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2. 인쇄기술
  • 4) 서적의 인쇄
  • (5) 사가판본

(5) 사가판본

 개인이 자비로 간행하여 대가를 받지 않고 펴낸 책을 私家板本이라 일컫는다. 고려시대에는 불서와 문집류, 조선시대는 문집·實紀·族譜類가 주류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불서의 사가판이 많은 것이 특징이지만 조선시대의 사가판에서는 불서를 거의 볼 수 없다. 조선시대의 사가판은 주로 시문집이 차지하고 있으며, 후기로 접어들면 실기와 족보류가 많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조선은 신분계급사회로, 양반들이 사회지도계층으로 군림하여 그 특권을 대대로 누리고자 자손, 문중 그리고 학연의 문하생들이 자비 또는 공동출자하여 다투어 시문집을 비롯한 실기·족보류를 간행해냈다. 그 중 개인의 시문집은 국초부터 판각되었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개국 일등공신이며 왕세자 芳碩의 사부였던 鄭道傳의 저술이 우선 손꼽힌다. 태조 6년(1397)에 그의 시문 중 錦南雜詠·錦南雜題·奉使錄 등을 합친≪三峯集≫2권본이 장자 鄭津의 주선으로 생전에 판각되었다.317) 千惠鳳,<足利學校의 韓國古典에 대하여>(≪書誌學≫2, 韓國書誌硏究會, 1969), 35쪽. 정종 2년(1400)에는 尹會宗이 쓰고 權近이 批點한 韓修의≪柳巷先生詩集≫을 둘째 아들 韓尙質이 형제들과 제휴 출자하여 간행하였다.318) 權近,≪陽村集≫권 17, 柳巷先生韓文敬公修文集序.
李仁榮,≪淸芬室書目≫(寶蓮閣, 1968), 79쪽.

 태종대에는 조선왕조의 기틀이 국내외적으로 안정되자 문집이 속속 출간되었다. 그 중에서 사가판으로 확인되는 것은 태종 4년(1404)에 李穡의≪牧隱集≫을 그의 아들 李種善이 간행해낸 초간본과319) 李穡,≪牧隱集≫卷首. 태종 18년에 鄭樞의≪圓齋集≫을 역시 그의 아들 鄭擢이 수집 상재해낸 초간본이320) 鄭樞,≪圓齋集≫卷末. 있다.

 세종연간에 간행된 사가판 문집에는 권근의≪陽村集≫을 그의 아들 權蹈(개명;權踶)가 초고를 수집 편차해서 간행한 초간본을321) 李仁榮, 앞의 책, 91쪽. 비롯하여, 세종 21년(1439)에 鄭夢周의≪圃隱集≫을 아들 鄭宗誠이 수집·편찬하여 간행해낸 초간본,322) 鄭夢周,≪圃隱集≫初刻本, 男宗誠跋.
李仁榮, 위의 책, 83쪽, 圃隱詩藁, 缺本 解題.
세종 28년에 鄭摠의≪復齋遺藁≫를 역시 아들 鄭孝忠이 수집·편찬하여 강원도관찰사 李先齊 등의 도움을 받되 민간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기의 재력으로 간행해낸 초간본이323) 鄭摠,≪復齋遺藁≫卷末. 전해진다. 그리고 세종 32년에 柳方善의≪泰齋集≫을 아들 柳允謙이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해낸 초간본324) 柳方善,≪泰齋集≫卷首. 등도 알려지고 있다.

 문종 2년(1452)의 鄭麟趾 서문이 붙어 있는 權遇의≪梅軒先生集≫은 초간의 사가판으로 여겨지고,325) 權遇,≪梅軒先生集≫卷首. 간행기록이 없어진 잔본이나 조선 초기에 그의 아들이 편집·간행한 것으로 알려진 李詹의≪雙梅堂先生篋藏文集≫도 초간의 사가판이라 하겠다.326) 李詹,≪雙梅堂先生篋藏文集≫殘本, 권 22∼25 初刊本(≪韓國文集叢刊≫6, 民族文化推進會, 345∼395쪽).
李仁榮, 앞의 책, 90쪽.

 세조 13년(1467)에는 일찍이 타계한 아우 成侃의≪眞逸遺藁≫를 형 成任이 수집하여 목판으로 간행해냈다.327) 成侃,≪眞逸遺藁≫卷首. 성종 17년(1486)에는 崔恒의≪太虛亭集≫을 그의 처남 徐居正이 편집·간행해냈으며,328) 崔恒,≪太虛亭集≫卷首. 연산군 3년(1497)에는 康伯珎이 金宗直의≪佔畢齋集≫ 중 詩文 25권 彛尊錄을 수집·간행해낸 것이329) 金宗直,≪佔畢齋集≫彛尊錄 末尾. 모두 초간의 사가판 문집들이다. 이후 이러한 사가판 문집 간행은 점차로 늘어나 조선 전대에 걸쳐 성행하였으며, 16세기 후반부터는 아울러 실기와 족보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가판은 주로 양반의 문벌과 혈통을 유지하여 특권을 누리며 가문을 빛내기 위해 발달한 것으로 주로 시문집이 간행되었고, 아울러 실기와 족보류가 뒤따랐음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이 사가판들을 판각술의 시각에서 고찰하면, 자비 또는 비용을 거두어 값싸게 새기거나, 문중·인척·문하생들이 지방의 관리로 부임하였을 때 지방의 각수를 모아 저렴한 품삯 또는 行下를 지불하는 정도의 염가로 새겨냈기 때문에 판각의 솜씨가 거칠고 인쇄가 조잡하여 책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千惠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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