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3. 군사기술
  • 1) 화약과 화기의 전래

1) 화약과 화기의 전래

 火器, 곧 火藥兵器는 화약의 폭발력(화학적 작용)으로 矢箭·石丸·鐵彈 등을 발사하는 근세적 有筒式 화기를 말한다. 그것은 고대의 火攻 때 쓰이던 여러 가지 연장이나 물리적 장치에 의해서 巨石類를 투사하던 投石機인 이른바 石駁(砲, 氣)와는 구별된다. 그리고 근세적 유통식 화기의 출현은 화약의 발명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 근세적 유통식 화기는 동·서양에서 다 같이 14세기 초엽부터 출현하였다. 이후 그 기술이 점차 발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주된 병기였던 弓矢나 刀劍을 능가하는 큰 살상력과 파괴력을 갖추어 중국에서는 明의 통일사업을 촉진시켰고, 서양에서는 중세 騎士를 무력화시켜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한 요인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말의 倭寇, 조선초의 野人 정벌, 임진왜란, 병자호란, 병인·신미양요, 동학농민전쟁 등 민족적인 대전투에 관한 연구는 당시에 사용된 무기, 특히 화기의 우열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새로이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은 그대로 확대하여 당시의 전략·전술·군사제도를 상호 연관시켜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 나라의 화기에 관한 연구는 문헌을 통한 고찰과 유물에 의한 실증이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330) 조선시대 화기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의 글들이 주목된다.
洪以燮,≪朝鮮科學史≫(東京;三省堂出版社, 1944).
有馬成甫,<朝鮮への傳統>(≪火砲の起源とその傳統≫, 吉川弘文館, 1962).
官原兎一,<十四·五·六世紀朝鮮における火藥>(≪東洋史學論集≫, 1953·1954).
梁在淵,<火戲附水戲>(≪中央大學校論文集≫3, 1958).
許善道,<麗末鮮初 火器의 傳來와 發達(上·下)>(≪歷史學報≫24·25, 1962).
실물면에서는 國立博物館 收藏品 외에 文化財管理局이나 전국 각지에 상당수의 새로운 자료가 남아 있으며, 문헌으로는≪火器都監儀軌≫·≪火砲式諺解≫등 귀중한 책자가 있고, 더욱이 역대≪朝鮮王朝實錄≫ 중에 이에 관한 긴요한 사료가 적지않게 간직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 화기가 처음 전래된 것은 崔茂宣의 건의에 따라 火㷁都監이 설치된 우왕 3년(1377)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화약과 화기를 독자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한 시기로 보아야 하고, 늦어도 공민왕대에는 이미 화약병기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있었음이 확실하다.≪高麗史≫의 화통도감 설치기사331)≪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3년 10월.나≪太祖實錄≫의 최무선에 관한 기록332)≪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4월 임오. 이 기사는 최무선이 사망하자 그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을 주의 깊게 읽으면 우왕 3년 이전에 화기를 익히 알고 있었음을 누구나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최무선이 어느 시기에 어떤 경로로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또 공민왕대에 명으로부터 처음 들어왔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공민왕대 이전에 이미 화기가 전래되었으리라는 흔적을 찾는 데 주목되는 것은 고려 숙종 때의 發火이며, 다음은 인종 13년(1135)의 火毬이고, 끝으로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 때에 사용하였다는 이른바 鐵砲이다.

 숙종 9년(1104)에 女眞정벌을 위하여 설치한 別武班은 11개의 특수부대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에 發火라는 부대도 존재하였다.33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別號諸班·五軍. 발화부대가 어떠한 임무를 띤 특수부대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그 명칭으로 보아 火攻부대인 듯하고, 나아가 화약 사용과도 연관지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시는 이미 宋에서 화약병기가 발명된 후 약 1세기가 지난 때이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 8년(1426) 7월 이후의 기록에 ‘發火’라는 화약병기가 많이 나타나며,≪國朝五禮儀序例≫에서도 대·중·소 3종의 發火圖說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火毬는 妙淸의 亂 때 쓰인 것으로, 당시 중국에서 온 趙彦의 계책에 따라 砲機로 적의 城樓를 분쇄함과 아울러 화구334) 화구는 최초로 발명된 화약병기의 일종으로, 화약을 球狀으로 굳힌 것인데 宋 眞宗 咸平 3년(1000) 8월에 唐福이 火箭 火蒺藜와 함께 製進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그 출현은 인종 13년(1135) 보다 100여 년 앞섰고, 또 당시 麗·宋간의 문물교류가 소원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보면, 이 때의 화구가 반드시 화약병기가 아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화약사용과는 전혀 관계없는 古代火攻器具의 하나일 수도 있고, 또 현재로서는 꼭 화약병기였다고 주장할 만한 방증을 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를 던져 이를 불살랐다고 한다. 충렬왕 원년(1274)의 일본정벌 때 몽고군이 사용한 철포에 대해서는 일본측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고,335) 竹崎季長蒙古襲來繪詞, 八幡愚童記(一名 八幡愚童訓),≪太平記≫권 39, 蒙古寇本朝事.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관련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화약병기였느냐 아니냐 하는 데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336) 철포는 원래 金에서 震天雷라고 칭하던 火砲로 金軍은 이것을 守城用으로 사용하였으나 元이 이 火器를 얻어 이것으로써 가볍고 편리한 小形 鐵罐에 화약을 넣고 손으로 당겨 투척하였으니, 이는 화약병기로서의 일대 진보라고 할 수 있다(有馬成甫, 앞의 책, 91∼92쪽). 몽고군의 화약병기 사용이 확실하다면 당시에 행동을 같이 한 고려군이 제조상의 비법까지는 습득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존재 자체를 전혀 알지 못했을 리는 없다. 따라서 비록 일부일지라도 1270년대의 고려에는 이미 화약병기를 아는 자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37)≪高麗史≫列傳의 金富軾傳에 보이는 砲石·砲機, 杜景升傳에 보이는 大砲, 朴犀傳에 보이는 大砲車·砲車, 宋文冑傳에 보이는 炮·砲, 金慶孫傳에 보이는 砲車·砲, 韓洪甫傳에 보이는 砲 등도 지금까지는 거의 의심없이 화약병기와는 구별되는 投石機로서의 砲로 해석하였지만, 위에서 논한 화구 등이 화약병기였다면 이에 대해서도 재고해볼 여지가 없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霹靂砲의 화약병기 여부 등 송에서 명대에 걸친 화약병기의 발달이 좀더 명백해지고, 또≪고려사≫에 대한 사료상의 검토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후에야 확실히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 화약병기의 전래는 목면·성리학 등과 더불어 원을 통한 신문물의 유입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충혜왕 후3년(1342) 5월 이후 4월의 佛誕日에 행하는 연등 때의 燈火戲를 가리키는 듯한 火山·火山戲·火山雜戲 등338)≪高麗史≫권 36, 世家 36, 충혜왕 후3년 5월 임오·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4월 경술·권 41, 世家 41, 공민왕 17년 4월 경술·18년 4월 계유 및 권 132, 列傳 45, 叛逆 4, 辛旽.과, 화약병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火山臺·火箭·火筒 등이 자주 보인다.339)≪高麗史≫권 43, 世家 43, 공민왕 21년 10월·병신·갑오, 22년 10월 정축 및 권 132, 列傳 45, 叛逆 4, 辛旽.

 화기사용을 직접 명시한 것은 공민왕 5년(1356) 11월의 기사로, 宰樞가 崇文館에 모여 서북면의 방어용 장비를 검열할 때 銃筒을 南岡에서 발사하였는데 발사된 箭이 順天寺 남쪽 땅에 떨어져 그 깃이 묻혔다고 한다.34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공민왕 5년 9월. 총통은 그 명칭으로 보아 有筒式 화약병기임이 틀림없다. 그 발사물은 후대의 것과 같은 전이었으며, 발사거리 역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당시로서는 남강에서 순천사 남쪽까지로 명백히 밝혀 놓은 셈이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서의 유통식 화기는 공민왕 5년 이전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총통은 당시 중국의 형세341) 명에서 太祖 朱元璋에게 火龍鎗을 製進한 해는 공민왕 4년(1355)이었다. 당시 중국과 고려와의 문물교류에 필요한 시일을 고려하고, 또 당시 주원장의 정치세력이 우리 나라에 총통을 전해줄 만큼 성장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그 총통은 명에서 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나 현재 원의 총통이 전하는 것342) 至順三年銘銅砲(1332), 至正十一年銘銅火銃(1351) 등 실물이 현재 남아 있으므로(吉岡新一,<古銃物語>,≪大塚學報≫145, 1963) 원대에 이미 有筒式 近世火器를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으로 미루어 볼 때 원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때에 고려에서는 총통에 이어 화전·화통 등의 사용을 통해 화기의 위력을 인식하고, 공민왕 22년부터는 명으로부터 이를 대량으로 지원받아 그 사용에 박차를 가한 듯하다. 공민왕 22년 11월 고려는 張子溫을 명에 보내, 날로 치열해가는 왜구를 격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바다에 나아가 추포해야 하므로, 적을 쫓는 배 위에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기계와 화약·硫黃·焰硝 등을 본국에서는 마련할 도리가 없으므로 반급해 달라고 하였다. 이듬해 5월 鄭庇 등이 명에서 돌아올 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불과 4일 후인 5월 8일에는 ‘적극적으로 왜구를 제거하려는 뜻이 있으니 크게 기뻐한다’는 등의 명 태조의 지시에 의하여 염초 50만 근, 유황 10만 근과 기타 필요한 여러 가지 약품을 지원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물품이 언제 고려에 도달하여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었는지, 또 화약만 받았는지, 혹은 총통 등 화기까지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에서 완제된 화약과 더불어, 그 원료인 염초·유황 등의 반급을 청구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공민왕 말기에는 화기의 사용은 물론, 화약 제조의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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