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2) 사림파의 한문학
  • (3) 사림파의 음영성정

(3) 사림파의 음영성정

 품격론은 그 역사가 오래다. 이는 성정미학이 성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중국에서의 성정미학은 周子·程子·朱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확립과 직결되어 있다. 성정미학은 外物과 외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內我의 성정에 근거한다. 성리학이 操存省察의 인격수양을 중요한 핵으로 삼고 있다면, 성정미학은 이같은 내아의 성정을 미적으로 형상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정미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창출할 수 있는 문예미학의 최고봉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광대무변의 사변적 이론체계인 성리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정미학의 완성은 이황과 이이가 활동했던 목릉성세에 이룩되었다. 성정미학이 성리학적 사변체계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부터 존재했던 품격론과 결부된 사실은 성정미학을 위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중국측 성정미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것을 한국적으로 변용시킨 사실이 특히 주목된다. 사공도의 품격론의 경우도 24품 전부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사림파의 미의식이었던 성정미학의 차원에서 선별적으로 향유했다. 사공도의 품격론은 성정미학에 기저한 것이 아니라 순수 문예미학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사림파의 문예의식과는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이가 전개한 품격론은 중국의 것을 일단 해체시켜 재조합한 흔적이 보일 뿐 아니라, 조선의 사단풍토에 걸맞게 재창조한 것이다. 이 점은≪정언묘선≫서와 총서를 위시해서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품격론에서 이황의 경우는 이이보다 전통적인 인식을 지녔던 듯하다. 사공도의 품격 용어가 그대로 습용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문이재도론을 수용하는 경우에도 이황과 이이 사이에는 얼마간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 차이는 퍽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서정의 영역을 놓고 볼 경우 이이가 이황보다 그 폭이 넓다. 托意의 정도를 예로 든다면, 이이가 冲淡·閒美에 치중한 반면 이황은 典雅와 雄渾에 경사되어 있다. 품격과 탁의는 긴밀하게 접맥되어 있다. 이황이 전아와 관계가 깊은 用事의 구사를 훨씬 많이 한 까닭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이이의 시어 구사는 평이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선조는 이이를 평하여 “교만하고 격한 데가 있다”라고 했다. 경연 석상에서 왕을 똑바로 쳐다보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이는 직시한다고 답변했다.443) 李珥,≪栗谷全書≫권 38, 附錄 諸家記述雜錄. 이같은 정황으로 봐서 이이가 성격상 중국이나 우리 나라의 유명한 시인의 시를 모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이는 주자를 그처럼 존숭했지만 자기의 견해와 상충되는 부분에 대해서 만일 주자가 그렇게 봤다면 그것은 주자가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독자성과 독창성이 강했다. 그러므로 이른바 문이재도론의 경우도 그 나름의 선별적으로 수용하기가 십상이지 전폭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기질상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황과 이이의 문학이 다 함께 성정미학에 근거하고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이는 삶의 괴로움을 抒情하면서 성정미학과 결부시켰다. 즉 그는 ‘物我一體’라는 말을 시속에 직접 구사하여 외물과 내아가 합일되어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 모르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에서는 이같은 주장이 흔히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인 고통과 결부되었다는 점이다. 정당한 외물인식은 현실의 세속적 고통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내 만년 삶의 괴로움과

소시에 속세에서 분주했음을 탄한다.

눈은 古書에 있었고

뜻은 羲皇시대를 동경했다.

세상에 분분한 만갈래의 累에서

정신을 온화하게 할 곳이 없다.

표연히 서울을 벗어나

궁벽한 해변에 발자취를 묻었다.

자연에서 나의 마음을 수양하니

내 한몸 모두에 煙霞가 가득하다.

子長(司馬遷)은 내가 사모하는 이이고

悅卿(金時習)은 내가 친애하는 분이다.

산수의 흥취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성정을 온전케 하고자 할 뿐

외물과 내아가 하나가 되었으니

누가 주체인지 객체인지 모르겠다.

담담하기는 맑은 호수와 같고

엄숙하기는 가을 하늘과 한 가지다.

근심도 없고 기쁨 또한 없는

이같은 경지는 사람이 도달하기 어렵다.

오묘한 이치 헤아리기 어려워

백세 동안 緇磷이 없다.

번잡한 路中子는

날더러 어리석다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知己는 없고

밝은 달만 나의 참 벗일 뿐

浩歌 한 번 길게 외쳐보니

悠悠한 천지에 봄빛만 가득하다. (李珥,≪栗谷全書≫拾遺, 권 1, 賦詩 寓吟).

 이이의 이 五言古詩는 冲淡 그것이다. 율곡이 ‘冲澹蕭散’을 제1격으로 삼았고 ‘閒美情適’을 제2격으로 삼은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사공도가 품격 雄渾을 첫머리에 두고 충담을 두번째에 놓은 사실과 대조된다. 雄은 맹렬하게 될 소지가 있고, 渾은 혼탁할 우려가 있다. 시에 있어서 맹렬함과 혼탁함은 버려야 할 것들이다. 충담의 품격이 웅혼 다음에 놓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이가≪元字集≫총서에서 주장한 대로, 문장을 분식했거나 조탁한 흔적은 전혀 없고, 古調와 古意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한시는 대체로 위의 시같은 경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이는 자신의 시의식과 품격론을 창작활동에 그대로 적용한 시인이었다. 그는 산수에서 흥을 탐하지 않고 존심양성하고 있다고 했고, 현실세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연히 서울을 벗어났다고 노래했다. 그리하여 그는 강호에서 風月을 벗삼아 물아일체로 나아갔고, 기쁨도 근심도 없는 경지에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읊었다. 그러나 宦路의 좌절에서 온 고통과, 지기가 없는 외로움, 세상사람들의 몰이해 등의 괴로움을 성리학적 외물인식으로 극복하고, 그것을 성정미학에 기저하여 시로 형상한 것이다.

 이황의 음영성정의 영역과 시각이 이이와 차이가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성정미학의 경우도 이이가 좌파적 성격이 있다면 이황은 우파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것은 좌파가 정당하고 우파가 부당하다거나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성격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품격론의 전개에 있어서도 典雅에 역점을 둔 것이 충담에 초점을 맞춘 것보다 뛰어나다는 식의 판단은 배제되어야 한다. 품격의 경우도 시대에 따라 관심과 호오의 대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황이 경사되어 있던 전아의 ‘典’은 법도에 맞고 중후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雅’는 風雅와 雅飾의 아로서 俗과 대비되는 것이다. 이황의 중심사상의 하나인 敬과도 걸맞는 품격이다. 사공도는 전아를 高古 다음에 배치했다. 본바탕에 근거하는 것을 高라고 하고 간단하고 진솔한 것이 古인데, 이것은 반드시 極處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전아로 진행된다고 했다.444) 司空圖,≪三十四詩品≫ 高古·典雅 참조. 이황의 음영성정은 대체로 전아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시의 근간이 되는 미의식으로 생각된다. 이황의 대표적 산수시인<陶山雜詠>의 품격은 전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날개를 펄럭이고 비늘을 움직이는 건 누가 시켰나

활발하고 오묘한 天理 天淵에 가득하다.

江臺에 온종일 心眼을 열면

천연은 明誠의 巨編이 된다.

                  (天淵臺)

콸콸 흐르는 물에 구름 그림자 드리우니

독서의 깊은 비유 方塘에 있는 듯

내 이제 맑은 연못가에 得意함은

흡사 당년에 길이 감탄함과 같구나.

                  (天光雲影臺)

싯누런 탁류 도도하면 형체를 숨기고

순류가 흐르면 온화가 나타난다.

저같이 사나운 물결 속에서도

천고의 盤陀石은 의연하게 서있다.

                  (盤陀石)

 위에서 인용한 이황의 시 속에서 현대적 의미의 서정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이의 시에서는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이 간혹 담겨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같은 차이는 성정미학의 인식 시각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들의 각각 상이한 삶과 더욱 연관되었는지도 모른다. 이황은 학문과 강호생활에 대한 집념이 이이보다 강하였다. 이이는 經國齊民의 정치적 경륜의지가 남달리 강했고, 경제적 여건도 좋은 편이 아니었던 사실도 참고가 된다. 天淵臺·天雲臺·盤陀石은 도산 주변에 있는 景物이다. 天淵의 물가에서 鳶飛魚躍의 다른 표현인 ‘날개를 펄럭이며 나는 새와 비늘을 움직이며 헤엄치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응시하면서, “저같은 조화의 활발함은 누가 시켰는가. 그것은 하늘의 조화이며 하늘의 이치가 유행하는 것이다”라고 감탄하고 있다. 이황은 천연대에서 전개되는 경물을 肉眼이 아닌 心眼으로 보고 있다. 심안으로 본 천연대의 경관에서 얻은 마음은 정감이 아닌 성리학적으로 정제된 性情이다. 천연대를 심안으로 관조하면서 성정으로 인식했을 때, 이황은 그것을 하나의 외물의 위상에서 벗어나 巨編으로 느낀 것이다. 天光雲影臺의 시 역시, 方塘·淸潭에서 물속에 어린 雲影을 보면서 득의에 찬 당년의 감탄을 형상했다. 천운대에서 얻은 이황의 마음 또한 성정이지 정감은 아니다. 탁류가 도도하게 굽이치는 물결을 만나면 몸을 감추었다가 물결이 잔잔해지면 형체를 드러내는 너럭바위를 통하여 격류 속에서 영겁의 시간이 흘렀는데 제 모습을 변함없이 지니고 있는 의연성을 탁의한 시<盤陀石>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왕조 5백년간 명멸했던 모든 詞人들이 한결같이 주장했던 吟咏性情의 실상은 이황·이이의 시들에서 그 진수를 엿볼 수 있다. 음영성정이 깔고 있는 이념은 성리학이고, 성리학 가운데서 특히 외물인식과 관계가 깊다. 그들은 외물 가운데서도 산수, 즉 강호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강호의 美를 볼 것이 아니라 강호의 理를 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노장사상와 불교사상을 극력 배척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이들 사상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들을 은연중 수용하고 있었다. 이황은 노장사상에 대해서 특히 경계할 것을 주장했고, 이이는 불교사상에 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목릉성세에 생존하는 행운을 얻은 그들은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세계사에 우뚝선 업적을 남겼다. 이같은 사상적 축적을 기반으로 하여 고도의 문예미학인 성정미학을 완성했고, 이를 단순히 이론적 정립에만 머물지 않고 그들 스스로 성정미학을 작품을 통해 확실하게 구현시켰으며, 아울러 그들은 이른바 음영성정의 구체적 모범시문을 詞壇에 제시했다. 그들은 또 문학이 주제론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품격론을 제기 또는 전개하여 성정미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그러나 문학을 지나치게 이성에 근거하도록 유도하여 서정의 폭을 좁혔기 때문에 시를 생경으로 나아가게 한 결함을 배태하고 있었음도 지적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완미한 미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그 자체가 미학에 있어서 보수적 정체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17세기를 지나면서 성정미학은 풍화되기 시작했고, 뒤따라 음영성정이 아닌 天機流動의 미의식이 대두하여 사단에 뿌리를 내리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은 것은 조선왕조 文藝美學史의 진행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李敏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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