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2. 국문학
  • 1)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학

1) 훈민정음 창제와 국문학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세종 28년에 반포된 訓民正音은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기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는, 세계 문자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문자이다.

 훈민정음이 사용되면서 문학사에서 큰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훈민정음은 먼저 한문을 대신하는 글이고, 한자에 의한 국어 借字表記를 대신하는 국문이라는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이전의 문학사는 기록문화의 성장에서 한문학이 등장한 첫번째 시기와 차자표기 문학이 시작된 두번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본격적인 국문문학의 등장이라는 문학사의 세번째 시대를 여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한문 및 한자 차자표기에 맞서서 국문이 관장 영역을 확대하고 마침내 그 둘을 퇴장시키기까지는 여러 단계에 걸쳐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서 한문학에 대한 국문문학의 승리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실상대로 파악하는 역사 이해의 관점이 긴요하다.

 훈민정음 창제의 직접적인 의도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훈민정음은 창제 당시에, 지배층인 사대부를 위한 문자는 아니었다. 사대부는 한문으로 높은 수준의 문자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더러 불편을 느낀다 하더라도 새로운 문자를 창제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한문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을 갈라놓는 기준이므로 상하층이 함께 사용하는 문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뒤에도 사대부는 한문을 계속 사용했으며, 한문을 쓰느냐 아니면 언문을 쓰느냐에 따라서 문화적인 자격에 의한 지체 판가름이 지속되었다. 중세적인 사회관계와 사고방식이 이어지는 한 한문을 버릴 수 없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펴내면서 한자음을 바로잡아≪東國正韻≫을 편찬하는 사업도 아울러 진행했으며, 그 일이 긴요하다는 것을 몇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발음부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음을 바로잡자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고, 한문해독을 도와주는 구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능은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자의 발음부호를 제정하기 위해서 우리말의 음운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뜨기까지 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訓民正音≫ 서문에서 세종은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은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하고, 그런 형편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고 창작동기를 설명했다. 즉 훈민정음은 한문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문자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을 단순히 백성들의 편의만을 위한 문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주장이 일어나자, 吏讀[이두]가 서리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불완전해서 재판을 하는 데 억울한 일이 많은데, 새 문자를 사용하면 그런 일을 시정할 수 있다고 했다. 뜻을 펴지 못하는 형편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은 특히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곧 훈민정음은 먼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뜻을 위로 전하는 데 쓰이도록 창안한 문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기능은 위의 뜻을 아래로 펴는 데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崔萬理가,≪三綱行實≫을 반포한 뒤에도 충신·효자·열녀가 배출되지 않았다 하고, 행하고 행하지 않음은 사람의 자질에 달렸으므로 언문을 사용한다 해도 윤리의 교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고 하자, 세종은 훈민을 강조하는 儒者의 이치를 들어 그를 반박했다. 새 왕조가 강조하는 新儒學에 입각한 윤리규범에서 아랫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아랫사람도 읽을 수 있는 문자인 훈민정음이 필요했던 것이다.≪삼강행실≫은 한문으로만 되어 있었기에 뜻을 이룰 수 없었고, 거기다 그림을 그려 넣어도 자세한 사연을 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백성을 통치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 역사적인 임무임을 깊이 자각해야만 했다. 고려 후기 무신란과 몽고 지배를 겪은 다음에 하층 민중이 지배질서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계속 일어나, 마침내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왕조창업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새 왕조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마 민중에게 양보를 해서 생업을 안정시키는 한편 민중을 이념적으로 순화시켜 지배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방침을 택했는데, 그러한 방침이 훈민이고, 훈민을 위한 문자가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농사기술이나 질병 치료법도 가르쳐야 했지만, 더욱 긴요한 과제는 이념교화였기에 훈민정음을 그 방면의 책을 펴내는 데 더욱 힘써 이용하고, 임금의 말을 알리는 敎書나 綸音도 훈민정음으로 적어 펴내야 했다.

 하지만 서리들에게 이두 대신에 훈민정음을 사용하게 하자는 뜻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서리는 한문과 언문 사이에서 이두라는 또 하나의 표기 수단이 계속 쓰여야만 자기네의 배타적인 구실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재판기록을 위시한 각종 문서에 언문이 사용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어리석은 백성이 새로운 문자를 익혀서 뜻을 펼 수 있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겠으나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는 일찍부터 나타났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3년 후에 벌써 대신들을 비방하는 諺文壁書가 나왔고, 연산군대에는 그런 것이 자주 보여, 언문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 필적을 대조하고, 언문 책을 불사르고, 언문 사용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리기도 했다. 그 전에 단종 때에는 궁중의 나인이 별감에게 諺簡을 보낸 것이 발각된 일이 있었다 한다. 벽서와 언간은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뜻을 전하는 두 가지 긴요한 방식이었다.

 훈민정음으로 국문문학의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龍飛御天歌≫와≪月印千江之曲≫이 창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을 보아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은 단순히 훈민에 필요하기 때문에 한글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노래는 가락을 붙여 부르고, 또 부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이기에 한문으로 옮기면 그러한 기능이 마멸된다. 그러므로 신라 때부터 향찰·이두의 차자표기를 해서라도 원래의 말을 표기하고자 하였고, 훈민정음에 와서 그 소망이 달성되었던 것이다.

 사대부가 한문을 버리지 않고 한문학을 자기네 문학으로 지키면서 시가문학에서는 한시와 함께 국문시가를 즐겨 지으며 시조와 가사를 발전시킨 것은 시가는 노래부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李滉은<陶山十二曲>을 지으면서 남긴 跋文에서 그런 사정을 잘 설명했다. 한편 사대부 부녀자들은 한문을 익히기 어려웠기에 국문을 일상생활에 널리 썼고 이는 국문소설의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조건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서민을 위시한 하층 민중이 문자생활을 국문으로 하고 현실인식과 흥미를 아울러 갖춘 문학을 요구하게 되자, 국문문학이 한문학과 맞서서 크게 성장했다. 그러다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끝나자 국문만 사용하고, 문학은 국문문학이라고 하는데 이르렀다. 이처럼 국문 사용의 확대와 국문문학의 성장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의도나 계산과 관계없이 문자생활을 둘러싼 상하층의 경쟁, 중세와 근대의 대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게 해서 국문은 시대마다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국문 사용의 저변 확대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는 국문편지이다. 지금까지 남은 국문편지의 가장 오랜 예는 선조 4년(1571)에 鄭澈의 어머니 竹山安氏가 시묘살이를 하고 있는 아들 형제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최근에 蔡無易(1537∼1594)의 아내 順天金氏의 무덤을 이장하다가 발견한 편지 다발은 백여 쪽이나 되며, 그보다 먼저 쓴 것도 있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채무이의 후처가 되었다가 40대쯤의 나이로 병사한 순천 김씨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친정 어머니, 친정 아버지, 그리고 외처에 나갔던 남편이 써 보낸 편지를 시신과 함께 매장했으며, 장모가 사위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연대가 가장 오랜 것은 선조 2년으로 판명되었다. 순천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남편보다 먼저 죽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노령의 어머니가 앓고 있는 딸에게 써서 보낸 사연이 애절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한 편지는 ‘하게’형의 다정한 말씨로 이루어져 있다. 채무이는 생원시를 거쳐 6품 관직에 나아갔던 사람이다. 이 자료는 사대부 가문에서 여인네를 발신자 또는 수신자로 한 국문편지가 착실하게 정착되었으며, 그 문체가 우아한 품위를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445) 趙健相,<淸州出版遺物 諺簡에 대한 연구>(≪忠北大學校論文集≫ 17, 1979)에서 자료를 소개했다.

 安敏學(1542∼1601)은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고 천거를 얻어 벼슬길에 나아갔던 사람이며, 한문학의 작가로도 다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조 9년에 부인 곽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국문으로 제문을 지어 입관을 하면서 함께 넣었던 것이 발견되었다. 어려운 시절에 부인이 자기에게 시집을 와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을 하며 지내던 일을 말하고, 부부로서의 정을 마음껏 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죽어 이별을 하는 서러움을 하소연하는 사연이 절실하며 표현은 말을 하듯 자연스럽다. 남자의 글이지만 부녀자들의 문체를 따랐으리라고 생각된다.446) 具壽榮,<安敏學의 哀悼文考>(≪百濟硏究≫ 10, 忠北大學校 百濟文化硏究所, 1979)에서 자료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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