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2) 사림파의 한문학
  • (1) 목릉성세와 성정미학

(1) 목릉성세와 성정미학

 士林派는 勳舊士人에 대항하여 등장한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주자학을 이념으로 지닌 士人들이다. 당시 중국의 학계에 비하여 그들은 중국의 지식인들을 능가하는 존재로 확신했다. 사림파가 활동하던 穆陵盛世423) 金台俊,≪朝鮮漢文學史≫(朝鮮語文學會, 1931), 133쪽에서 선조대를 ‘穆陵盛世’라고 칭했다.의 조선학계는 세계 최고의 학문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학문적 수준을 지녔다는 우월감은 寒岡 鄭逑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확인된다.

지역에는 遠近이 없고 道에는 內外(中國·朝鮮;필자)가 없다. 退陶선생은 평생동안 우리 朱夫子의 학문에 潛心하여, 그를 흠모한 吟詠의 작품이 많은 터에 오히려 元·明의 諸子의 반열에 들지 못한 사실은 잘못이다(鄭逑,≪寒岡先生文集≫권 10, 武夷志跋).

 정구의 이 주장은 武夷櫂歌 和韻을 두고 한 것이긴 하나, 문맥 속에는 원·명의 지식인들보다 앞서 있다는 자긍이 담겨 있다. 그런데 철학인 주자학과 문학의 접맥은 문학의 입장에서 많은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철학의 매체나 도구로 전락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황과 이이가 도산서원과 은병정사에서 강의를 하고 시를 지었던 16세기 조선 사단의 경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들은 문학, 즉 시가 지닌 탁월한 가치를 인정하여 문학이 철학의 예속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6세기에 들어와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발전하여 主理論·主氣論 또는 이의 절충이 나타났다. 주리파와 주기파는 확연하게 구획지울 수 없지만, 그들이 창출한 문학의 양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주리·주기론의 분파적 전개는 당대 형이상학의 고도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人性과 物性의 상호 연관에 관한 인식에서 理發과 氣發의 논리가 형성된다. 문학은 이발·기발의 원인이 되는 外物의 有我的 형상과 無我的 형상 또는 외물에서 象을 취하느냐 義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유아적 형상은 주관적, 무아적 형상은 객관적인 묘사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적 시각으로 말한다면 유아는 私요, 무아는 公이다.

 性情美學은 사를 배제하고 공을 근간으로 하며 유아를 배척하고 무아를 闡揚한다. 공은 외물과 內我가 간격이 없이 하나가 된 이른바 物我一體를 의미하고, 사는 人欲에 가리워져 天理가 흐르지 못하여 利와 惡에 의해 大公의 도리가 폐색된 것이다. 공과 사의 나뉘어짐은 티끌 정도의 간격이지만, 그 그 진행의 결과는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넓어진다. 유아로 나아가게 하는 인욕은 인성이 외물과 접촉할 때 나타나는 것이고, 이목구비가 향수하는 聲色臭味는 인욕의 발동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인욕의 발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공이 아닌 사로 전락한 경우로 이해했다.424) 公·私·人欲·天理의 개념은 盧守愼,≪穌齋集≫內集 下篇(≪文集叢刊≫35, 1981, 480쪽)의 일부를 요약했다. 이하 性·情 등의 개념은 노수신의 정의를 따른다. 그가 비교적 간명하게 요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림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올바른 外物認識을 갖는 것이었다. 외물과 내아가 물아일체가 되자면 유아를 버리고 무아가 되어야 한다. 무아의 경지에서는 天理가 流行한다. 천리는 물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어야만 자연스럽게 유행한다. 이렇게 될 경우 仁·義·禮·智·信의 五性이 갖추어진다고 했다. 성정미학은 5성의 문학적 구현을 근본 목적으로 삼고 감성과 정감을 배제한다. 성정미학에서 배제한 감성과 정감은 절도에 부합되지 않은 情을 지칭한 것이다. 정은 원래 선한 것인데, 私(有我)에 의해 법도를 벗어난 이른바 橫發된 정을 뜻한다. 정이 절도에 어긋난 이유는 외물(사물)과 내아의 잘못된 접촉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조선의 한문학을 검토함에 있어서 성리학의 용어가 지닌 意味網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性과 情, 志와 意, 心과 命 등의 철학적 어휘들이 지닌 뜻을 밝혀내야 한다. 이들을 규명하지 못할 경우 특히 조선 전기 한문학의 고찰은 변죽만 울리고 말 위험이 따른다. 이 시대의 한문학 작가들 모두가 성리학자였다. 이 점은 15세기보다 16세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15세기의 작가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향유하지는 않았으나 16세기의 작가들은 성리학을 철저하게 이념으로 향수했다. 따라서 15세기의 한문학과 16세기의 한문학은 그 양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른바 성정미학은 16세기 작가들에게는 공통의 미학이었다.425) 李敏弘,<性情美學과 山水詩>(≪韓國漢文學硏究≫15, 1992). 성정미학의 잣대를 활용하면 16세기 사림파 한문학의 거의 전부가 밝혀진다. 물론 성정미학과 거리가 있는 작가나 작품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미미한 지류일 따름이다. 조선 전기의 한문학은 성정미학에 근거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에 전세계로 확대시켜 놓고 보아도 독특한 광휘를 발하는 독보적인 문학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문학의 영향권에서도 벗어나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조선 특유의 조선문학을 창출한 것이다.

 16세기 사림파의 한문학이 조선 특유의 한문학일 수 있는 기저는 세계 모든 문학과 변별되는 성정미학적 문학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정미학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 전기 한문학의 독특한 위상을 밝히고자 한다. 성정미학은 剌詩보다 美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림파는 문학의 주제영역에서 자시 계열의 현실비판 분야를 배제했다. 긍정적인 주제를 형상시켜 인성을 순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 소설에 있어서 작가의 객관적 묘사가 필요한 것 못지않게 한문학 연구에도 객관성이 필요하다. 객관적 연구 시각은 성정미학에서 요구하는 이른바 유아적 시각을 삼가고 무아적 외물인식을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유아와 무아에서 유아와 관계없이 ‘我’는 개입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는 사에 이끌려 공을 밀어낸 감성적 주관과 관계가 있다. 사림파의 한문학은 무아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서정성과는 차이가 있다. 무아는 虛心과 직결되어 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유아적 사심을 버리는 것이다. 허심에서 무아가 나오고 무아의 경지에서 以物觀物의 정당한 외물인식이 형성된다. 李睟光은≪性理大全≫에 근거하여 허심에 관해서 주목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聖人의 마음 속에는 만물이 구비되어 있지만, 마음 안에는 하나의 외물도 없다. 무릇 마음 속에 아무것도 없는 까닭으로 능히 외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대개 외물을 쫓는 자는 외물에 의해 가리워지고, 마음 속에 외물을 배제한 사람은 족히 외물의 물성을 파악할 수 있다(李睟光,≪芝峯類說≫권 5, 心學).

 詩文의 제재로서 나타난 외물을 보는 內我의 인식각도에 대한 설명이다. 내아에는 공과 사가 공존해 있다. 사림파에 있어서 내아의 개념 속에는 사가 배척되었다. 사를 배척함으로써 허심이 되고 허심의 상태에서 물아일체가 이룩된다. 물아일체의 상태에서 외물과 접촉된 내아는 性情之正에 도달한다. 성인의 마음 속에는 삼라만상이 구비되어 있지만 그것은 전부 공인 까닭으로 기실 사적으로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성정미학은 성정지정만을 포용한다. 성정지정이 아닌 모든 인욕은 거부한다. 따라서 성정미학에 입각하여 창출된 작품에는 격정도 애욕도 분노도 애상도 없는 까닭으로 독자에게 외면당할 소지가 많다. 이것은 조선의 한문학계에서 가장 큰 광맥의 하나인 사림파의 한문학이 별로 주목받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외물을 사적인 정감으로 인식할 경우, 눈물과 웃음과 탄식과 흥분이 있다. 외물을 자기의 사적인 소유로 했을 때 발현되는 것은 이른바 인욕이다. 盧守愼은 인욕의 구체적 하위 사항을 여섯으로 분류하고 이를 ‘六訓’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誼·利·善·惡·公·私’가 그것이다. 이 중 ‘人欲之私’에서 나온 것은 ‘이·악·사’이고, 天理가 流行하여 발현된 순수하고 無妄한 것이 ‘선’이고, 외물과 내아가 兼照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 ‘공’이며, 저절로 되어서 천리에 부합된 것이 ‘의’라고 규정했다. 소위 성정지정의 구체적 사안을 적시한다면 노수신이 규정한 의와 선과 공이 될 것이다.426) 盧守愼,≪穌齋集≫內集, 下篇, 養正錄 丙一 字訓. 노수신은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어 주자학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위에 열거한 字訓은 성정미학의 포용된 성리학적 관용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아일체에서 성정지정이 나오고, 물아일체가 되자면 허심을 해야 하며, 허심이 되어야만 외물을 절도에 맞게 인식할 수 있다. 성정지정은 무엇보다 외물과의 정당한 접촉을 강조한다. 趙翼은 외물과 정당한 접촉을 하려면 役物을 해야 한다고 했다.427) 李敏弘,<性理學的 外物認識과 形象思維>(≪국어국문학≫105, 1991)에서 役物과 役於物에 대해서 논한 바 있다. 외물에 대해서 허심과 역물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조선 5백년 동안 그처럼 집요하게 추구했던 물아일체는 어떤 양상의 외물인식에서 얻어지는 경지인가. 조익은 인성이 외물에 사역되어서는(役於物) 안되고, 외물을 사역해야(役物) 물아일체에 이른다고 했다. 외물을 부린다는 것은 나쁜 인욕에 가리워지지 않고 인성이 지닌 본래의 純善이 외물이 향유한 理를 터득하는 동인을 뜻한다. 외물이 지닌 物性을 왜곡시켜 ‘이·악·사’ 등의 인욕을 유발시켜서는 안되다는 주장이다. 송대의 蘇軾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君子는 가히 외물에 寓意는 할지언정 외물에 留意를 해서는 안된다. 외물에 우의를 하면 비록 보잘것 없는 미물일지라도 기쁨을 얻고, 비록 고약한 물건이라도 족히 병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외물에 유의를 하면 미물이라도 병통이 되고 훌륭한 물건일지라도 기쁨을 얻지 못한다. 老子가 이르기를 ‘五色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五音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며, 五味는 사람의 입을 어그러지게 하며, 들판을 달리며 사냥질을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라고 했다. 그런데도 성인이 위의 네 가지를 폐하지 않는 것은 우의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蘇軾,≪蘇東坡集≫前集, 권 32, 寶繪堂記).

 寓意는 托物寓意의 준말이다. 외물과 접촉했을 때 內我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성리학자들에게 심각한 사안이었다. 조익의 견해를 빌린다면 우의는 역물적 외물인식이라야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외물의 범주는 방대하다. 事와 物이 함께 포괄된다. 事物認識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지만 先人들이 외물을 즐겨 사용한 까닭으로 외물인식이라 했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사건들은 사에 포함되고 물에는 해와 달을 비롯해서 한줌의 재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해당된다. 성리학자들은 땅바닥에 딩구는 돌멩이 하나에도 理가 있어서, 그 리를 제대로 파악하면 지극한 교훈이 된다고 믿었다.428) 李珥,≪栗谷全書≫권 13, 洪恥齋仁祐遊楓嶽錄跋. 외물에서 그것이 지닌 리는 어떻게 하면 터득되는가에 대하여 조익은 역물적 외물인식을 거론했고, 이이는 內外無閒을 들었다.

 외물이 함유한 리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天理이다. 천리는 天命이 유행하여 저절로 稟受된 것으로, 자연계의 모든 사물과 인간에게도 함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천리가 인간에게 품수되면 그것이 바로 ‘仁·義·禮·智·信’의 五常이다. 외물에 깃든 理에는 ‘表裏精粗’와 ‘淸濁輕重’이 있는데, 성정미학에서 취하는 것은 이것들이 지닌 것 중에서 긍정적인 분야에 한정된다. 소동파는 외물에서 眞樂을 얻자면 留意를 해서 안되고 寓意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의와 우의의 대립이다. 외물에 뜻을 留한다는 것은 사심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외물을 公이 아닌 利나 私의 시각에서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喪志로 나아가 마음의 병이 생긴다는 의미다. 반대로 우의의 경우는 외물을 공정하고 善하고 誼하게 인식하는 상태라고 하였다. 이같은 외물인식은 범인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士林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한 자세로 그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성정미학은 지선지고의 이성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므로 성정미학의 진가를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16세기는 거의 모든 士人이 성리학에 심취했던 만큼 성정미학은 당시의 보편적 문예의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托物寓意는 고려시대부터 논의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意와 조선시대의 의는 그 개념이 달랐다. 조선시대의 托意는 성리학적 性情論과 관계가 짙다. 반면 고려시대의 의의 개념은 외물에 자신의 정감을 붙이는 오늘날의 감정이입과 비슷하다. 일찍이 李仁老는 승려 白雲子와 林椿의<聞鶯詩>를 대비하면서 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백운자와 임춘은 봄날에 우는 꾀꼬리 소리에 의탁하여 자신의 정감을 읊었다. 사림들이 이 두 수의 시를 본다면, 無我가 아닌 有我의 以我觀物的 외물인식에서 형상된 작품으로 인정할 것이다.429) 李仁老,≪破閑集≫권 下, 白雲子. 이 시는 꾀꼬리를 매체로 하여 悽惋의 정감을 붙였다는 평을 받았다. 荒村과 田家를 배경으로 녹수에 우는 꾀꼬리 소리에 처완의 정감을 붙였는 바, 이는 성리학적 성정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서정일 뿐이다. 사림파의 경우는 이같은 서정시를 吟風咏月이라 하여 높은 시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림파에 있어서 탁의적 미의식은 성리학적 성정론과 직결되어 있다.

 성정미학에서는 음풍영월과 鳥蟲篆刻的 문장의 꾸밈을 배척했다. 음풍영월은 이아관물의 유아적이고 분방한 서정과 관련이 있다. 사림들은 외물의 표피적 현상만을 작품 속에 형상시키면, 외물이 지닌 이면의 천리를 간과하게 되어 내아와 외물이 하나가 되지 못해 吟咏性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사림파의 서정양상은 오늘날의 詩論으로서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는 부문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특히 16세기의 문학을 성정미학으로 풀려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성정이 작품 속에 형상하는 데는 일정한 틀과 구도가 있었다. 성정이 오늘날의 서정시에서 말하는 정감과는 확실히 분별되는 것이라고 앞서도 말한 바 있다. 성정미학은 작품활동에 있어서 기본 골격이긴 하지만, 그것은 아직 추상에 가깝다. 실제로 창작활동을 할 경우 보다 구체화된 척도가 요구된다. 그 중요한 척도의 하나로 品格論이 제기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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