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Ⅱ. 기술
  • 3. 군사기술
  • 3) 화기제작기술의 부침
  • (1) 화기발달의 시초(태종대)

(1) 화기발달의 시초(태종대)

 고려말에 신흥세력인 이성계일파가 화기발달에 대하여 소극적이었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태조가 즉위한 후에도 이러한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던 듯하다.≪태조실록≫에서 화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태조 2년(1393) 정월 초하루에 火戲를 베푼 사실, 또 태조 6년 5월에 軍器監丞이 화통군을 함부로 私役한 사실, 그리고 정종의 즉위교서에 화통군의 役이 너무 과중하니 때에 맞추어 조치하라는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화기발달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시사를 주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화기 이외의 일반 軍器에 대해서도 대체로 권장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 기간은 긴 세월은 아니지만 화기발달에 있어서 그 기술이 아직 확고하지 못하던 초창기였던 만큼, 매우 위험한 고비였다고 생각된다. 이 고비는 집권자에게 있어서 안으로는 玩賞과 미신(逐疫)의 대상이 되고, 밖으로는 倭·野人 등 외국인에 대한 위압의 상징물로 화희가 성행하였다. 또 최무선 부자의 숨은 공에 의하여 그 기법과 전통이 제대로 유지되어 태종대에 이르고, 이로부터 본격적인 발달의 틀이 잡혀간 듯하다.

 태종은 화기발달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애쓴 군주인데, 다음 세종 때의 비약적 발전의 바탕은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이 사실은 세종이 27년(1445) 봄에 화기발달의 획기적 개선을 이룩하고, 과거를 술회하면서 承政院에 “火砲의 법은 태종 때에 이를 썼으나 그 쏜 화살이 2백∼3백 보를 넘지 못하였다”고 하고, 또 의정부에 “태종께서 자주 문 밖에 거둥하여 화포 쏘는 것을 구경하니, 李叔番·崔海山 등이 일을 맡아보는 데 마음쓰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말한 바를 통해349)≪世宗實錄≫권 107, 세종 27년 3월 신묘. 알 수 있다. 태종이 부왕인 태조와는 달리 화기발달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세력기반이 그 동안 확고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기발달의 본격적인 시초는 태종 원년(1401)에 최해산이 등용되면서부터이다. 즉 權近의 상소로 文益漸의 아들 文中庸과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司憲監察, 軍器主簿에 탁용되었다.350)≪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윤3월 경인.

 태종 초기 이후에 나타나는 화기에 관한 자료를 종합 정리해보면, 대체로 전대를 이어 궁중에서 화희를 즐기거나 화기를 戰艦에 이용하는 정도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오히려 왜구 침입의 감소로 화기가 부실하고 허술해진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는 표면에 나타난 현상이고, 내면에 있어서는 꾸준한 연구와 진전이 거듭되고 있었다. 즉 태종 4년 5월에는 軍器監別軍이 신설되고 화통군의 인원이 늘어났다. 또 태종 7년 12월에는 화약의 성능이 종전보다 배나 증가하여, 이에 종사한 火藥匠 33명에게 각각 米 1석을 내려주고 이 밖에 諸色匠人에게도 麤布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그대로 계속되어 2년 후에는 화기를 裝載한 火車의 제조를 보게 되었다.

軍器少監 李韜와 監丞 崔海山에게 말 한 필씩을 주었다. 임금이 解慍亭에 거둥하여 화차 쏘는 것을 구경하고 이 下賜가 있었다. 또 布 50필을 火㷁軍에게 주었다. 화차의 제도는 鐵翎箭 수십 개를 銅桶에 넣어서 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을 제어할 수 있었다(≪太宗實錄≫권 18, 태종 9년 10월 병진).

 이러한 발전과 개선은 태종초 이래의 노력이 차차 성과를 나타낸 것이다. 태종 7년 除夜의 기록에는 최해산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전후 사정과 화차 기사로 미루어 그가 거기에도 관여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후 화차에 관한 기록은 문종 원년(1451) 정월 16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시 보인다.351) 문종대의 화차가 이 때의 연원을 그대로 이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詳考를 기대한다.

 최해산을 중심으로 한 화기의 발전은 시설면의 확충에도 미쳤다. 태종 9년에 別監 李韜와 협력하여 왕에게 아뢰어 먼저 柴門內에 武器庫를 세우고, 이어서 軍器監本監과 火藥監造廳의 축조를 시작하였다.352)≪新增東國輿地勝覽≫권 2, 京都 下, 軍器寺. 화약감조청은 태종 17년에 이르러 완성되고 본감은 그 전에 이루어졌다.

 태종 7년(1407)에서 9년에 걸쳐 화기는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이후의 추세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향을 지적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육지에서의 화기사용에 따른 용도의 확대이다. 앞의 화차가 이미 육상용이었고, 다시 서울의 東郊에서 화기를 習放하거나 육상에서의 攻城時에도 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태종 5년 7월에는 병선 외에 각지의 성과 ‘山河險阨設備處’에도 모두 화통을 설치하여353)≪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7월 신해. 수륙에서 다같이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나아가 동왕 말엽인 17년 10월에는 새로이 북쪽의 여진을 막는 데까지 이용하였다.354)≪太宗實錄≫권 34, 태종 17년 10월 무술.

 둘째는 발사물로 箭類 외에 石彈子·彈丸 등이 등장하는 점이다. 이는 이제까지 焚燒를 주로 하였던 화기의 성능에 변화가 온 것을 뜻한다. 아울러 태종 10년 10월 기묘에는 ‘蒺藜砲聲’ 같은 천둥이 일어났다고 하였고, 火藥庫記에서는 碗口를 만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에 唐의 배에 있는 화기 1개를 깨뜨려서 … 그 후 崔君이 들어와서 그 화기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碗口이다’라고 하였다. … 전하께서 최해산에게 명하여 그것을 주조하라고 이르니, 물러나와 대·중·소 20개를 만들어 올렸다. 解慍亭에 나가서 발사시험을 하니 화석포가 150步의 거리까지 나갔으므로 최군은 內乘馬를 받았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2, 京都 下, 軍器寺 火藥庫記).

 최해산이 주조하여 발사시험을 한 화기로 대·중·소 3종 20개의 완구가 명시되고 있다. 곧 막연히 화통·화포가 아니고 질려포·완구 등 구체적인 화기명이 나타나 있다. 질려포·鐵彈子·鐵翎箭 등이 전에도 나타났지만, 그것은≪태조실록≫의 최무선 사망기사에 병렬적으로 기록된 경우뿐이고≪고려사≫를 비롯한 여타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기명의 구체적인 등장은 탄환의 사용과 더불어 주목할 만하다.

 셋째는 火戲의 성행이다. 화희는 화기 전래 초기부터 있었지만 화약의 발달에 따라서 儺戲와 아울러 궁중에서 연말 등에 행하는 玩賞戲의 일종으로 더욱 성행된 것 같다. 태종 13년 12월에는 이미 연례행사로 굳어졌다. 그것은 왕실의 좋은 완상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逐疫·闢厲氣하는 데 필요한 미신적 의식이었고, 또한 倭人이나 胡人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과시물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화기 발달은 태종의 총애를 받은 최해산을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중국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점이다. 이미 언급한 완구에 관한 기록을 통해 당시의 완구가 중국의 그것에서부터 발달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또 軍器監別軍 안에 중국인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355)≪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정월 정미.

 그리고 화기는 태종 15년 이후에 양과 시설면에서 다시 한 번 대발전을 이룩하였다. 태종 15년 4월 신미에는 화통군을 종래의 400명에 600명을 더하여 1,000명으로 확대 개편하였는데, 화통군을 한꺼번에 150% 대폭 증강한 셈이다. 다시 1년 후인 태종 16년 12월 신미에는 사찰을 혁파하고 거기에 속했던 노비를 화통군에 소속시켜 정원을 무려 만 명으로 늘렸다. 이는 화통군의 수를 10배로 확대시킨 파격적인 조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화통의 增鑄도 이와 비례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태종 15년 7월 신해에 左代言 卓愼은 화통수가 1만여 자루에 도달하지만 공급이 부족하니, 남아 있는 鑄鐵 2만여 근으로 더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화통을 더 만드는 데 필요한 銅鐵의 확보책도 강구되었다. 태종은 15년 3월 계축 이후 억불책에 의하여 몰수된 寺社의 종을 이에 충당하는 한편 각 도 수령에게 명하여 주철을 상납하도록 하였다. 화통군 및 화기의 증강과 병행하여 화약보유량도 국초의 6斤 4兩에서 태종 17년경에는 6,980근으로 거의 1,000배나 증가하였다.

 이와 같은 화약과 화기의 비약적 증강에 따라 ‘화약고’라고도 불리던 화약감조청과 같은 독립건물이 반드시 요구되었을 것이고, 그 축조가 가능할 만큼 국왕과 일반의 인식이 깊어갔던 것이다. 화약고의 축조는 紫門武庫·軍器監本監 및 弓箭所 造營 등 일련의 무기를 제조하고 보관하는 청사의 보수 및 확충사업의 일환으로, 태종 17년 봄에 軍器寺提調 李從茂의 알선으로 舊禮寶寺의 헌 材瓦로 여러 달 만에 완성되었다. 그 규모와 위치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다지 적은 규모가 아니며 군기감에 부속하여 위치한 듯하다.

 이와 아울러 화약의 성능도 더욱 향상되어, 태종 18년 元旦의 放火宴에서는 사신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크게 탄복할 정도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화약기술의 본고장인 명나라 사신이 찬탄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화염이 하늘을 가르고 소리가 궁궐을 진동시켰다”는 등의 거창한 표현은 이제까지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화기가 오래도록 쓰이지 않은 탓으로 개수해야 할 것이 자못 많았다. 또한 화통군과 별군을 화기와 관계없는 崇禮門 行廊 改構 및 京軍營 設築 등에 종사시키며 군기감의 장인과 화통군 및 별군을 半으로 放番하는 조치도 있었다.356)≪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7월 임자·9월 정유.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조치들로 태종 때의 화기 발달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화포는 거대하고 무거워 사용에 극히 불편하고 화약의 소비량이 많은 것이 흠이었다. 더구나 당시 명에서 이미 성행하였고 조선에서도 세종 중기 이후에는 습득할 수 있었던 一發多箭法을 아직 터득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태종대가 화기발달사에 있어서 향상의 기운을 적극적으로 열고 발전의 실효도 적지 않게 거두었지만, 당시로서는 넘을 수 없었던 한계가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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