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4) 서적의 인쇄
  • (2) 국왕 및 왕실판본

(2) 국왕 및 왕실판본

 조선시대에는 국왕을 위시한 왕비·대군·군·공주·옹주·여러 빈들이 국시에 위배됨을 알면서도 사적으로 불전에 속죄하거나 공덕을 쌓기 위하여 또는 살아 있는 자의 수복을 기원하거나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불경을 간행하였다. 이를 국왕 및 왕실판이라 일컬으며, 14세기말부터 15세기말까지 1세기여에 걸쳐 계속되었다.

 조선왕조는 건국하자 숭유배불정책을 국시로 삼고 그 실천에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255)≪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 기해 司憲府上疏. 오랜 세월에 걸쳐 뿌리 깊게 박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일조일석에 말살시킬 수는 없었다. 숭유억불로 민심의 일변을 꾀했던 태조조차 자신이 개국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인명을 살상시킨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그 죄과를 씻고자 마침내 불사에 기울어졌다. 그리하여 태조는 원년(1392)부터 太上王으로 승하한 태종 8년(1408)까지 거질의≪大藏經≫256)≪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2월 경진. 및 6백권의≪大般若波羅蜜多經≫의257) 權近,≪陽村集≫권 22, 跋語類, 大般若經跋. 인출을 비롯한 사경 조성,258) 權近,≪陽村集≫권 22, 跋語類, 別願法華經跋語.
≪東文選≫권 103, 跋 別願法華經跋語.
그리고≪大佛頂首楞嚴經≫·≪妙法蓮華經≫등을 간행하여259) 千惠鳳,<朝鮮前期佛書板本>(앞의책, 1991), 674∼676쪽. 불전에 참회하고 멸죄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정종과 척불의 실행을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히 다짐했던 태종조차도 태상왕의 명복과 천도를 빌기 위하여 각종 불경을 寫成 또는 인출하고260) 權近,≪陽村集≫권 22, 金書妙法蓮華經跋. 부왕의 忌辰 때마다 법회를 열어 6백권의≪대반야바라밀다경≫의 轉經을 예외없이 실시케 했다.261)≪太宗實錄≫권 19, 태종 10년 5월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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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1>세조 5년(1459) 간행의 왕실판 목판본≪월인석보≫권 8
<도판 11>세조 5년(1459) 간행의 왕실판 목판본≪월인석보≫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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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도 처음에는 불교를 멀리하는 정책을 썼으나, 중년부터 점차로 관심을 갖고 여러 불사를 묵인하기 시작하였다. 중궁 昭憲王后가 돌아가자 명복을 빌기 위해 사경과 전경을 하게 함은 물론262)≪世宗實錄≫권 111, 세종 28년 3월 을미·5월 갑오.≪釋譜詳節≫을 엮어 번역케 하고 그것을 보고 읊은 찬불가인 국한문판≪月印千江之曲≫을 한글활자와 갑인자로 우아정교하게 찍어내게 했다.≪석보상절≫의 서문이 세종 29년(1447) 7월 首陽大君에 의해 쓰여졌으니≪월인천강지곡≫은 그 무렵에 인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우리 나라 국한문 불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최초의 한글활자본인 점에서 그 가치가 막중하게 평가되고 있다.263)≪文化財大觀≫8, 寶物 6,<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권 上).
≪國寶≫12 書藝·典籍,<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권 上).
세종은 말년에 內佛堂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이 때 사리 출현의 상서가 있었음을 적은≪舍利靈應記≫가 동왕 32년에 갑인자로 인출되었다.264)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硏究所,≪第4回 韓國大藏會李朝前期佛書展觀目錄≫(同硏究所, 1965), 80쪽. 또 동궁의 수종질환의 치유를 불전에 기원하기 위하여 그 해 2월에≪大方廣佛華嚴經≫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妙法蓮華經≫을 갑인자로 찍어내기도 하였다.265) 千惠鳳, 앞의 책(1990), 160쪽.

 세종 4년에는 태종의 넷째 왕자인 誠寧大君과 元敬王后의 천도를 빌기 위해 成達生 형제에게 쓰게 한≪묘법연화경≫을 간행하였다.266)≪妙法蓮華經≫跋文. 세종 30년에는 孝寧大君이 조카인 安平大君과 더불어≪묘법연화경≫을 판각하였는데 권말에 안평대군이 정성껏 써서 새긴 발문이 붙어 있어 특히 서예인들의 이목을 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에 안평대군과 더불어 부왕의 불서 편찬인행과 불교행사에서 늘 주동적 구실을 해왔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는 불서의 인쇄를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세조의 불서 인쇄는 동왕 3년(1457) 왕세자(추존;德宗)를 잃은 때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죽은 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는 친히≪金剛經≫의 正文을 써서 字本으로 丁丑동활자를 주성케 하여≪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를 찍어냈고 또한≪永嘉眞覺禪師證道歌註解≫를 활자로 찍어냈다. 그리고 內經廳을 설치하고 저명한 승려와 유신을 모아 불경을 교정시켜≪능엄경≫·≪法華經≫·≪飜譯名義≫등을 인출케 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대장경≫1부를 비롯한≪註華嚴經≫·≪地藏經≫·≪懺法≫을 이미 새긴 경판에서 각각 14부를 인출하고 또 당대의 명필가인 姜希顔·成任·趙瑾·任擇·安惠 등을 동원하여≪법화경≫의 金泥 寫成에 이어≪법화경≫·≪지장경≫·≪梵網經≫·≪起信論≫·≪普賢行願品≫을 각각 1부씩 墨筆 사성케 하였다.267)≪妙法蓮華經≫卷末.
≪世祖實錄≫권 9, 세조 3년 9월 계해·11월 갑신.
≪永嘉眞覺禪師證道歌註解≫“天順元年(세조 3;1457) 九月上澣…金守溫奉敎謹跋”.
千惠鳳,<丁丑字考>(≪歷史學報≫35·36, 1967), 269∼291쪽.

 세조는 또 동왕 4년에 거질의 海印寺版≪대장경≫을 무려 50부나 찍어 국내의 名山福地에 위치한 사찰에 봉안하고 불법을 전교하는 데 쓰게 했다.268)≪世祖實錄≫권 8, 세조 3년 6월 임자·무오 및 권 13, 세조 4년 7월 임자.
印成大藏經 跋.
세조의 이러한 적극적인 불서의 인쇄 활동은 마침내 불교경전을 국역인출하는 단계로 이끌었다. 그 첫 사업은 자기가 부왕을 도아 주동적 구실을 하여 엮어 인출한≪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대폭 증보해서 새로 간행해 내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세조 5년에 상재된≪月印釋譜≫이며269)≪月印釋譜≫권 1, 喜方寺板 御製月印釋譜序.
千惠鳳,<새로 發見된 初槧本 月印釋譜 卷第七·八>(≪南溪曺佐鎬博士 華甲紀念 現代史學의 諸問題≫, 一潮閣, 1977), 477∼494쪽.
이 책은 그 뒤에도 여러 사찰에 의해 간단없이 번각 보시되었다.

 이와 같이 토대를 다져온 세조는 불서의 국역 및 간행사업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세조 7년 6월에 마침내 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성종 2년(1471) 12월 폐지되기까지 11년간에 걸쳐 기본 불전의 국역 간행은 물론, 동양학문승들의 연구와 주석인 章疏를 대대적으로 판각해 냈다.270)≪世祖實錄≫권 24, 세조 7년 6월 을유.
≪成宗實錄≫권 13, 성종 2년 12월 임신.
특히 기본 불전의 국역 간행은 언문으로 천시했던 한글을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준 점에서 그 업적이 높게 평가되며,271) 江田俊雄,<朝鮮譯佛典に就いて>(≪靑丘學叢≫15, 1934).
金斗鍾,<刊經都監의 國譯書目>(≪韓國古印刷技術史≫, 探求堂, 1974).
安秉禧,<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인 考察>(≪奎章閣≫3, 1979).
姜信沆,<朝鮮初期佛經諺解經緯에 대하여>(≪訓民正音硏究≫, 別刷物).
동양학문승들의 장소 간행은 간경도감 본사 이외에도 개성부·안동부·상주부·진주부·전주부·남원부에 분사를 두고 수행하여 널리 펴낸 데 그 업적이 크다 하겠다.272) 大屋德城,<朝鮮海印寺經板攷>(≪東洋學報≫15-3, 別刷物).
朴奉石,<義天續藏の現存本に就いて>(≪朝鮮之圖書館≫3-6, 1972).
趙明基,≪高麗大覺國師와 天台思想≫(東國文化社, 1964), 94∼99쪽.
千惠鳳,<朝鮮前期佛書板本>(≪韓國書誌學硏究≫, 三省出版社, 1991), 691∼694쪽.

 이 불서의 국역 및 간행은 세조의 강력한 왕권에 의해 한때 추진된 것으로 관판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국가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다만 왕실과 일부 계층 그리고 서민층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업의 의의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첫째, 귀중한 국어학 자료를 많이 찍어내어 국어학사의 체계화에 크게 기여한 점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국역불전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정음 창제 당시의 한글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문 불전을 국역하여 유통시킨 것은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그 의의가 지대하게 평가된다. 둘째,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주요 불전의 국역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뭇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의 근본이념과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얻어 보기 어려운 동양학문승들의 귀중한 장소를 간행 보급하여 연구자들로 하여금 동양적 불교이념과 사상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을 들 수 있다.

 세조가 재위 14년 만에 질환으로 승하하자 뒤를 이은 예종은 즉위년(1468)에 부왕의 천도를 위해≪禮念彌陀道場懺法≫을 판각하여 극락승천을 기원했다.273)≪禮念彌陀道場懺法≫卷末. 그리고 다음해 봄에는 세종의 5남인 廣平大君의 부인 申氏 慧圓이 부군과 자기 아버지의 靈駕를 위해≪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판각하였고,274)≪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卷末. 그 해 6월에는 세종의 둘째 딸인 貞懿公主가 죽은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지장경≫을 비롯한 많은 불경을 판각해 내기도 하였다.275)≪地藏菩薩本願經≫卷末.

 예종은 그 해 11월에 승하하고 나이 어린 성종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등극하였다. 세조의 비인 貞熹王后가 청정을 하며 세조의 숭불정책을 계승하려 했으나, 유신들의 불경간행 정지를 요구하는 상소가 격심해지자 마침내 간경도감이 폐지되고 왕비들의 불경인출은 뒷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왕비들의 불경인출은 성종 즉위초부터 이루어졌다. 동왕 원년(1470) 4월 정희대왕대비가 승하한 세조·예종·의경왕(추존;덕종)의 극락천도를 빌기 위해 큰자로≪묘법연화경≫을 정서하여 개판하였는데, 당대의 일류 각수들이 총동원되어 나누어 지성껏 새겨냈기 때문에 그 솜씨가 참으로 세련정교하다.276) 大字本≪妙法蓮華經≫卷末. 이 경판은 그 뒤 여러 차례 찍어냈음이 책 권말에 쓰인 인출기록과 墨書識記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277) 千惠鳳,<朝鮮前期佛書板本>(앞의책, 1991), 696∼697쪽. 성종 3년 6월에는 仁粹大妃가 세조·예종·부왕의 극락천도와 정희대왕대비·주상전하·왕비의 壽福康寧을 빌기 위해 무려 29종 2,815부라는 방대한 부수의 불경을 인출하고 단일발문을 작성하여 甲寅小字로 찍어 각부에 똑같이 붙였다.278) 甲寅小字 印出의 金守溫 跋. 그 뒤 잇따라 불경인쇄가 성행하였다. 성종 5년 5월에는 대비들이 성종의 첫 왕비인 恭惠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地藏菩薩本願經≫을 내수사의 출자를 얻어 판각하였다.279)≪地藏菩薩本願經≫卷末. 그 해 8월에는 선왕과 선후의 극락천도를 위해 成任이 큰 글자로 쓴≪예념미타도량참법≫과≪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을 판각하였다.280)≪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卷末. 성종 12년에는 安順王大妃 韓氏가 양조모 辛叔和 妻 金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많은 불경을 찍어냈고281)≪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권 10, 卷末의 墨書印記. 이듬해에는 學祖에게 명하여 세종의 遺命으로 그간 국역 교정해 오던≪金剛般若波羅蜜經三家解≫와≪永嘉大師證道歌南明繼頌≫을 丁丑字와 乙亥字로 찍어냈다.282)≪金剛般若波羅蜜經三家解≫卷末.
≪永嘉大師證道歌南明禪師繼頌≫卷末.

 성종 14년에는 안순왕대비가 정희대왕대비의 극락천도를 위해 사재를 들여 많은 불경을 찍어냈다.283)≪六經合部≫卷末. 그리고 성종 16년에는 인수대비가 성종의 延壽와 魔怨의 消殄을 위해≪佛頂心陀羅尼經≫과≪五大眞言集≫을 판각하였는데, 이들 간본은 새김이 세련정교하여 책의 품이 한결 돋보인다.284)≪佛頂心陀羅尼經≫卷末.
≪五大眞言集≫卷末.
성종 20년 정월에 덕종의 아들 月山大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찍어낸 많은 불경도 인쇄가 정교하여 책의 품이 또한 특출했다.285)≪地藏菩薩本願經≫卷末.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인수대왕대비와 貞顯大妃는 성종의 극락천도를 빌고자 圓覺寺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간인하기 시작하여 연산군 원년(1495) 8월 하순에 마쳤다. 그것은 국역불서 6종, 한역불서 2종 도합 8종 650부이며 그 전체에 걸친 단일발문을 목활자로 찍어 각부의 권말에 똑같이 첨부하였다.286)≪禪宗永嘉集≫권 下, 卷末. 이어 연산군 2년 임금의 내탕금을 얻어 ‘印經字’라는 목활자를 정성껏 만들어 한문본≪天地冥陽水陸雜文≫과 국한문본≪六祖大師法寶壇經≫·≪眞言勸供≫을 찍어냈다.287)≪六祖法寶壇經≫眞言勸供 印經字本. 이 활자본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대비들의 각별한 정성이 깃들여진 인본으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되고 있다.288) 千惠鳳,<燕山君朝의 印經 木活字本에 對하여>(≪趙明基博士頌壽紀念論叢≫, 1965), 197∼210쪽. 원각사의 인경 이후 인경 정지의 소리가 점차 높아졌으며, 그러다가 연산군 10년에 인수대비가 돌아가니 왕실판의 인쇄는 마침내 종지부가 찍혀지고 말았다.

 위에서 살펴본 국왕 및 왕실판본은 국시에 어긋나는 불경인쇄로 적지 않은 물의를 야기시켰지만, 인쇄문화사적인 면에서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지극히 정성을 들여 간인하였기 때문에 그 세련 정교도는 중앙관판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그 중에는 우리의 귀중한 국역본이 많이 들어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막중하게 평가되고 있다. 조선시대 판본을 대표하는 정수작이라 일컬어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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