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맥락
  • (2)≪동문선≫과 조선문학

(2)≪동문선≫과 조선문학

 태조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건국의 주역을 담당한 지식인들은, 개국의 기틀을 전통적인 禮樂思想과 右文政策으로 삼았다. 예악사상과 결부된 한국 한문학의 유산은 풍부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저조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예악사상이 봉건적 잔재로 잘못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예악사상과 접맥된 한문학의 꽃은 樂章文學이다. 악장문학의 대표적 작품은≪龍飛御天歌≫와 정도전의<納氏曲>·<靖東方曲>·<文德曲>등인데 모두가 처음에는 漢文으로 창작된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들 악장이 국가의 공식행사 때, 전통적인 향악곡조에 의해 가창된 것 같지만 그 형식은 四言·五言·六言의 고시체로 되어 있다. 악장문학은≪詩經≫의 雅·頌에 뿌리를 두고 있다.≪시경≫의 아송이 春秋시대 해당 諸侯國들의 체제유지와 직결된 것처럼 악장문학도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그 정신을 참작한 문학이다. 정도전은 아송이 폐지된 뒤부터 사인의 詩情이 원망과 비방에 치우치게 되었고, 뒤이어 昭明의≪文選≫이 나온 이후부터 그 폐단에 섬약이 추가되었다고 주장했다.412) 鄭道傳,≪三峯集≫권 3, 若齋遺藁序. 아송은 춘추시대의 악장이다. 風·雅·頌에서 風雅 또는 아송으로 합쳐져서 사용되고 있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소명태자의≪문선≫은 風에 근원한 문학작품의 집대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문선≫을 아송의 폐지와 관련짓는 정도전의 시각은 주목된다. 그렇다면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일찍이 폐지된 아송을 15세기 벽두에 우리 나라에서 정도전이 부흥시킨 셈이다. 현재의 기록을 참작하면 악장은 신라·고려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데 반해, 예악사상에 입각한 명실상부한 악장이 정도전에 의해 조선에서 되살아난 사실은 특히 주목된다.413) 조선 초기 樂章에 대한 연구는 梁太淳,<樂과 樂章>(≪古典詩歌의 理念과 表象≫, 林下 崔珍源博士 停年紀念論叢, 1991)과 曺圭益,<鮮初樂章의 國文學的 位相>(위의 책)에서 밀도있게 검토되었다. 신왕조의 창설 및 개국의 정당성과 지속을 위해 이미 폐기된 것으로 이해된 예악사상을 부활시켜 악장을 제정한 사실은 형안이다. 정도전은 예악사상을 폐기할 사상이 아니라 15세기에도 중요한 몫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이념으로 생각하였다. 아울러 관심을 끄는 점은 정도전이 민족의 전통적 규범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民族禮樂으로 전개한 사실이다.

 예악사상과 더불어 詩文을 국가 경영의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 것은 그 역사가 오래이지만, 외교문서를 작성한다는 차원에서 벗어나 민족의 심성을 체제가 장악한다는 인식은 정도전에게서 보다 강화되지 않았나 한다. 문학의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을 조선의 국시였던 성리학과 공고하게 결부시킨 것도 정도전이었다. 그는≪문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문선≫을 열심히 읽으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주자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문선≫의 폄하는 문학의 서정성을 과소평가한 것인데, 이같은 정도전의 시의식에서 시문은 載道之器라는 문학관이 배태되었다.414) 鄭道傳,≪三峯集≫권 3, 陶隱文集序. 조선 초기에 재도적 문학론이 활발하게 발휘되지 못한 이유는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한 정도전의 정치적 실각과 관계가 있다. 그가 제거되지 않았다면≪東文選≫이 그처럼 방대하게 발간되었을까 하는 가정도 해봄직하다. 조선 초기에 道學派와 詞章派의 대립을 인정한다면≪동문선≫의 발간은 사장파적 시각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사장파의 승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편찬태도에 대해서는 줄곧 문제가 제기되었다. 李睟光은 한국의 역대 시선집을 비평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 나라의 시문선집은 많지 않다. 佔筆齋 金宗直이 편찬한≪靑丘風雅≫와≪東文粹≫가 비록 정선했다고 하지만 지나치게 간소한 것이 흠이다. 오직≪東文選≫만이 광범하게 수록하고 있긴 하나, 편찬자의 주관적 시각에 준해서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배제했다.≪續東文選≫은 더욱 심하여 狗尾續貂의 비난을 면키 어려워 식자의 한이 되고 있다(李睟光,≪芝峰類說≫권 7, 經書部三, 書籍).

 ≪동문선≫이 널리 자료를 수록한 점은 인정되지만, 편찬자의 주관적 好惡에 의하여 정작 가치있는 시문이 탈락된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도학파와 사장파의 문학적 갈등의 와중에서, 도학파가 사장파의 사장적 시의식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제시한 논리가 이른바 吟咏性情論이다. 조선 초기의 도학파들은≪동문선≫에 수록된 시문이 음영성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文以載道論에도 저촉되는 작품들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동문선≫의 主選者는 盧思愼·姜希孟·梁誠之·李坡·徐居正 등이다. 이들은 도학파라기 보다 사장파에 가까운 훈구사인이다.≪동문선≫에 수록된 작자와 작품들은 이들이 추앙했던 인물들과 친분이 닿는 친숙한 작가들일 것은 당연하다. 이수광은 이 점에 대해 불만을 느껴 “愛憎에 기준하여 작품들을 선발했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개꼬리로써 담비를 이었다”라고 혹평한≪속동문선≫의 주된 편자는 申用漑·金詮·南袞 등인데 이들 역시 도학파로 보기는 어렵다.≪동문선≫과≪속동문선≫은 시문을 위시한 문장을 중시하는 사장파적 인식에 기저한 인물들에 의해 편찬되어 도학파들에 의해 비판받았지만, 이 두 책에는 민족문학의 중요한 유산의 상당 부분이 담겨 있다.≪동문선≫은 조선의 右文政策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문학의 종합정리 및 편찬간행은 뜻깊은 작업이었다.≪동문선≫과≪속동문선≫은 중국≪문선≫을 모방하여 편찬했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중국의≪문선≫보다 더 풍부하게 수록하고 더 훌륭하게 엮어낸다는 의식을 지녔던 것 같다. 우선 양적으로 보아도≪문선≫보다 적지 않다.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으니, 전대의 문학을 종합정리해야 한다는 사명이 근저에 깔려 있다. 신왕조가 들어서면 前朝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하였던 의도와도 연결된 것이다. 고려가 건국되자≪三國史記≫를 편찬했고, 조선이 성립되자≪高麗史≫를 찬술한 사실이 그것이다. 전 왕조의 역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간행한 주된 이유는 표방한 명분 못지않게 창출된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 그리고 무궁한 존속에 있다.≪삼국사기≫는 고려왕조 창립의 필연성이 주제이고,≪고려사≫는 조선왕조체제의 출현이 천명임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실증적 기술과 춘추대의 등을 강조하지만, 실질적 주제는 수립된 새 정권의 당위성이다. 바로 직전의 정권이 연출한 역사적 사실들을 당대 체제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얼마간의 왜곡을 곁들여 각색하는 것은 그래도 다소는 이해되는 바가 있다. 그러나 5천년의 민족사 전부를 당대의 유한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위해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소행은 민족사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이같은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왕조가 건국 후≪고려사≫를 편찬하고≪동문선≫을 간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체제의 정통성과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학을 활용한 조선왕조의 우문정책은 평가되어야 한다. 서거정은≪동문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래의 문학을 논하는 자가 ‘宋대의 문학은 唐대의 문학이 아니고, 당은 漢이 아니고 한은 春秋戰國이 아니며, 춘추전국의 문학은 三代나 堯舜시대의 문학일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는 진실로 정당한 견해이다. … 우리 나라의 문학은 宋·元의 문학이 아니고 한·당의 문학도 아니며, 우리의 민족문학이다. 마땅히 역대의 문학(중국문학)과 나란히 천지간에 병행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인멸시켜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周易≫에 이르기를 ‘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한다’라고 했다. 대개 천지에는 自然之文이 있으므로 성인은 天地之文을 모범으로 삼았고, 시대의 운에는 성함과 쇠함의 다름이 있는 까닭으로 文章에도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다. … 우리 나라의 문학은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성했고 조선시대에 와서 그 성함이 극에 다다랐다(徐居正,≪東文選≫序).

 문학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각각의 특성을 지닌 채 진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단순한 복고를 거부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란 시대의 변화에 올바르게 적응하거나, 아니면 정당한 방향으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서거정은 중국문학도 요순시대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당·송·명을 거치면서 변화·발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문학사의 발전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 나라의 문학은 한·당·송·원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문학임을 역설하고 중국문학과 천지간에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人文의 한 분야인 문학을 관찰하면 천하의 교화가 성취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문장을 통하여 시운의 성쇠를 읽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 나라의 문학이 조선에 와서 최고의 극성시대를 맞았다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국운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뜻이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할 때≪동문선≫은 오늘날의 문학전집류와는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동문선≫은 중국문학에서 독립하여 민족문학 수립의 의지와 접맥되었던 것이다. 조선문학의 수립 의지와 민중교화에 목적을 둔 이같은 동문선의 편찬의도는 매우 값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辭·賦·詩·文의 몇 가지 체를 수집하여, 주제가 건전하여 교화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취하고 문체별로 모아 정리한 후 130권으로 편찬하여 올렸다(徐居正,≪東文選≫序).

 “문예작품이 비록 六經과는 견줄 수 없지만 또한 가히 문운의 성쇠를 알 수 있다”는 성종의 말은, 문학의 영고성쇠를 인정한 진보적 견해이며, 문운의 興替를 알기 위해≪동문선≫의 편찬을 명하고, 이 명령을 받은 서거정 등이 ‘治敎에 도움이 되는 주제가 건강한 작품’들을 가려 뽑아≪동문선≫을 간행했다고 했다.≪동문선≫에 수록된 작품 모두가 치교에 도움을 주는 작품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이재도적 문예의식으로 볼 경우 이에 배치되는 작품도 많다. 그러나 ‘문이재도’의 道가 반드시 주자학적인 사유로 국한되어야 하는지도 문제이다. 문학에 형상된 도는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랐다.≪동문선≫을 편찬할 무렵의 도에 대한 인식은 치교나 世敎에 보다 치중되어 있는 것 같다. 문학이 6경에 바탕하고 6경의 날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치교가 깔려 있고, 문학의 治世的 기능을 載道의 한 부분으로 인식했다. 성리학적 도가 문학에 본격적으로 형상화된 것은 16세기 士林派의 등장 이후이며, 문학의 역할이 치세에서 治心的 기능으로 변모된 것도 이 무렵이다. 물론 치심의 목적은 치세에 있다. 치심이 성리학적 理氣說과 어울려 道心의 시적 형상으로 진행되면 치세적 기능은 약화된다. 16세기 이전의 문학작품에서 성리학적 주제의식과 형상의식을 찾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문학의 본령인 정감을 기저로 했기 때문이다. 후대 사림파의≪동문선≫에 대한 불만은 이같은 정황과 관계가 있다. 주제가 건강하여 치세 교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동문선≫ 편찬자의 견해는 문학이 추구하는 목표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을 문학으로 뒷받침한다는 의지도 곁들여 있다.

 문학을 통한 치교와 세교의 구현은 조선왕조 우문정책의 핵심이다. 私淑齋 강희맹도≪東人詩話≫의 서문에서 시문은 세교를 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지 시문 중에서 아름다운 것만을 오로지 취하지 않고, 은연중에 世敎의 뜻을 지닌 작품도 포함하고 있으니, 用意가 참으로 정심하다 하겠다(姜希孟,≪私淑齋集≫권 8, 東人詩話 序).

 서거정의≪동인시화≫가 미사여구의 작품보다 세교를 담은 시문을 주로 선택한 사실을 기리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예인식은 세교를 중시하고 있었고, 세교와 관계있는 주제의식이 바로 ‘詞理醇正’ 즉 건전한 주제이다.≪동문선≫의 간행은 단순한 통시적 시문의 나열이 아니라, 조선문학의 좌표를 설정한 것이다. 조선문학은 중국문학의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부속물이 아니라, 중국문학과 대등한 민족문학임을 천명했다. 역대의 시문과 천지간에 나란히 대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서문의 선언은≪동문선≫의 체제와 수록된 작품의 분량과 천여 년에 달하는 시간적 배경을 참작컨대 조금도 손색이 없다. 한문학의 모든 장르를 총괄하고 있는≪동문선≫은 그 초점을 중국에 두지 않고 우리 나라에 맞추고 있다.≪동문선≫이 우리의 시문을 실은 것은 당연하다. 당연한 사실을 새삼 부각시키는 이유는 한문학의 장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완전히 뿌리를 내려 한국 한문학이 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동문선≫은 성종 14년(1478)에 찬진되었고,≪속동문선≫은 중종 13년(1518)에 간행되었다.≪동문선≫과≪속동문선≫은 조선 전기 민족문학을 정리한 중요한 저술이다. 이 두 저술로 말미암아 중국과 대등한 자리에 어깨를 부비며 횡행할 조선문학의 입지가 마련되었다. 懶軒 金詮은≪속동문선≫의 서문에서≪동문선≫이 2천년의 시간을 포괄하면서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자부했다. 과거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할 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문학을 높이 평가한 사실은 주목된다. 삼국시대보다 고려시대가,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 문학이 훌륭하다는 발전론이 그 근저에 깔려 있다.

 ≪동문선≫의 서문을 쓴 서거정과≪속동문선≫의 서문을 쓴 김전의 견해는 당대 지식인의 문학적 긍지를 대변했다. 그들은 조선문학이 중국문학과 대등하다고 확신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문학을 바탕으로 하고 조선의 민족문학 수립의지 위에서 전개된 조선왕조의 문학론은 문이재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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