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1) 한문학의 맥락
  • (3) 문이재도론의 전개

(3) 문이재도론의 전개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형성된 조선문학 정립의 의지는 1세기가 지난 후≪동문선≫과≪속동문선≫으로 구체화되었다. 조선문학이 고려시대의 문학과 다른 점은 조선왕조 특유의 문학론을 깔고 있었다는 데 있고, 그 문학론의 핵심은 문이재도이다. 문이재도의 道는 시대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다. 시대에 따라 도의 개념을 달리 인식한다는 것은 재도론의 발전이고, 경화되지 않고 생동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재도론은 주제론에 가깝다. 문학의 정당한 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단히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조선조가 왕조의 창건과 문학을 접맥시켰다면, 조선조 문학의 주제는 창업을 구가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건국의 주역들은 이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세교 또는 치교 등으로 표현했다. 세교와 치교적 주제의식이, 조선의 국시였던 유교적 이념과 접맥될 것은 당연하다. 중국에서 이미 퇴조한 지 오래된 성리학을 국시로 채용한 것도 특이하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사실은 체제유지의 입장에서 보면 절묘한 선택이었다. 성리학은 조선의 도덕적 재무장에 기여하여 사회를 청정하게 정화시켰다. 고려시대의 부화 화미한 문풍을 건실하게 변모시킨 것도 성리학적 문학론인 문이재도의 功效로 보아야 한다. 문학이 언제까지나 탄식하고 절규하고 음란과 분방만을 일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문학의 본령을 질탕한 정감의 형상으로 국한하려는 경향을 은연중 갖고 있다. 문학에 대한 이같은 인식태도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근래에 와서 도에 대한 해석을 현실문제로 보는 시각도 주목되는 면이다. 문이재도의 도를 현실문제로 보면, 문이재도론은 사실주의적 문학론으로의 파악이 가능하다. 도의 개념이 성리학적 심성론에 한정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위와 같은 현실의 제문제로 이해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 하겠다. 여하튼 조선문학의 문이재도는 성리학적 사유가 근간인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문이재도적 문예의식은 고려시대 崔滋의≪補閑集≫서문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문헌에 나타난 것에 국한하지 않을 경우 재도적 문예의식은 훨씬 위로 올라갈 것이다. 본격적인 재도론의 시발은 도의 어의적 범주를 성리학적 이념을 주개념으로 삼은 이후부터 잡아야 한다. 고려시대의 문예미학은 전래 문헌이 적기 때문에 그 실상이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문예작품의 美意識의 경우 고려시대가 조선 전기보다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논의된 감이 있다. 조선 전기는 문이재도론의 영향으로 작품의 미학적 검토와 접근이 약화되지 않았나 한다. 고종 8년(1221)에 발간된≪破閑集≫에 託物寓意的 형상사유가 논의되고 있다.415) 李仁老,≪破閑集≫下. 또 新意와 換骨·奪胎 등도 논의되고 있다. 13세기 무렵부터 시문의 주제 못지않게 미의식에도 관심을 가졌음이 확인된다. 고려시대 한문학은 미의식에 치중했기 때문에 주제의식이 등한시되어 浮華한 시문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선의 사인들은 부화를 배척하고 典雅를 숭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416)≪續東文選≫序(金詮). 문이재도는 주제의식에 더 치우쳐 있다. 문이재도는 고려문학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최자는 시문은 경전의 사상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은 도를 실천하는 문호이어서 경전의 뜻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氣를 부추기고 언어를 나열하여 당대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면 險怪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항차 시의 창작은 比와 興과 諷喩의 형상의식을 근본으로 하는 까닭으로 奇怪를 가탁해야만, 氣가 장렬하고 의미가 심오하며 문사가 찬연히 드러나 인심을 감동시키며 오묘한 취지를 발양하게 되어 마침내 正에 귀착함을 목표로 삼는다(崔滋,≪補閑集≫序).

 최자는 文과 詩를 분류하여 문은 경전에 보다 밀착되어야 하고, 시는 比·興·諷喩의 형상의식에 의해 표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반드시 특이하고 비범한 소재나 주제를 가탁하여 형상해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독자의 심금을 울리게 되고, 독자가 시적 감동을 느꼈을 때 正에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시의 표현기법을 중시한 것은 주목된다. 최자는 문학을 완전한 재도의 도구로 인식하지 않았다. 비·흥·풍유의 고전적 미의식에 관심을 표명했다. 최자가 말한 정은 성정의 올바름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문이재도는 주자학의 전래와 보급에 따라 그 색채가 보다 진해지고 내용이 충실해졌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근거할 때 13세기 초엽에 이미 문이재도적 주제의식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학이 도를 담아야 한다는 의식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이 하나의 문학론으로 정립된 것은 13세기로 보아야 한다. 동방이학의 비조 安珦이 원에 가서≪朱子全書≫를 베껴온 연대가 충렬왕 15년(1289) 전후인데,≪보한집≫은 고종 41년(1254)에 편찬되었으니,≪주자대전≫이 수입되기 35년 전에 문이재도론의 맹아가 보인 것이다. 위에 인용한 최자의 글에서 우리는 그가 한문학의 미의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比·興·賦’ 중에서 ‘부’를 배제하고 그 대신 풍유를 거론할 것과 일종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지는 ‘寓託’을 강조한 점도 특이하지만 아직 문이재도론이 하나의 문학론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한국문학에서 문이재도론을 이론적 체계를 세워서 본격적으로 전개한 사람은 정도전이다.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문이요, 산천과 초목은 땅의 문이고, 詩書禮樂은 사람의 문이다. 하늘은 氣로, 땅은 形으로, 사람은 道로써 文을 구현시킨다. 그러므로 人文은 載道之器이어야 하는 것이다(鄭道傳,≪三峯集≫권 3, 陶隱文集序).

 주자학을 전근대적 보수의 대명사로 착각하는 오늘의 안목으로 보면 정도전의 위 문장은 진부할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무렵에는 대단히 참신하고 진보적 문학론이었다. 13세기 이후 수입된 성리학은 당시 학자들에게는 충격이요 경이였다. 정도전이 전개한 재도론은 16세기의 재도론과 대비하면 성리학적 심도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국공신에 의한 재도론의 고취는 당시 詞壇에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정도전은 위에 인용한<陶隱文集序>에서 계속하여 道學을 척도로 한 文統을 제시했다. 이는 주자의 道統文學을 연상케 하는 주목되는 선언이다.417) 車相轅,<宋代古文運動의 理論과 批評>(≪서울大論文集≫13, 1967) 참조. 그는 민족문학의 문통으로 乙支文德·崔致遠·金富軾·李奎報·李齊賢·李穀·李仁復·李穡·鄭夢周·李崇仁·朴尙衷·朴宜中·金九容·權近·尹紹宗 등을 열거하고 정도전 자신도 문통에 끼어야 한다고 했다.418) 鄭道傳,≪三峯集≫권 3, 陶隱文集序.<도은문집서>는 조선 개국 이전 우왕 14년(1388) 10월에 씌여진 글이다. 이 해 6월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창왕을 세웠다. 정도전의<도은문집서>는 본격적 문이재도론을 논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최초의 도학을 근저로 한 문통을 수립한 중요한 글이다. 을지문덕·최치원·김부식·이규보는 전통적인 차원에서 논의한 것 같고, 그의 실재적 문통의 시발은 이제현으로 잡고 있다. 이제현을 필두로 이어진 문통의 흐름은 성리학을 문학의 정통이념으로 삼았다. 이곡을 비롯해서 이인복·이색·정몽주·이숭인·박상충·박의중·김구용·권근·윤소종으로 이어지는 문인들 모두가 주자학을 공부했던 인물이다. 정도전은 이들 주자학적 문인들 틈에 자신도 포함된다고 자부했다. 사실 그의 내심에는 주자학적 문통의 확립자는 자신이라는 긍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잡은 문통은 도통과 관련이 있다. 奇大升은 한국 성리학의 도통을 안향·이제현·이색·정몽주·길재·金叔滋·金宗直·金宏弼·趙光祖로 맥이 이어진다고 했다.419) 奇大升,≪高峯全集≫論思錄 下篇. 문통을 도통과 결부시킨 것은 조선시대 문학의 특징이다. 기대승은 고려시대의 문학을 평하여<論思錄>上篇에서 애쓴 것은 章句요, 숭상한 바는 詞藻일 뿐이라고 했다. 서정위주의 시문을 격하하고 明道的 시문을 평가하는 선상에서 문통을 짠 것이다. 이는 시문의 이념화로 문학의 전통적 통념을 거부한 획기적인 문예의식이다.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문이재도론은 최치원 이후 펼쳐진 한국문학의 맥락 속에서 제시된 충격적인 문제제기였다. 문이재도론은 정도전의 실각으로 얼마간 타격을 받았지만, 권근에 의해 계승된 감이 있다. 그러나 15세기의 사단은 반드시 문이재도론에 의해 주도되지만은 않았다. 도통과 문통의 접합이 한문학에 기여한 점도 많지만 理語의 나열을 시로 착각하는 경향의 대두로 말미암아 시문을 독자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정도전과 권근 등에 의해 제기된 문이재도론은 서거정에 와서 진일보하여 정연한 논리적 체계를 갖추었다.

우리 나라의 문학은 삼국시대에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발달했고 조선시대에 와서 극에 이르렀으니 천지기운의 성쇠에 관계됨을 증명한다. 하물며 문학은 도를 꿰는 도구라는 것은, 6경의 문은 문을 지으려는 의도가 없었는데도 절로 도에 부합되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후세의 문은 문을 지으려는 의도가 앞섰기 때문에 간혹 도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지금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들은 진실로 도에 마음을 두어 글을 짓는데 급급하지 아니하고, 경전에 뿌리를 두고 諸子를 쫓지 말며 雅正을 숭상하고 浮虛를 멀리하여 高明正大를 추구하고, 성경을 우익하면 반드시 道를 자득하게 된다. 만일 억지로 글짓기에만 몰두하고 도에 근본하지 않고 6경의 법도를 배반하여 제자의 경계에 빠지게 되면 문학은 도를 꿰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徐居正,≪東文選≫序).

 서거정은 諸子百家에의 탐닉을 배격하고 오로지 6경에 전념할 것을 권고했다. 서거정은 성종 5년(1474)에≪東人詩話≫를 출판했고 뒤이어 성종 17년에는≪筆苑雜記≫를 발간했다. 저자의 생존시에 두 권의 시화집이 발간된 것인데, 이는 서거정의 당시 위상을 짐작케 한다. 文以貫道를 제창한 그이지만, 그의 문학은 16세기 사림파의 안목으로 본다면 문이재도론에 충실한 편은 아니었다. 서거정은 사장파에 경사한 인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가 제시한 ‘有意於文’과 ‘非有意於文’의 대비는 문학작품의 强作을 경계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시문을 짓기에 앞서 충분한 지식과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은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문이관도와 문이재도의 차이에 대해서 이견이 있지만, 본질적인 차등은 없는 듯하다. 문이관도나 문이재도는 한결같이 문장을 억지로 지으려는 의도를 배제했다. 이른바 ‘不文於文’이다. 이 경우 ‘文’은 미세하게 분석하면 문장을 雕琢한다는 의미도 있다. 글은 충분한 공부와 操存省察에 의해 축적된 和順이 샘물이 절로 솟아나듯 발로되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6경이 문학의 주제와 형상의식의 본원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문예의식으로 구체화되는 시점은 역시 조선왕조의 건국에서 찾아야 한다. 정도전은 중국의≪문선≫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지만≪동문선≫의 찬자들은 “昭明이 여러 작품들은 뽑았기 때문에 고문이 남아 있고, 眞德秀가 群英을 모았으므로 正宗만이 전해졌다. 이처럼 각 시대마다 편찬이 있었던 까닭으로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다”420) 徐居正,≪東文選≫箋(盧思愼·姜希孟·徐居正·梁誠之 進).라고 하여 그 가치를 인정했다.≪동문선≫에 수록된 시문 대부분이 문이재도와 관계가 없다. 조선의 右文政策의 지표가 문이재도론이었기 때문에 序와 箋에서 이 점을 밝혔고, 아울러≪동문선≫이후의 문학에 뜻을 둔 자들은 반드시 이에 근거해야 한다는 좌표를 설정하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

우리 주상께서 舜의 ‘精一’을 본받고 堯의 ‘文思’를 계승하고 ‘風·雅’가 정치와 통한다는 사실을 살펴서 文詞가 도를 싣는 그릇임을 헤아려 과거 현철들의 걸작을 모아서 장래 학자들의 모범이 되게 했다(徐居正,≪東文選≫箋(盧思愼·姜希孟·徐居正·梁誠之 進).

 文詞를 載道의 도구로 한다고 했다. 貫道와 재도는 이처럼 혼용되고 있었다. 문이관도와 문사재도에서 문과 문사를 차별을 둔 단어로 본다면 관도와 재도는 얼마간의 변별이 있는 듯하다. 윗글에서 風雅, 즉 문학이 정치와 통한다는 표현에서 우리는≪동문선≫이 治化와 敎化의 차원에서 편찬된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문학과 정치, 문학과 도학의 관계는 이처럼 완강하다. 문학이 정치, 또는 이념과 결부되면 서정영역은 좁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문이재도적 문예의식은 표방되고 주장된 것에 비해, 실재 창작활동에의 적용은 철저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햐면 문학은 머리보다 가슴에, 이성보다 감성에 근거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시인의 맥락을 잡은 것으로 인정되는 林下 李裕元은 조선 한문학의 詩派를 아래와 같이 열거했다.

조선의 시인은 徐居正 이후부터 金宗直·金時習·成侃·李胄·朴誾·李荇·申光漢·鄭士龍·奇遵·朴祥·林億齡·林亨秀·朴淳·盧守愼·黃廷彧·高敬命·崔慶昌·白光勳·李達·車天輅·李安訥·權鞸·崔岦·林悌·任錪·李春英·李睟光·許筠·李春元·李植·李敏求·鄭斗卿 등이 있다(李裕元,≪林下筆記≫권 30, 春明逸史).

 이유원은 19세기의 인물이지만 그가 열거한 시인들의 시대는 15∼17세기에 국한되어 있다. 서거정을 조선 한시의 정종으로 잡은 것은 주목된다. 위의 士人들은 거의가 성리학에 심취한 자들이 아니다. 조선의 사인들의 경우 성리학이 기본 교양이었음은 물론이다. 노수신은 양명학에 심취했다고 이황이 비난한 인물이고, 마지막으로 인용된 정두경은 서정이 흐드러진 분방한 短歌 두 수를 남겼다. 임제 역시 단가를 남긴 풍류객이었다. 이수광·이민구 부자가 들어간 것도 특이하다. 이유원은 도통에 입각한 詩派를 인정하지 않고, 서정에 바탕한 작가를 위주로 문통을 세웠다.

 17세기가 지나면서 성리학은 그 광휘를 잃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문이재도론도 힘을 잃어 갔다. 그러나 내실과 달리 외피는 유효한 것으로 韜晦되어 얼마간 더 지속하는 것이 관례이다. 사림파와 사림파문학의 전성시대에는 이른바 詩話類는 거의 저술되지 않았다. 시화류는 17세기부터 풍성하게 저작되었다. 조선 전기 특히 16세기는 문이재도론에 근저한 明道詩 계열의 작품이 사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 창작활동에는 서정시도 많이 창작되었고 독자들의 관심도 만만치 않았음을 이유원의 글에서 알 수 있다. 이유원이 설정한 조선조 시파에 도학과 관계된 명도시를 즐겨 창작했던 사인들이 빠져 있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三唐詩人 및 권필과 이안눌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인들이었다. ‘松都三絶’로 이름난 車天輅와 崔岦이 들어 있고, 김시습을 김종직과 나란히 놓고 있다. 위에 등장한 사인들은 대개가 도학에 근거한 문통에는 포함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조선의 시파에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이유원처럼 전통적 서정시에 바탕을 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리학과 직결된 문이재도적 시의식을 바탕으로 한 명도시를 준거로 한 시파이다. 명도시의 영역은 매우 광범하다. 山水를 매체로 하여 도를 형상한 산수시 등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명도시의 대표적인 품격은 典雅와 冲淡이다. 이를 좀더 포괄적으로 표현하면 溫柔敦厚와 직결된다. 온유돈후는 詩敎이고, 시교의 변용이 문이재도이며, 문이재도의 구체적 창작에의 적용은 전아와 충담이 위주였다. 앞에서 인용한≪임하필기≫의 ‘我朝詩派’는 이유원의 독창적 견해라기 보다는 당시 보편화된 일반적인 문통의 실상을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선현들의 저술에는 ‘述而不作’적인 편찬의식 때문에 저자가 이전의 기록들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경향이 허다했다. 서책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 속에서 자료의 번다한 재인용은 필요한 시도로 인정된다.

 동양문학의 전통적 미의식은 ‘比·興·賦’와 이에 수반된 온유돈후와 온유돈후의 문학적 형상과 관련된 전아와 충담의 품격의 고찰로 그 일단을 파악할 수 있다. 이같은 미의식은 송대부터 사단의 핵심적 미의식이 된 문이재도론에 의해 그 범주가 더욱 뚜렷해졌다.≪시경≫의 ‘六義’ 가운데 부는 비나 흥보다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부의 표현기법이 直抒여서 격이 낮은 것으로 파악한 때문인 듯하다. 15세기 이후 특히 16세기에는 흥이 관심을 끌었다. 흥은 서양의 미의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독특한 미학으로, 은유나 상징 등의 표현기법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흥은 독자의 무한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흥에 입각한 미의식에 의해 창작된 작품은 범상한 독자를 용인하지 않는다. 흥에 근거한 미의식은 ‘因物起興’으로 구체화되어 조선 전기 사단의 격이 높은 작가들에게 향유되었다.421) 李敏弘,≪士林派文學의 硏究≫(瑩雪出版社, 1985), 106쪽에서 ‘入道次第’와 대비시켜 문이재도론의 미학적 승화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온유돈후가≪속동문선≫의 箋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문풍에 영향을 더욱 끼쳤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전은 계속하여 조선문학은 雅·頌의 美와 온유돈후한 작풍으로 인해 三代의 문풍을 쫓아가게 되었다고 자부했다.≪속동문선≫은 문이재도를 확실하게 논의했다. 도가 문에 수용되어야 하며 문이 도를 배제하면 그것은 문이 아니라고 선언했다.422)≪續東文選≫箋(金詮·南袞·崔淑生 進).≪동문선≫의 편찬 당시보다 문이재도론이 훨씬 강화되었음은 느낄 수 있다. 주자학의 전래와 더불어 밀도 깊게 전개된 문이재도론은 향후 6세기 동안 조선문학의 중요한 미의식으로 작가들에게 향유되었다. 15세기를 지나서 16세기에는 문이재도론이 심화되어 성정미학으로 발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문학이 중국문학과 대등한 위상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전개된 문이재도론은 한국적 굴절을 거쳐 성정미학으로 완성되어 16·17세기의 詞壇에 주된 미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를 경과하면서 한문학이 발휘되어 조선에 와서 명실상부한 조선문학으로 확립되었는데, 그것이 조선문학일 수 있는 까닭은 문이재도론이 승화된 성정미학의 창출과 그 적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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