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2. 국문학
  • 2)≪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

2)≪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

 ≪龍飛御天歌≫는 세종이 鄭麟趾·權踶·安止를 시켜 지은 노래이다. 세종 27년(1445)에 일단 완성되었으니,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1년 전의 일이다. 세종은 원고를 보고서 기뻐하며 노래 이름을 ‘용비어천가’라 지었다 한다. 그러면서 노래에서 다룬 사적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을 염려해서 崔恒·朴彭年·姜希顔·申叔舟 등에게 명해서 자세한 주해를 붙이도록 했다. 그 다음해에는≪太祖實錄≫을 들여 놓고 참고한 일이 있어서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 2년 동안 주해 작업 끝에 마침내 세종 29년 2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간행된 책 550부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용비어천가≫와 그 주해를 맡은 사람들은 대부분≪훈민정음≫창제에 관여했으니, 두 가지 일이 깊이 관련을 가지고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는 건국 시조들을 찬양하고, 조선왕조의 창건을 합리화하는 노래이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건국신화 표방을 재현했다. 민간전승까지 캐서 신이한 내용을 갖추며, 필연적인 힘에 따라 영웅적인 투쟁을 거쳐 위대한 과업을 성취했다고 하는 오랜 전통을 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에 입각한 합리적인 통치방식이 더욱 강조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문학을 통해 민심을 장악하는 것은 계속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훈민정음을 표기수단으로 택했기에 잡다하게 변모될 수 있는 설화가 아닌, 엄격하게 다듬어진 서사시를 지어서 보급할 수 있었다.≪용비어천가≫를 노래부를 때 곡명은<與民樂>이라고 했는데, 이는 감화가 백성에게까지 미쳐 함께 즐기게 될 것을 기약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표기법을 고친 約本≪용비어천가≫를 다시 간행한 것을 보면 그런 의도를 후대까지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용비어천가≫라는 책은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우리말 노래가 있고, 이어서 같은 사연이 한시로 표시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는 역사적인 사실 또는 설화를 자료로 한 자세한 주해가 있어 이것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용비어천가≫라는 작품은 우리말 노래로 한정된다. 그것만으로도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시가 필요했던 것은 훈민정음의 표기법이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데도 이유가 있지만, 왕조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는 詩經體의 한시라야 한다는 관습과 타협한 결과이기도 하다. 해설을 마련하기 위해≪태조실록≫과≪太宗實錄≫을 편찬하면서 이미 수집한 자료를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8도에 명령을 내려 민간에서 널리 모아들인 이야기까지 보탰다. 사실을 전설로 바꾼 것이 신이한 행적을 입증하는 데 더욱 유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설은 산문으로 썼기에 설화가 민간에 되돌려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후대의 구전설화에서는 태조의 행적을 아주 다르게 이야기하므로 서로 비교해 볼 만하다.

 노래는 모두 125장이다. 제1장은 한 줄이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두 줄씩이며, 마지막의 제125장은 세 줄이다. 한 줄이 몇 토막씩인가 살피자면, 본문에 표시해 둔 작은 동그라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 줄이 끝날 때마다 작은 동그라미 표시를 오른쪽에다 해두었고, 반 줄 안에는 작은 동그라미 표시를 중간에다 해두었다. 율격을 고려해 이렇게 했다고 보아 마땅하다. 그러고 보면 한 줄이 네 토막이라고 하겠으나, 한 토막이 예사 노래의 두 토막에 해당하기 일쑤이니, 여덟 토막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시조와 비교해 본다면, 시조의 처음 두 줄이 합쳐져서 한 줄을 이룬 것과 같다. 우리말 노래의 기본 율격을 변형시켜 한 줄의 길이를 한껏 늘이는 장엄한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토막 안의 글자수가 일정하지 않고, 한 줄이 여섯 토막으로 줄어드는 예가 있지만 이는 민요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흔히 인정될 수 있는 변형이다. 같은 형식이≪月印千江之曲≫에도 쓰였다. 하지만 이 형식은 이후 국문서사시가 나오지 않자 정착되지 못했다. 한편 민간의 구전 서사시인 敍事巫歌에서는 더욱 산만하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형식을 그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어 서로 견주어 볼 만하다.

海東六龍이 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시니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래 가니

 제1장과 제2장에 전체의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해동 6룡은 穆祖·翼祖·度祖·桓祖·太祖·太宗이다. 앞의 네 사람은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데, 추존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북쪽으로 여진족이 사는 곳까지 밀려갔던 가문이 오랫동안 기반을 다져 마침내 왕조를 창건하기까지 이른 것을 자랑하고, 후손의 영광에 따라 선조들을 높이고자 해서 6대에 걸친 내력을 다루었다. 해동 6룡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말은≪周易≫의 乾卦 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배경에 깔고, 뜻을 마음껏 폈다는 것과 함께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나타내니 곧≪용비어천가≫라는 노래 이름이 그런 뜻을 지닌다. 그처럼 위대한 과업은 하늘이 복을 실현하면서 이루어졌고, 옛날 성인들의 경우와 일치한다고 하고, 근본이 단단하니 앞으로도 계속 번영을 누리리라는 것을 비유를 들어서 나타냈다.

 제1장은 한 줄이고, 제2장은 두 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제1장은 하늘에 날아오르는 것과 함께 하늘이 내린 복을 말했으니, 天·地·人 3才 가운데 天에 해당한다. 천은 첫번째 순서로 나와야 하고, 한 줄이어야 한다. 그 다음의 제2장에서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친다고 했으니, 모두 땅에 관한 말이다. 천에 이어서 地를 찾아서, 창업의 기반이 흔들릴 수 없게 튼튼하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리고 제3장 이하는 사람의 일을 다루었으니, 人에 해당한다. 천은 한 줄이고, 지는 두 줄이지만, 인은 계속 겹쳐지는 여러 줄이며, 그러다가 맨 끝의 제125장은 세 줄이다. 한 줄에서 두 줄로, 두 줄에서 세 줄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주어 왕조의 창업이 천·지·인 3재와 일치한다는 것을 시가형식을 통해서 구현했다 하겠다.

 제1장에서 말한 옛 성인은 중국의 창업주들이다. 제3장에서 제109장까지에서는 다소 예외는 있으나 계속 중국 창업주들의 경우와 여섯 용의 위업을 한 줄씩 나란히 노래해서 서로 대응될 수 있게 했다. 중국의 경우를 먼저 내세우고 기준을 삼았으므로 사대적인 의식을 나타냈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오히려 중국과 조선이 대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건국도 그와 같은 과정을 밟았기에 성스러운 연원을 자랑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제후국의 왕은 하늘과 바로 연결될 수 없으며 천자가 그 지위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넘어서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외교에서는 실제로 어려운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문화적인 의식에서는 중국과 대등한 자주성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고려 후기 이래로 거듭 확인된 추세였다. 중세 보편주의를 부정하고 근대 민족주의로 나아간 것은 결코 아니지만, 보편적인 규범과 위엄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자 했다.

 각 장이 서로 독립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일관된 흐름이 두드러지지 않고, 노래에 나타난 사연을 이해하자면 해설을 참고해야 하는 것이 이 작품을 서사시로 보는 데 다소 장애가 된다. 그러기에 단편적인 영웅시의 집합 같으며, 순수한 서사시라기보다는 교술적인 서사시라고 해야 마땅하다. 사실을 존중하는 유학자들로서는 교술적이지 않은 서사시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고대의 건국서사시 이래로 영웅의 시련과 투쟁을 찬양하던 전통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오랜 전통과 당대의 가치관을 가능한 대로 조화시키고자 했다. 영웅의 탄생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나, 목조에서 환조까지 4대에 걸친 시련과 방황을 겪은 다음 크게 일어날 조짐을 나타내고, 그 뒤를 이어 태조의 눈부신 활약으로 창업을 하고, 태종의 후계자로서의 과업을 수행한 과정이 개인의 일생을 대신하는 가문의 내력을 통해서 납득할 수 있게 형상화되어 있다.

黑龍이  사래 주거 白龍 살아내시니 子孫之慶 神物이 니(제22장)

石壁에  올이샤 도 다 자시니 현 번 운 미 오리가(제48장)

자로 制度 ㅣ날 仁政을 맛됴리라 하 우흿 金尺이 리시니(제83장)

리 사 마자 馬廐에 들어오나 聖宗을 뫼셔 九泉에 가려시니(제109장)

 이런 대목은 영웅의 시련과 투쟁을 나타내는 데 아주 긴요한 구실을 한다. 제22장에서는 태조의 할아버지 도조가 백룡의 부탁을 받고 백룡과 싸우던 흑룡을 한 번의 화살에 죽였다는 것인데, 신라 때의 居陀知나 고려 건국 시조 중의 作帝建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이야기의 재현이며, 오늘날까지 서사무가와 설화로 구전되는 유형과 직접 연결된다. 그런데 거타지나 작제건처럼 구출해 준 용의 딸을 데려와 아내로 삼았다는 말은 없고, 자손이 잘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것만으로 결말을 삼았다. 해설에 의하면, 부탁을 받고 예언을 들은 것이 모두 꿈 속의 일이었다고 한다. 영웅적 행위의 전승에 따르는 설득력을 갖추면서 합리성을 잃지 않으려는 이중의 태도가 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태조가 남북의 외적과 싸워 나라를 구출한 활약상을 다룬 대목은 제47장에서 제62장 까지 이어지면서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태조는 고대의 영웅들처럼 말 잘 타고 활 잘 쏘며, 용맹이 뛰어난 무장이다. 제48장에서는 왜구를 토벌할 때의 광경을 묘사했다. 말을 타고 석벽을 올라가 왜구를 무찔렀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런 투쟁 장면이 거듭되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태조 李成桂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기에 새 왕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논리를 타당하게 폈다. 그렇게 해서 가문서사시가 왕조서사시로 확대되고, 왕조서사시가 민족서사시일 수도 있게 하고자 했다.

 제63장에서 제89장까지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위대한 인품을 찬양하고, 왕조 창건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말했다. 제83장은 그렇게 하는 데 다각적인 의미를 갖는다. 제도를 마련하려면 자(尺)가 있어야 하므로, 하늘이 태조에게 어진 정치를 맡기려고 金尺을 내렸다고 했는데, 왕조가 창건될 때에는 반드시 그런 징조가 있게 마련이다. 신라 시조가 금척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왕이 지니던 天賜玉帶를 고려 태조 王建이 물려받았다는 말은≪高麗史≫ 서두에 올라 있다. 제83장 첫 줄에서는 중국의 사례를 드는 대신에 고려 태조는 9층으로 된 금탑이 바다에 솟아 있는 꿈을 꾸고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 뒤 이성계가 금척을 받았다고 해서 하늘이 왕권을 보장해 준다는 전승을 이었다.

 태조는 용맹한 무장일 뿐만 아니라, 유학에 입각해 어진 정치를 베풀고 제반 제도를 이치에 맞게 마련한 문화영웅이기도 했다. 제83장에서 자로써 제도가 나므로 어진 정책을 맡기려고 금척을 내렸다는 말은 이런 각도로 이해해야 더욱 깊은 뜻을 찾을 수 있다. 자는 길이를 재는 데 쓰는 것이다. 길이를 정확하게 재야 모든 제도를 이치에 맞게 마련할 수 있고, 다스리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규제하면서 합당한 정치를 베풀 수 있다. 무력만으로 나라를 장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으며, 문무겸전을 이상으로 삼아야 하므로 과거 제왕의 창업 징조에서는 중요시되지 않던 상징적인 의미를 태조 이성계의 금척에 부여했던 것이다.

 제90장에서 제109장까지에서는 태조의 과업을 태종이 이었다고 했다. 태종은 태조와 같은 무장이 아니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용맹을 떨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왕조 창건에 필요한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고, 태조가 시작한 일을 자기가 완수하겠다고 싸움을 벌였다. 제109장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이 탄 말이 화살에 맞고 마구간으로 들어오니, 태종비가 태종이 죽은 줄 알고 자기도 함께 저승에 가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창업과 계승의 과정이 끝까지 순탄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태종의 싸움을 비장하게 그리고, 태종비도 아울러 부각시키려 했다. 여성의 활약이 보이지 않는 이 서사시에 세종의 어머니인 태종비만 막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110장에서 제125장까지는 작품의 결론이자 후대 임금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선조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건국 당시의 뜻을 잊지 말라고 하고, 정치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했다. 太平을 누리기만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형벌을 능사로 삼고, 교만한 마음을 가져 덕을 잃고, 간사한 무리를 믿고,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하는 것이 모두 잘못된 정치라고 했다. 정치는 치자가 피치자에게 내리는 명령이기에 앞서서 치자 자신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런 정치철학으로 결말을 맺은 것이다.

 세종 28년(1446) 3월에 昭憲王后 沈氏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首陽大君으로 하여금 석가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釋迦譜≫를 기초로 해서≪釋譜詳節≫을 국문으로 마련하게 하고, 이듬해 7월에 완성을 보자 그것을 참고로 스스로≪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그 둘이 합본되어≪月印釋譜≫로 전하는 것을 보면,≪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의 관계는≪용비어천가≫노래 본문과 나중에 이루어진 해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용비어천가≫와≪월인천강지곡≫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한 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노래 형식도 흡사하다. 그러나≪월인천강지곡≫에는 한시가 부기되어 있지 않고, 한자어도 국문을 큰 활자로 먼저 적고, 한자는 작게 달아 놓았으며, 해설에 해당하는≪석보상절≫도 국문을 택했다. 국문문학의 영역을 확보하자는 데서는 한걸음 더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모두 상·중·하 세 권인데, 그 중에서 상권만 발견되었다. 상권에 실린 노래만 해도 194장이어서≪용비어천가≫의 경우보다 많다. 상·중·하 세 권의 노래는 모두 580장 내외가 될 것 같다.

 작자는 세종 자신이라고 한다. 혼자 다 지었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세종이 직접 짓는다고 했기에, 유학을 이념으로 굳힌 새로운 왕조가 불교를 새삼스럽게 찾는다고 유신들이 거듭 반대하는 여론을 막으면서 완성을 보고 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도 왕조서사시와 불교서사시의 대조적인 성격이 잘 나타난다. 왕조서사시≪용비어천가≫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해서 이룩했는데, 불교서사시인≪월인천강지곡≫은 왕이 개인이나 가족의 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되도록 드러내지 않고 창작했다.≪용비어천가≫는 널리 펴내서 국가적인 이념을 굳히는 데 소용되었다면,≪월인천강지곡≫은 세종 자신이나 왕실의 가족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釋迦의 일대기는 수많은 불교 경전에서 거듭 다룬 바이고, 노래로 지어 부르는 전통만 해도 일찍이 인도에서 馬鳴의≪佛所行讚≫이 나온 이래로 여러 나라에서 거듭 시도되었으며, 고려 때에 雲黙의≪釋迦如來行蹟頌≫이 마련되었다. 그러므로 새삼스러운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소재라도 말을 바꾸어 다시 노래하면 새로운 느낌이 드는 개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더구나 그동안 여러 차례 나온 한시가 아닌, 우리말 노래를 처음으로 창작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불교문학이 국문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사시로서의 성격 또한 서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용비어천가≫는 창업시조의 행적을 6대에 걸쳐서 노래해 전체적인 연관이 서사시다운 맥락을 지닐 수 있게 했는데,≪월인천강지곡≫에서는 석가 한 사람만 다루면서 선조 대대로 있었던 일 대신에 석가가 거듭 태어나면서 전생에서 겪었던 바를 서두로 삼았으니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방황하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커다란 과업을 이루어서 칭송을 모으게 되었다는 과정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 두 작품에서 중국 전래의 유학과 인도 전래의 불교를 각기 우리 것으로 받아들여 삶의 외면과 내면을 성찰하고, 규범화된 가치와 함께 정신적인 각성을 얻으려는 신라시대 이래의 오랜 노력을 재현했다. 그렇게 하는데 우리 전통을 활용하며 문학작품 형성화의 독자적인 역량을 키우는 과제가 훈민정음의 창제로 새롭게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시도가 제왕이 앞장서서 중세문학의 이상을 다시 설정하자는 것이었기에 한계를 지녔다. 서사시를 성립시키는 이념적인 결속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으며, 그 후의 국문문학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관심사를 찾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속서사시인 서사무가는 계속 전승되었지만, 세종 때 이룬 두 작품이 거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月印千江之曲’이라는 말은 부처가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를 베푸는 것이 마치 달이 즈믄 강에 비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달은 하나이지만 강에 비친 모습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부처에도 해당하고 중생에도 해당하는 비유이다. 부처는 백억 세계에 몸을 드러내지만 각기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중생은 각기 자기대로의 因緣과 所見을 벗어날 수 없지만 부처를 갈구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이런 상징을 배경에 깔고, 노래의 서두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외巍외巍 셕釋가迦쁧佛 무無량量무無변邊 공功득德을 겁劫겁劫에 어느 다 리

셰世존尊ㅅ 일 리니 만萬리里외外 일이시나 눈에 보논가 너기쇼셔

셰世존尊ㅅ 말 리니 쳔千載썅上ㅅ 말이시나 귀예 듣논가 너기쇼셔

 제1장에서는 높고 높은 석가 부처의 헤아릴 수 없고 끝도 없는 공덕은 무한히 긴 세월인 겁이 겹치더라도 어찌 다 사뢸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제2장에서는 석가 세존의 일을 사뢰려면 만 리의 일이나 눈에 보는 것 같이 여기고, 석가 세존의 말을 사뢰려면 천 년 전의 말이나 귀에 들리는 것 같이 여기라고 했다. 석가의 공덕은 시간으로나 공간으로나 무한하다고 했고 석가가 실제로 보여준 언행은 만 리 밖, 천 년 전에 있었다고 했으며 석가의 일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석가의 말은 귀로 듣는 것처럼 여기라고 했으니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세 등급으로 나타난다. 무한하고 아득한 것을 지금 당장 보고 듣는 것처럼 나타내자는 것이 노래를 짓는 취지이다.

 그렇게 해서 사뢴 내용이 그 뒤를 이어서 나오는 노래이다. 먼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겁을 거슬러 올라간 시기부터 시작해서 석가가 무수한 前生을 살면서 겪었던 일을 하나씩 들었다. 불교서사시란 원래 그렇듯이 시간적인 규모가 엄청나고, 전개되는 사건이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바를 크게 넘어선다. 그러나 석가가 成佛하게 되는 시기 전후의 일을 서술하는 데 이르러서는 초월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며 공존하게 했다. 석가는 예사 사람이면서 성불한 부처이기도 하다는 이중의 성격을 부각시켜, 노래를 짓거나 읽는 사람이 석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또한 석가를 새삼스럽게 숭앙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한 것이다.

 佛經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석보상절≫에서 산문으로 설명할 때에는 예사롭게 보일 수 있는 사건도 노래로 간추리자, 말하지 않은 많은 사연이 함축되어 감명이 달라진다. 한 대목을 들어보자. 성불한 석가가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 임금인 아버지를 만난 장면이다. 거기 優陀耶라는 사람도 등장한다. 우타야는 임금이 자기 아들을 찾아오라고 보냈는데 도리어 부처의 제자가 되어서 부처와 함께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지난 일을 두고서 할 말이 많았겠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과過겁劫에 코苦行샤 이제 일우샨 優따陀야耶 ㅣ 니이다.

열두  그리다가 오 드르샨 아바님이 나시니이다

少씨時事 닐어시 優따陀야耶 듣며 아님  듣시니

금今日事 모실 優따陀야耶 며 아님이  시니

 앞에 든 제115장에서는, 과거 여러 겁을 고행하다가 이제야 성불한 일을 동행한 우타야가 임금에게 사뢰니, 아버지 임금은 아들이 떠난 다음 열두 해를 그리워하다가 오늘에야 소식을 들었다고 일렀다 했다. 여러 겁이라는 시간과 열두 해라는 시간, 성불해서 기뻐하는 마음과 아들을 만나서 기뻐하는 마음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뒤에 든 제116장에서는 아버지가 아들 소시적의 일을 말하자 우타야가 들으며 아들도 듣고, 오늘날의 일을 우타야가 사뢰며 아들도 사뢴다고 했다. 아들이면서 부처이고, 아버지이면서 衆生이니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어긋나지만, 둘 다 기뻐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우타야는 아버지와 아들, 부처와 중생 사이에서 말을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하면서 또한 기뻐하고 있다.

 ≪용비어천가≫에서는 凡人을 능가하는 영웅의 세계를 그리자고 일상성을 배제하려고 했지만,≪월인천강지곡≫에서는 영웅의 세계를 월등히 능가하는 엄청난 상상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모습과 함께 나타냈다.≪월인천강지곡≫에서의 가족은 왕족이기는 해도 무슨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지 않았으며 이별을 서러워하고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평범한 관계를 맺고 있을 따름이다. 父子·夫婦·母子 사이에 개재된 사연이 다각도로 나타나 있다. 어린 아들이 부처가 된 남편을 따라 가겠다고 할 때 부처의 아내는 예사 어머니처럼 서럽게 통곡했다. 삶의 고난이 무엇이든 정겹게 그려져 있다. 고난을 넘어선 숭고한 세계가 따로 있다고 하기에 얼마든지 부드러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후대의 소설에서 영웅적 주인공의 시련과 투쟁이 전개되는 양상과 상통하는 바 있다면,≪월인천강지곡≫은 초월적인 원리와 일상적인 현실, 숭고한 이상과 빈곤한 경험의 이원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작품구조와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노래는 그런 방향을 미리 택했기 때문에 후대 문학과의 구조적인 유사성이 나타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고, 널리 읽힌 결과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산문으로 된≪석보상절≫은 노래로 미처 다 나타내지 못한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놓아,≪월인천강지곡≫의 이해를 위해서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대로의 독자적인 의의가 있어 따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전달에 충실하면서 품위 있고 우아한 산문 문체를 개척한 점이 우선 주목되고 문장은 길게 이어지면서 혼란이 없고, 기본 줄거리와 곁가지를 적절하게 연결시켜 내용이 풍부해지도록 했다. 자연스러운 대화와 치밀한 묘사도 갖추어 산문을 통한 서사적 표현의 좋은 전례를 만들었다. 한문경전에서 받아들인 불교용어를 그대로 내놓지 않고, 작은 글씨로 주를 달아 되도록 쉬운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은 무척 소중한 시도이다.

 기본 줄거리에 덧보태져 있는 곁가지에는 석가의 전생에 해당하는 본생담이라면서 따로 설정한 이야기가 적지 않으며, 작은 글씨로 주를 달아 수록했다. 독립될 수 있는 작품을 본문과 구별된다는 표시를 하고 첨가한 것들도 있다. 자기 눈동자와 골수를 아버지에게 바친 忍辱太子, 사슴의 딸로 태어나 왕비가 되었다는 鹿母夫人, 어머니가 피살되는 시련을 겪은 安樂國太子, 아우 때문에 장님이 된 善牛太子 이야기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되며, 나중에 든 것들 둘은 후대에 국문소설로 개작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든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을 들어 불교에서의 이치가 신이함을 입증하기 때문에, 그 비슷한 이치를 구태여 설정하지 않는 서사문학의 전통과 융합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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