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4) 서적의 인쇄
  • (3) 사찰판본

(3) 사찰판본

 우리 나라의 목판인쇄는 신라 경덕왕 10년(751) 무렵에 판각된 불국사판≪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고려 초기인 목종 10년(1007)에 판각된 摠持寺板≪寶篋印陀羅尼經≫에 의해 알 수 있듯이, 사찰판에서 싹터 전파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승려를 우대하였으며 또 사원경제가 풍요해지고 왕실·귀족·권신·부호 그리고 일반백성들의 國泰民安을 비롯한 壽福과 追薦을 기원하는 시주불사가 성행함에 따라 사찰판의 판각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게다가 사찰의 승려들이 판각, 인쇄 및 장책의 기술을 체득하여 자력으로 수행할 수 있었고 또 판각용 목재를 주위에서 손쉽게 입수할 수 있었으므로 사찰판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11세기 초기에 거국적 대사업인 初雕大藏經의 조판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고 이후 사찰판의 간행이 각지에서 성행하였는데, 이들 사찰판본은 그 새김이 정교하여 고려관판본을 훨씬 능가하였다.

 조선왕조는 개국하자 숭유억불책을 국시로 삼았기 때문에 고려와 달리 사찰판 인쇄가 크게 위축되었다. 말하자면 고려에서는 사찰판 인쇄가 주도적 구실을 했지만 조선에서는 반대로 관판 인쇄가 정교해서 주도적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사찰판의 인쇄술이 아류로 떨어졌지만, 뿌리 깊이 박힌 불심은 그렇게 일조일석에 바꾸어질 수 없었다. 숭불심에 깊이 젖은 사람들은 여전히 사찰을 찾았고 초기부터 불경을 적지 않게 간인했다.

 오늘날 전래되고 있는 국초 간행의 사찰판본 중, 간행기록이 확실한 것으로 당시의 고승인 無學대사의 주재 아래 태조 4년(1395) 檜巖寺에서 판각한≪人天眼目≫과 동왕 6년에 판각한≪註心賦≫는 고려판본의 번각이었다.289)≪文化財大觀≫8, 寶物 6 (韓國文化財保護協會, 1986), 124·239쪽.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第4回韓國大藏會李朝前期佛書展觀目錄≫(同硏究所, 1965), 48쪽.
정종 원년(1399) 지리산 德奇寺에서 판각한≪高峰和尙禪要≫는 원나라 至正 18년(1358) 吳群의 南禪集雲精舍에서 판각한 것을 입수하여 번각한 것으로 그 판각술이 아류로 떨어진다.290)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위의 책, 68쪽.

 태종 때에는 동왕 5년(1405) 成達生과 그의 아우 成槪가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전라도 두솔산의 安心寺에서≪묘법연화경≫을 판각하였고,291)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위의 책, 2쪽. 동왕 11년 고창현의 文殊寺에서≪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解≫·≪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川老解金剛般若蜜經≫을 판각하였다.292) 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위의 책, 38쪽. 태종 15년 成佛庵에서는≪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重刊하였음이 전래본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293)≪佛說大報父母恩重經≫卷末 刊記. 그리고

 간행처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前安嚴寺 주지인 省琚가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태종 15년에 판각한 소자본≪金剛般若波羅蜜經≫과294)≪金剛般若波羅蜜經≫卷末. 태종 16년 疊峯이 여러 檀越에게 권유하여 시주를 얻어 중간한≪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이 전래되고 있다.295)≪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卷末. 첩봉은 이에 앞서 태종 4년 여름부터 10월 사이에 단월들의 시주를 얻어≪묘법연화경≫과≪불설대보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음이 그의 발문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사찰판본이 나왔지만, 그 중 성달생 형제의 필서를 바탕으로 새긴≪법화경≫과 성거의 필서를 바탕으로 새긴≪금강경≫이 독자적 판본이고 그 밖의 것은 번각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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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2> 세종 25년(1443) 성달생 등이 필서하여, 전라도 화엄사에서 간행한 사찰판≪묘법연화경≫
<도판 12> 세종 25년(1443) 성달생 등이 필서하여, 전라도 화엄사에서 간행한 사찰판≪묘법연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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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때의 사찰판본으로는 동왕 2년(1420) 7월 九月山 長佛寺에서 성거대사가 필서한 소자본에 의거 판각한≪묘법연화경≫과296)≪妙法蓮華經≫卷末. 9월에 고려판본을 중간한≪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이297)≪長壽滅罪護諸童子陀羅尼經≫卷末. 초기의 것들이다. 세종 4년에는 성달생이 仁順府尹 成抑의 요청으로 아우 성개와 함께 필서한≪묘법연화경≫을 개판한 데298)≪妙法蓮華經≫卷末. 이어 세종 6년에는≪六經合部≫,299)≪六經合部≫卷末. 세종 14년에는≪大佛頂首楞嚴經≫을300)≪妙法蓮華經≫昌寧成達生謹跋. 필서한 판서본을 바탕으로 개판해냈다. 그리고 세종 22년에는 위의≪육경합부≫를 또다시 永濟庵에서 인행하였다.301)≪六經合部≫翻刻本 卷末. 세종 25년에는 한 도인의 간청으로≪묘법연화경≫의 필서에 착수하였는데, 눈이 어두어 겨우 제1권만을 자필하고 뒤의 6권 중 제2∼5권은 正郞 任孝仁, 제6∼7권은 그의 사위인 曹楶에게 필서시켰으며 그것이 전라도 華嚴寺에서 판각되었다.302)≪妙法蓮華經≫卷末. 그리고 이전의 간본을 번각한 것으로는 세종 18년 팔공산 桐華寺의≪묘법연화경≫을 비롯하여 세종 28년 가야산 止觀寺에서 번각한≪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과303)≪高麗大學校中央圖書館漢籍目錄≫(同 圖書館, 1984), 10쪽, 貴 211c. 세종 30년 황악산 直指寺에서 번각한≪現行西方經≫이 전해진다.304)≪延世大學校中央圖書館古書目錄≫(同 圖書館, 1977), 79쪽, 現行西方經. 그 밖의 번각본들은 간행기록이 없다. 이 번각본들은 그 바탕책이 고려 때 새긴 것이기 때문에 바탕책과 착각할 염려가 없지 않으므로 감식에 있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위에서 성달생과 성개, 성거의 필서를 바탕으로 한 독자적 판본을 들었거니와, 그 밖에도 崔斯立의 필서본을 바탕으로 새긴≪육경합부≫와 空菴의 판서본을 바탕으로 한≪地藏菩薩本願經≫ 그리고 黃振孫의 필서본을 바탕으로 한≪묘법연화경≫이 전래되고 있다.

 문종·단종대 이후는 우리의 독자적 판본과 기간본을 번각 또는 중간한 사찰판본이 나왔고, 세조·성종대를 거쳐 15세기 말기까지는 이미 새겨진 사찰판, 간경도감판, 국왕 및 왕실판에서 거듭 밀어낸 판본들이 널리 유통되었다. 16세기 이후도 위의 여러 판본은 물론 주자소의 활자판본이 주로 번각되고 간혹 명판본과 청판본이 번각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자성을 띤 사찰판본은 우리 나라 스님들의 어록·시문·잡저술 등의 문집류와 국역불서류가 약간 인쇄되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 전국 각 도의 사찰이 간행한 불서는 여러 도서관과 문고의 장서목록을 비롯한 전시목록, 서지학의 전문지, 연구논문 등에 수록되고 있으며,305) 黑田亮,≪朝鮮舊書考≫(亞細亞文化社, 1972), 40∼92쪽.
金元龍,<有刊記佛書目錄初稿>(≪書誌≫2-1, 1961), 15∼43쪽.
金斗鍾, 앞의책, 399∼437쪽.
李鍾權,<朝鮮國譯佛書의 刊行에 관한 硏究>(成均館大 碩士學位論文, 1988), 92∼118쪽.
이것을 옮겨 취합한 것으로 각 도의 사찰별 불교전적 또는 장판목록이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각 도 사찰의 현존목판을 조사하여 엮은≪全國寺刹所藏木板集≫이306) 朴相國,≪全國寺刹所藏木板集≫(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987). 출간되기도 했다.

 위에서 살펴본 사찰판본의 성격과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 사찰판본은 송판본과 원판본을 번각한 것에서 판각의 솜씨가 떨어지는 것이 있지만, 이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적 판본들은 새김이 우수하고 정교하여 관판본을 훨씬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하여 조선시대 사찰판본은 15세기의 명필가들이 쓴 판서본을 바탕으로 새긴 독자적 판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기왕에 판각된 판본을 번각한 것이기 때문에 새김의 솜씨가 관판보다 훨씬 떨어진다.

 둘째, 사찰판본에는 책 끝에 판각기록과 판각에 참여한 化主·施主帙·板書者·板畵者·鍊板僧·煮板僧·刻手 등의 刊役僧名이 표시되고 있어 판본의 고증과 인쇄발달사의 연구에 귀중자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간역승은 사찰판의 간행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간인처 즉 관서·왕실·서원·사가 등에까지 진출하여 서적간행에 참여, 우리 나라 목판인쇄술 발달에 크게 기여한 점에 대해서도 아울러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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