겨낸 판을 목판·각판·책판이라 일컫고 불경인 경우는 경판이라 일컫기도 한다.

 조선시대의 관서와 왕실에서 찍어낸 목판본을 보면 새김이 정교하고 먹색이 시커멓게 윤이 나고 종이의 질이 좋아 책의 품이 한결 돋보인다. 관판과 왕실판은 명필가나 달필가들이 판서본을 정성껏 쓰고 일류 각수들이 동원되어 정각하였으며, 인쇄할 때는 좋은 먹물과 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먹에는 송연먹과 유연먹이 있는데,235) 徐命膺,≪攷事新書≫권 14, 造墨法. 송연먹은 소나무를 태워 만든 그을음과 아교를 녹이고 이를 섞어서 찧어 만든 것으로 먹색이 진하고 선명하며 아교가 많이 들어간 것은 특히 윤이 났다. 관판과 왕실판 목판본의 먹색이 유난히 시커멓게 윤이 나는 것은 질이 좋은 송연먹을 썼기 때문이었다. 유연먹은 각종 기름을 태워 만든 그을음과 아교를 녹이고 이를 섞어서 찧어 만든 것으로 먹색이 희미한 편이나, 걸지 않아 필사용에 좋고 또한 쇠붙이에 응고력이 좋아 금속활자본의 인쇄에도 적합하였다. 그러나 목판본의 인쇄에는 진하지 않고 희미하여 송연먹만 못하다는 평이다.236) 李秉岐,<韓國書誌의 硏究(下)>(≪東方學志≫5, 1961), 9∼10쪽.
千惠鳳, 앞의 책(1990), 206∼207쪽.
책을 찍어낼 때는 먹을 물에 담가 풀어지게 한 다음 먹물 그릇에 담아 두고 썼는데, 여기에 술과 같은 알콜성 물질을 섞어 사용하는 지혜를 아울러 개발하였다. 술과 같은 알콜성 물질을 섞으면 먹물이 골고루 침투하면서도 증발이 빨라 번지지 않고 또 아교의 응결을 촉진시켜 윤기가 나기 때문이었다.237) 柳鐸一,<韓國木活字 印刷術에 對하여>(≪民族文化論叢≫4, 1983), 120∼122쪽.

 종이는 주로 양질의 닥을 사용하였다. 닥종이는 닥껍질을 원료로 하여 먼저 삶고 고아 찧은 다음 표백하여 풀닥을 섞어 치밀한 대발로 떠서 만들었다. 壯紙와 같은 상품의 질이 되면 두껍게 떠서 풀까지 먹여 다듬이질하였으므로 반드럽고 빳빳하고 희고 윤이 나며 질겨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이를 白硾紙라 일컬었으며,238)≪三柳軒雜識≫寫本.
≪廣才物譜≫寫本.
중국에서는 繭紙라 애칭하기도 하였다.239)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19, 帋品辨證說. 오늘날 전해지는 관판과 왕실판의 목판본에는 이러한 상품 지질의 책이 매우 많다. 그러나 닥이 부족한 경우는 관판본이라 하더라도 보리집·지푸라기·창포잎·버드나무껍질과 잎사귀, 삼대껍질·대나무껍질과 잎사귀·율무나무·소나무잎사귀, 뽕나무껍질·칡껍질 등을 섞어 만든 劣品의 닥종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240)≪世宗實錄≫권 65, 세종 16년 7월 임진.
≪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경진.
≪世祖實錄≫권 8, 세조 3년 6월 2일 임자.
또한 순고정지를 사용하기도 하고241) 刊經都監,≪國譯佛書≫初印本. 지방 관판본과 지방에서 나온 책은 桑紙를 사용하기도 하였다.242) 咸鏡道 北黃紙를 그 예로 드는 자도 있다.

 목판은 책판을 만드는 데 경비와 시간 그리고 노력이 많이 들면서도 한정된 하나의 문헌만을 찍어내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러나 한번 책판을 만들어 놓으면 통풍이 잘되는 선반이나 높은 누각에 잘 보관·관리하면서243) 徐有榘,≪林園十六志≫권 6, 怡雲志 7, 鏤板法. 필요한 때 수시로 다량으로 찍어 오래도록 널리 펴내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활판인쇄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다량으로 그리고 오래도록 읽혀지는 책들은 모두 목판인쇄로 찍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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