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맥락
  • (1) 조선왕조 개국과 한문학

(1) 조선왕조 개국과 한문학

 조선 전기의 한문학이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일 뿐 아니라 일반화도 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적의한 명칭은「조선 전기의 國文學」으로 불려져야 한다. 훈민정음이 일반화되기 이전과 이후는 다른 의미로 규정될 필요가 있다. 조선 전기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장르를 차용하여 민족의 정서를 형상한 국문학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 시기의 한문학은 四民의 문학이 아니라 士人層의 문학이라는 제한적 성격을 띤 것은 사실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은 지식층과 보다 관계가 깊게 마련이다. 한문학의 경우는 이같은 경향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 동양에 있어서 문학은 다른 세계와 달리 정치와 긴밀하게 접맥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문학이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인식은 신라·고려보다 조선시대가 특히 강했다. 조선 전기의 문학은 고려시대의 문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고려시대의 문학 또한 신라의 문학에서 배태된 것은 물론이다.

 한국 한문학의 본격적 출발은 賓貢科 출신들의 신라와 발해로의 귀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들이 귀국하여 활동하기 이전에는 아마도 우리 고유의 민족문학이 근간이었을 것이다. 賓貢諸子들에 의한 중국문학의 본격적 수용과 중국문학에 입각한 문학창작을 민족 고유문학의 위축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한문학을 이 땅에 수립하여 민족문학의 기틀을 튼튼하게 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 업적은 기억되어야 한다. 唐代부터 시작하여 元代를 거쳐 明初까지 계속된 빈공과는 당시의 선진 중국문학이 계속적으로 수입되어 우리 나라 한문학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진원이 되었다. 빈공과 출신으로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孤雲 崔致遠이다. 그의 저서≪桂苑筆耕≫과 ≪孤雲先生文集≫은 한국 한문학의 초석이었다. 慵齋 成俔은 한국 한문학의 계통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국 문학은 최치원에서부터 발휘되었다.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고 지금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이제 그의 저서를 통하여 보면 詩句에는 능하나 뜻이 정치하지 못하며, 四六文은 잘 지었지만 용어가 정돈되지 못했다. 金富軾의 경우는 담박하기는 해도 화려하지 않으며, 鄭知常은 화려하나 천양되지 않았고, 李奎報는 다듬을 줄은 알았지만 거두지 못했다. 李仁老는 단련은 되었지만 펴나지 못했고, 林椿은 縝密하나 꿰지 못했고, 稼亭(李穀)은 的實하지만 슬기가 부족했다. 益齋(李齊賢)는 老健하기는 하나 아름답지 못했으며, 陶隱(李崇仁)은 醞藉하나 나아감이 없었으며, 圃隱(鄭夢周)은 순수했지만 맺음이 없었다. 三峯(鄭道傳)은 장대하나 검속할 줄 몰랐으며, 牧隱(李穡)은 시와 산문에 모두 뛰어나 세간에 집대성한 자로 여기지만 鄙踈하고 소략하여 元人의 規律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찌 당·송의 경지에 들 수 있겠는가(成俔,≪慵齋叢話≫권 1).

 최치원을 한문학의 태두로 삼기는 했지만 높이 평가한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經術과 문장은 각각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道文一體的 문학인식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성현의 위의 글에서 고려시대 詞壇과 조선 초기 사단의 品格論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鍜鍊·縝密·老健·的實·鄙踈’ 등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신라의 최치원을 비롯하여 고려의 임춘까지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고려말 가정부터 익재·도은·포은·삼봉·목은에 와서는 갑자기 호를 사용하는 이유도 문제가 된다. 호가 일반화되지 않고 불확실하면 字를 쓸 수도 있는데, 이름을 적은 것은 가정 이곡부터 등장하는 인물들이 조선시대 문학과 보다 긴밀하게 접맥된 때문이 아니기도 하지만, ‘文以載道論’의 발원과도 관계가 있는 듯하다. 성현은 조선 한문학의 근본을 구축한 사람으로서 陽村 權近과 春亭 卞季良, 집현전 학사 申叔舟·崔恒·李石亨·朴彭年·成三問·柳誠源·李塏·河緯地 등을 열거한 후, 徐居正과 金守溫·姜希孟 등이 뒤를 이어 계승했다고 했다. 성현은 특히 서거정의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韓愈를 모방하여 성공한 예라고 한 후 文衡(大提學)의 자리를 오랫동안 잡았다고 평했다. 문형직을 장기간 장악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학자들이 문형을 잡은 사람의 문학 성향을 본받기 때문이다. 성현은 강희맹의 문학을 평하면서 典雅하여 天機가 자숙했다고 했는데, 이는 조선 초기에 이미 可空圖의 품격론이 보편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주제파악에 급급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과 견주어 볼 때 금석지감이 있다. 15세기에 이미 문학을 평하는데 있어서 품격론을 척도로 삼은 점은 조선왕조 5백년간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雄放·豪健·典雅·天機自熟·老健·雕鐫’ 등의 품격이 15세기 문학의 주된 美意識이었음을 확인하는 것 또한 15세기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관건이 된다.

 성현이 제시한 한국 한문학의 文統에서 최치원을 비조로 삼은 것은 과거와 현재를 불문한 공론이었다.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에 들어와서 최치원은 다소 격하된 감이 있다. 한문학의 수입에 의한 민족문학의 위축은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최치원을 비조로 한 한문학의 발휘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민족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성현이 나열한 최치원·김부식·정지상·이규보·이인로·임춘·이곡·이제현·이숭인·정몽주 등의 고려시대 작가들은 한국 한문학의 문통을 형성하는 주역들이다. 고려시대 한문학의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은 조선시대의 한문학과 상당히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에 비해서 주제영역이 광범했고, 형상사유도 그 폭이 넓게 잡혀 있었다. 주제의 경우 기층사유는 물론이고 불교사상과 도가사상·유가사상 등의 제반 이념들이 각각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의 이념만이 가장 가치있고 여타의 것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없었다. 이른바 三敎(儒·佛·道)가 동등한 위치에서 각각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元天錫은 유·불·도 3교의 이치가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會三歸一’의 통합의지를 밝혔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사상계를 대변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3세기 무렵부터는 한국 한문학의 이념적 기반이 朱子學으로 이행되는 감이 있다. 성현이 잡은 문통에도 흔적이 발견된다. 이제현과 이곡은 사제간이고 이숭인·정몽주 역시 경학 또는 주자학과 관계가 깊은 인물들이다. 고려 후기 이후 한국한문학의 문통은 한국 성리학의 道統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학풍은 원천석의 아래의 글<三敎一理幷序>를 통하여 그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如如居士의 三敎一理論에 이르기를 세 성인(공자·노자·석가)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正敎를 수립했다. 유교는 이치를 궁구하고 성정을 극진히 하는 것으로 교리를 삼았고, 불교는 마음을 밝혀 見性의 체득을 위주로 하고, 도교는 眞을 닦고 性을 연마하는 것을 주된 교리로 인식했다. 가정을 다스리고 몸을 닦아 임금을 잘 모시고 백성을 보양하는 일은 儒者들의 주된 임무이다. 精을 아끼고 神을 수양하여 신선이 되어 상승하는 것은 도교 시조의 행적이다. 죽음을 뛰어넘고 삶을 초월하고 스스로 이롭게 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이치는 불교사상의 요체이다. 이들의 극처를 규찰하면 결국 동일한 곳으로 귀착하여 한곳에 모인다. 이로써 보건대 세 성인의 說敎는 한결같이「治性」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른바 盡하고 鍊하고 見하는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지극하고 광대하며 투철한 경지에의 귀착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가 같을 뿐 무슨 막힘이 있겠는가. 단지 세 성인이 각자 문호를 열었고, 문도들이 스승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자기의 교리는 정당하고 다른 종교의 교리는 나쁘다고 서로 헐뜯느라 상대의 宗旨를 몰랐을 따름이지, 3교의 性은 확연하게 각각에 구현되어 있다. 이는 마치 나귀를 타고 가는 자가 자기 아닌 타인이 나귀를 탄 것을 비웃는 것과 동일하니 실로 애석할 만한 일이다. 이에 네 수의 시를 지어 居士의 뜻을 계승코자 한다(元天錫,≪耘谷詩史≫권 3, 三敎一理幷序).

 원천석의 서문을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이 글의 내용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경종이 되기 때문이다. 3교는 그 본질이 동일하다는 원천석의 주장은 조선 건국과 더불어 퇴색되었다. 불교·도교는 나쁘고, 오직 유교만이 정당하다는 인식이 士人層에 풍미했다. 한문학 속에 담길 이념은 오로지 유가사상이라야 하고 여타의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은 이렇게하여 형성되었다. 불교가 억압되고 도교가 폄하되었지만, 백성의 현실적 삶 속에는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었다. 한문학은 사인층의 문학이기 때문에 불교·도교적 주제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천여 년간 지속된 불교·도교 등의 사유는 내면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인층은 그들의 사회적 위상으로 봐서 유가 일변도의 구호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구호와 내실이 꼭 동일할 수만은 없었다. 유가적 주제의식에 의한 한문학의 전개는 조선 한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은 사실이고, 이는 강조되어야 할 특성 중의 하나이다. 원천석은 유·불·도를 평하여 유가는 洒然, 道家는 寂然, 佛家는 湛然이라고 했다. 유가는 엄숙하고 도가는 적막하고 불가는 심오한 것으로 특징지은 그의 표현은 정곡을 찔렀다. 유가문학이 경건과 엄숙을 주조로 삼는 것은 사실이다. 3교는 각각의 특징과 장단점은 있지만, 원천석은 3교의 교리가 근원에 있어서 동일하기 때문에 통합되어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三敎의 宗風은 본래 차이가 없는데,

잘못을 계교하고 옳음을 다툼이 개구리와 같다.

一般 是性은 함께 구애됨이 없는데

釋과 儒와 道를 각기 다투어 무엇하나(元天錫,≪耘谷詩史≫권 3, 會三歸一).

 그러나 자기 아닌 타인의 종교나 사상도 존중되어야 하고, 각각의 문화도 제 모습을 지닌 채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고려시대 지식인의 종합적 사유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수정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진행된 사상계의 변화가 한국 한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영향의 공과에 대해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조선 건국 후 불가와 도가적 주제의식의 배제는 한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주제영역이 그만큼 좁아졌다는 사실과 아울러 주제의 순정화가 이룩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가능하다. 조선 한문학의 주제영역의 획정에는 이황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일익을 담당했다.

조선의 祀典에 실려 제향하는 인물들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이 많다. 그 예로 최고운(치원)은 오로지 문장만 숭상했고, 게다가 불교에 탐닉했고 아울러 문집 중에 佛疏 등의 저작이 많아 혐오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文廟에 배향되어 있으니, 이는 先聖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심히 탄식할 일이다.

南冥(曺植)은 老莊을 창도했고, 穌齋(盧守愼)는 陽明學에 빠져 있으니 두려운 일이다. 高峯(奇大升)만은 백척의 장대 위에서 한걸음 더 올라간 경지에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양명학의 미혹이 아마도 중원에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니 두렵다(李滉,≪退溪全書≫言行錄 권 2, 類編).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된 사실을, 선성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인식한 까닭은 이해할 수도 있으나, 최치원 역시 유학을 부정한 선현은 아니었다. 유가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의 祀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문장만을 오로지 숭상했다거나, 또는 불교에 관한 글이 최치원의 문집에 많은 것도 사실이다. 최치원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조선 전기 지식인들의 보편적 견해였던 듯하다. 또 조식이 노장에 얼마간 경사해 있고, 노수신이 양명학을 신봉했다는 이황의 주장에서 우리는 조선 한문학의 이념적 주제영역의 범주를 알 수 있다. 기대승이 없었다면 조선에도 중국처럼 양명학의 피해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황의 우려는 조선 주자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기층사유 등은 고려시대 학술계에서는 용인된 학문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한문학의 주제는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시대 한문학의 주제영역이 선명화 내지 단순화된 것은 태조 李成桂를 추대한 건국 주역들의 사상적 성향과 직접 관련된다. 조선 전기 한문학의 초석은 정도전과 權近·趙浚·卞季良·鄭麟趾·申叔舟·徐居正·成俔 등에 의해 놓아졌다. 정도전과 조준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文衡職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학술과 문학이 후진들에게 하나의 준거가 되었다.409) 조선 초기의 문형은 태조 때는 權近, 태종 때는 卞季良, 세종 때에는 尹淮·權踶·安止, 세조 때에는 崔恒, 성종 때에는 魚世謙·洪貴達, 중종 때에는 申用漑·南袞·金安老·金安國, 명종 때에는 鄭士龍 등이 잡았다. 이들에 의한 한문학의 영향도 검토되어야 한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은 조선왕조 문학의 지향점으로서, 문학의 이념은 성리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한문학과 성리학의 무르녹은 접합은 선조대, 이른바 ‘穆陵盛世’에 들어와서 성립되어 ‘性情美學’으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성리학이 한문학의 주된 이념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정도전이다.410) 趙東一,<鄭道傳의 文學思想>(≪韓國漢文學硏究≫2, 1977) 참조. 정도전은 불교사상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문학은 ‘載道之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天文·地文·人文으로 분류하고 詩·書·禮·樂이 人文이고 인문은 道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문학은 載道的 주제의식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411) 鄭道傳,≪三峯集≫권 3, 陶隱文集序. 정도전의 文以載道論은 권근의≪入學圖說≫을 위시한 일련의 글들에 의해 이론적 체계가 더욱 공고히 되었다. 정도전과 권근이 조선문학의 이념을 확립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고려말 기강의 문란과 도덕적 황폐화에 편승하여 문학은 흥미 위주로 흘렀고, 이같은 문단풍토에서 정도전·권근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문이재도론을 제창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조선의 新文學이 형성된 것이다. 신왕조에 의한 구왕조 문학의 극복이었다. 그것은 체제의 확립과 지속에의 의지와 맞물려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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