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3. 군사기술
  • 2) 화약의 제조

2) 화약의 제조

 고려말 화약병기의 전래와 제조는 왜구 격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화약제조에 최초로 성공한 자는 최무선343)≪高麗史≫권 133, 列傳 46, 辛禑.
≪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4월 임오.
≪新增東國輿地勝覽≫권 2, 京都(下) 軍器寺.
柳成龍,≪西厓文集≫권 16, 雜著, 記火砲之始.
인데, 그는 왜구 격퇴에 화기의 위력이 절대적임을 간파하고 오랫동안의 노력 끝에 李元344) 李元이 원나라 사람인지, 중국 강남으로부터 온 상인 즉 명나라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최무선이 원에 들어가서 배워왔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무선의 아들로 그 비법을 혼자 전수하여 이후 화약을 발전시킨 崔海山이 입원설을 말하고 있지 않은 이상(≪新增東國輿地勝覽≫권 2, 京都(下) 軍器寺 火藥庫記), 최무선은 고려에 온 중국인으로부터 비법을 습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무선의 입원설은 화약병기의 전래라든지, 그 근원이 되는 중원에 있어서의 유통식 화기의 출현 등을 연구하는 데 참고해야 할 것이다.이라는 자로부터 焰硝煮取術을 배워서 家僮 몇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습득하게 하였다. 그 후 수년 동안 주위의 몰이해와 비방을 무릅쓰고 마침내 국가의 공식 화약제조소인 火㷁都監을 설치하게 하였다.

 화기의 발달에서는 화기보다는 화약이 문제였고 화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초의 확보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흑색 화약의 3요소(염초·유황·목탄) 중 목탄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유황은 희귀하기는 하나 일종의 광물이므로 비법이 있을 수 없고, 염초의 획득이 가장 문제였다. 3요소를 합하여 화약으로 劑合하는 기술과 더불어 塵土 중에서 염초를 煮取해내는 비법이야말로 화기발달의 관건이었는데, 焰硝匠 이원에게서 염초를 구워 쓸 기술을 배웠던 것이다. 또 그가 염초자취법, 즉 화약제조법을 습득한 시기는 우왕 3년(1377)의 화통도감 설치보다 수년이나 앞섰던 것이다.

 화통도감의 구성과 규모 등에 대해서는 고찰할 실마리가 전혀 없지만, 도감의 설치 이후 화약은 급속도로 발달해갔다. 도감 설치 이후 大將軍砲·二將軍砲 등 20여 종의 화기가 제조되었고 그 위력은 보는 사람들이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345)≪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4월 임오. 그리고 우왕 4년 4월에는 개경과 지방의 各寺에 火㷁放射軍을 정하였는데, 大寺에 3명, 中寺에 2명, 小寺에 1명으로 하였다.346)≪高麗史≫권 81, 志 35, 兵 1. 즉 화기발사의 전문부대로 보여지는 화통방사군이 중앙과 지방의 각 시에 편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후 화기사용에 관한 기사를≪고려사≫에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즉 화포를 증강하여 水戰에 대비하고, 擊毬와 더불어 화포희를 즐기며, 火箭으로써 적의 樹柵을 불살라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그 절정은 우왕 6년의 전라도 鎭浦전투에서였다. 즉≪고려사≫의 邊安烈과 羅世傳에 의하면, 진포로 다가오는 왜선 500척을 화포로 완전히 궤멸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우왕 9년에는 珍島에서 화포로 적선 7척을 불태운 鄭地 將軍이 “일찍이 오늘과 같은 통쾌한 승리를 맛본 일은 없다”고 스스로 감탄하였다.

庚申年(우왕 6년)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崔茂宣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副元帥에 임명하고 都元帥 沈德符·上元帥 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火具를 실어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 모르고 배를 한 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했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雲峰에 모였는데, 이 때 태조가 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따라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4월 임오).

지금 왜구와 우리 수군이 감히 배를 타고 승부를 겨루지 못하는 것은 앞서 鎭浦전투가 있었고, 뒤에는 남해의 승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마음을 고쳐 정성을 바치는 것은 비록 전하께서 펴신 교화에 의한 것이나, 처음부터 火㷁과 火砲로써 우레와 벼락같이 떨쳐서, 그들의 혼을 빼앗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면, 그 완악하고 사나운 것을 쉽게 굴복시키지 못했을 것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22, 京都 下, 軍器寺).

 위의 자료에 의하면 왜선이 우리 선박과 승부를 겨루지 못하게 됨에 따라 여말 30년간의 치열한 賊勢를 물리치고 태평세월을 유지하게 되었음은 오로지 화약병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화약은 國威를 선양하고 포학하고 난종하는 자를 제거하여 태평시대를 유지하게 하는 큰 물건이었다. 그리고 왜구 섬멸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李成桂의 정치적 세력확충에 획기적 계기를 이룬 운봉대첩도 역시 화기의 위력에서 연유하였음을 새로이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화기가 왜구 격퇴에 유효하였는데도 화통도감은 설치된 지 10여 년 만인 창왕 원년(1389)에 혁파되어 군기시에 合屬되었다.347)≪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火㷁都監 및 권 118, 列傳 31, 趙浚. 화통도감이 군기시에 합속되었다 하여 화기가 발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립기구에서 다른 기관에 부속되었다고 함은 아무래도 그 비중이 줄어든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고, 또 이후 화기사용에 관한 기록이 현저히 희소해짐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듯하다.

 그러면 화통도감이 혁파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趙浚은 “무릇 도감은 일이 발생하면 설치하고,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폐지하는 것이 예이다”라고 혁파의 직접 동기를 내세웠으나, 그 동안에 왜구가 줄어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다른 정책적인 배려가 작용하였을 터인데, 우선 冗官淘汰에 의한 경비절약과 官紀確立이 논의되고 있었다. 또 이면적으로 도감혁파의 주장은 조준과 이성계의 관계를 고려할 때, 田制 및 兵制의 개혁과 아울러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일파의 시책으로 보인다. 화기이용에 따른 적대세력의 출현, 다시 말해서 이로 인한 병력의 분산을 방지하고자 하는 권력의 통일 내지 유지를 위한 방책이었던 듯하다. 아직 확고한 기초 위에 서지 못한 신흥세력에게는 고도의 군사력을 가진 화약병기의 발달은, 언제 갑자기 자파의 세력을 뒤엎을지도 모르는 결정적 요소로 경계와 억제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의 개창 후에도 태조나 세조가 그들 자신은 뛰어난 무인이었는데도 화기발달에 대하여는 도리어 소극적인 태도 내지 억제하는 시책을 베푼 점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이해될 듯하다.

 당시에 쓰여진 화기의 종류로는 銃筒·火箭·火筒·火㷁·火砲 등을≪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太祖實錄≫에는 大將軍砲·二將軍砲·三將軍砲·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 등 18종이 나온다. 크게 보아 화포·화통 등 발사화기와 화전·철탄자 등 발사물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나, 이들 화기가 각각 어떻게 다른지는 잘 알 수 없다.348)≪고려사≫에 보이는 화포·화전·화통 등은 포괄적 명사로≪태조실록≫에 보이는 대장군 이하 각종이 모두 이 속에 포괄된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당시의 화기의 성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직접적 사료는 없으나 후세의 것과 같이 탄환 종류를 발사하여 적을 살상하거나 파괴하는 능력은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대신 矢箭을 발사하여 목적물을 태우는 데 큰 효능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화살이나 탄환에 맞았다는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대량 파괴에 따른 심한 轟動을 나타내는 문구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인력이나 물리적 장치(弩)가 아닌, 화약의 폭발력으로 발사물을 발사한다는 점과 화전 등과 같이 발사물 자체에도 油類아닌 화약을 장치한 점에서 종래의 화공기와는 엄격히 구별된다. 발사물의 종류도 시전류에만 그치지 않고 금속제 탄환류의 출현까지 유추할 수 있는데≪태조실록≫에 보이는 철탄자가 바로 그것이다. 끝으로 발사물의 사정거리 역시 어느 정도였는지 전혀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나 그다지 멀지 않은 200보 내외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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