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2. 국문학
  • 4) 시조와 가사

4) 시조와 가사

 時調는 공식적인 기능은 없으며 개인적인 노래이다. 고려말에서부터 정치적인 변동과 관련되더라도 작자의 감회만 읊는 것으로 관례를 삼았으며, 조선왕조가 들어선 다음에도 그 점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왕조창업의 칭송은 시조와 무관하고, 고려를 회고하는 시조는 거듭 이루어져 시조가 개인적인 노래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元天錫과 吉再가 망한 나라의 도읍을 돌아보고 비탄에 잠긴 시조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왕조교체를 이룩한 주역 중에서도 강경파이며 창업을 칭송한 鄭道傳 조차도 그리 다르지 않은 시조를 남겼다.

興亡이 有數니 滿月臺도 秋草ㅣ로다

五百年 都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夕陽에 지나 客이 눈물겨워 노라

 

仙人橋 나린 물이 柴霞洞에 흘너 드러

半千年 王業이 물소 이로다

아희야 故國興亡을 물어 무 리오

 앞의 것은 원천석이, 뒤의 것은 정도전이 지었다고 한다. 후대의 문헌에만 전하기에 작자에 관한 기록이 다소 어긋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두 작품은 고려 도읍지의 옛 터전을 둘러보고 ‘오백년 도읍’ 또는 ‘반천년 왕업’이 허망하게 되었다고 한 점에서 문구조차 거의 같은 것을 되풀이했다. 다만 원천석은 젓대소리를, 정도전은 물소리를 들었다. 젓대소리는 쓸쓸한 느낌을 주다가 사라지고 만다면, 물소리는 역사의 흐름을 느끼게 하며 흐를수록 더 커질 수 있다. 그러기에 원천석은 석양에 지나는 객이 되어 눈물을 흘린다고 하며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고, 정도전은 옛적 나라의 흥망을 새삼스럽게 물어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구별했다.

 시조는 이런 작품에서 서정시로서의 깊이를 재확인할 수 있다. 자아화되지 않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시조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미 알려진 한자어라도 작자의 느낌을 절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썼을 따름이다. 왕조 교체기의 고민을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은 시기에 이르러서도, 사실을 확인하는 시조는 한 편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孟思誠의<江湖四時歌>가 안정기의 정서를 표현하는 길을 열었으며, 黃喜의 작품이 거기에 호응했다. 이 두 사람은 조선왕조가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구실을 한 이름난 재상이었지만 시골 노인인 양 여유를 가지고 너그럽게 살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태평성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나라 안의 질서를 그 시대의 이상에 맞게 다지는 것과 함께 국경을 확장하고 밖으로 위세를 떨치는 것을 또한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金宗瑞는 함경도 지방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하는 일을 맡아 커다란 과업을 이룩했으며, 넘치는 기개를 나타낸 시조를 남겼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서 말을 씻기면서 썩은 선비들에게 사나이다움을 자랑한다는 시조가 있는가 하면, 다음과 같이 읊은 데서는 더욱 생동하는 표현으로 기개를 나타냈다.

朔風은 나무 긋 불고 明月은 눈 속에 듸

萬里 邊城에 一長劒 집고 셔셔

긴  큰  소에 거칠 거시 업세라

 북풍이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이 눈 속에서 차다 해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암시해 놓고 만 리나 되는 변방의 성에 큰 칼 하나를 짚고 서서 길고도 크게 외치는 소리에 거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무엇이든 위압하는 자세를 보였다. 악장이나 경기체가에서는 나라의 위엄을 높이자면 명나라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하는 데 우선 힘써야 했지만, 시조는 그런 부담이라고는 전혀 없이 느낀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면 그만이었다. 무장의 시조는 명분 같은 것을 돌보지 않고 복잡한 생각을 멀리 하기에 더욱 힘찬 가락일 수 있다는 것이 南怡에게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김종서나 남이는 나라 안에서의 권력투쟁 때문에 비명에 죽어야만 했으니, 새 왕조의 고민이 우선 그런 데서 드러났다 하겠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용납하지 않고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된 사육신이 더욱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시조를 지었다는 것은 다소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나 李芳遠과 鄭夢周가 엄청난 결단을 앞에 놓고 시조로 문답을 했다는 전례에서와 같이, 시조는 긴박한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지어 읊을 수 있었다. 丙子胡亂 후에 청나라로 잡혀가는 사람들이 시조를 지었다는 것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육신이 시가를 지어 자기네 심정을 토로하려 했다면 시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육신 중에서 네 사람의 시조가 전하는데, 李塏와 成三問의 작품을 들어본다.

房 안에 혓는 燭불 눌과 離別엿관듸

것츠로 눈물 디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뎌 燭불 날과 갓트여 속 타 줄 모르도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어시 될고 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야 이셔

白雪이 滿乾坤 졔 獨也靑靑리라

 이들 뿐만 아니라 단종을 유배하는 일을 맡은 금부도사 王邦衍이 지은 시조도 사육신의 작품에 못지않은 감명을 준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는 자연과 정치가 마음에서 만족스러운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희망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성대의 환상이 쉽게 깨어지고 권력투쟁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조건은 서정시인 시조에서 정치가 아닌 자연을 택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러다가 士禍가 일어난 후에는 자연을 들어서 정치에 반격을 펴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道學政治가 아닌 현실의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서 자연에 도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江湖歌道를 표방하게 된 것이다.

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노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라

無心 빗만 싯고 뷘  저어 오노라

 이것은 月山大君의 시조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손자이고 성종의 형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에 풍월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낚시는 본격적인 어업이 아니며, 假漁翁이 되어 정치를 멀리하고자 하는 심정의 표현이다. 가어옹의 어부가는 고려 이래로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강호에서마저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어옹 노릇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 추강의 밤물결이 차다는 것으로 시련을 느끼게 하다가, 무심한 달빛으로 자기 마음을 나타내고, 빈 배 저어 온다는 말로 자연에다 자기를 아주 내맡기고 있다. 가득한 듯하면서도 텅 비어 있고, 움직이되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시조 창작의 높은 경지를 구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勳舊派에 맞서 도학정치를 주장한 士林派는 그런 경지를 찾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강호에서 노닌다고 하면서 진출의 기회를 찾고, 그런 노력이 좌절되어 사화에서 희생되면 그 쓰라림을 달래기 위해서 강호의 자연으로 정치에 대한 반론을 펴려 했기에, 격조 높은 표현은 반드시 갖추지 못하더라도 뜻이 강한 말을 써야만 했다.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에서 수난을 겪은 김식의 시조를 그런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김식과 마찬가지로 기묘사화 때 귀양을 간 김구는 경기체가<화전별곡>을 지어 애써 향락을 찾는 자세를 보여주었으며, 시조도 그에 화합될 수 있게 지었다. 김구의 시조는 작자의 문집≪自庵集≫에 모두 다섯 편이 전한다. 일찍이 중종의 총애를 받을 때 읊은 것은 즐거움을 자랑하고 있지만, 귀양살이하면서 지은 것은 자연의 흥취를 찾기에 갑갑했던 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두 작품을 나란히 들어보자.

나온댜 今日이야 즐거온댜 오이야

古往今來예 類업슨 今日이여

每日의 오 면 므 셩이 가리

 

山水 린 골래 三色桃花 오거

내 셩은 豪傑이라 옷 니븐재 들옹이다

고란 건뎌 안고 므레 들어 속과라

 앞의 것은 궐내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중종이 찾아와 술을 내놓으며 붕우로서 어울리자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즐겁다’를 계속 되풀이했다. ‘오늘’은 ‘금일’로 ‘즐겁구나’를 ‘나온다’로 말을 바꾸면서 같은 뜻을 나타냈다. 끝으로 매일이 오늘 같으면 무슨 성가신 일이 있겠는가 했는데, 그럴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나중 것에도 ‘셩’이라는 말이 나온다. 자기는 천성이 호걸이라 물에 도화가 떠오는 것을 보고서는 옷을 입은 채 들어가, 꽃을 건져 안고 물에 들어 솟구치고 싶다고 했다. 둘 다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나타내며 즐거움을 자랑했는데, 정치에서의 즐거움과 자연에서의 즐거움은 성격이 달랐다.

 사림파는 자기 고장인 영남과 호남에서 시조를 키웠다. 시조는 서울에서 벼슬을 하는 생활에서보다 향리로 물러나 자연을 찾고 심성을 닦고자 할 때 스승과 제자, 동학과 벗이 화창을 하며 교류하는 데 더욱 긴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조의 맥락이 면면하게 이어져 歌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형성되었다.

 시문보다는 도학을 더욱 존중하는 영남지방에서는 시조를 짓되 심성을 닦고 도의를 실천하는 자세를 앞세우는 기풍을 길러 서울 중심의 기존 경향과 경쟁했으며, 호남지방과도 다른 취향을 나타냈다. 시조를 지어 즐기는 풍류가 따로 놀지 않고 도학하는 자세에 수렴되게 하고 강호에서 노닐며 선비로서 마땅히 실행해야 할 도리를 찾자는 江湖歌道 구현을 시조 창작의 목표로 둔 점이 특이했다. 그렇게 해서 시조가 사림파의 문학으로 긴요한 구실을 하며 널리 모범이 될 본보기를 이룩하도록 했다. 서울 쪽이나 호남지방의 도학자 또는 사림파 문인들도 그런 기풍을 따르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되었다.

 영남지방의 시조가 그런 기풍을 지니게 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李賢輔였다. 이현보는 중앙정계에 제대로 진출한 영남 사림의 첫 세대에 속하며, 경상감사, 형조참판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면서도 전원으로 돌아갈 꿈을 줄곧 품었다 하며, 마침내 귀향하자 관직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다시 어울린 기쁨을 노래했다.

聾巖애 올라 보니 老眼이 猶明이로다

人事이 變들 山川이 가실가

巖前에 某水某丘이 어제 본 예라

 이현보가 귀향해서 지은 시조에 이런 사연으로 이루어진<聾巖歌>가 있다. 농암이라고도 하는 귀먹바위가 고향 강가에 서 있기에 거기 올라가서, 변하는 인사에 휩쓸려 어두워진 늙은이의 눈이, 변하지 않는 산천을 돌아보니 다시 밝아진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물이고 언덕이고 어제 본 듯한 느낌이라고 해서 변화를 다시 부정했다. 나아가서 세상을 휘어잡는 것은 힘이 들고 자기를 노쇠하게 하는 짓이니, 물러나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잊고 자연과 일체를 이루어야 자기 발견의 흥취를 맛본다고 하는 뜻을 이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漁父歌>를 즐기는 것을 더욱 큰 자랑으로 삼았다.<어부가>는 고려 때부터 강호에서 노니는 처사의 노래였는데 이현보에 이르러서 진가를 발휘했다. 자기 자신의 序와 李滉의 跋에 의하면,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채 전해지던<어부가>를 즐겨 부르면서 12장으로 된 長歌는 9장으로, 10장으로 된 短歌는 5장으로 줄였다 한다. 장가는 한문어구의 연속이면서 배 저을 때 하는 말이 여음으로 들어가 있을 따름이고, 단가는 시조형태를 취했으며 작품으로서의 짜임새도 갖추고 있다.

 이황은 이현보의 흥취와 주세붕의 교화를 함께 구현하는 조화를 추구했다. 예조판서, 대제학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관직을 번거롭게 여긴 이황은 전원으로 돌아가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심성을 가다듬고 도학의 근본을 밝히려고 했다. 세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노니는 즐거움을 찾으면서도 玩世不恭에 빠지지 않고 溫柔敦厚한 경지를 살려 강호가도가 내실을 거둘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윤리적인 규범을 희롱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다짐하고, 마음을 부드러우면서도 돈독하게 가져 도리에 합당한 자세를 지켜야 한다는 각오를 표명했다. 밖으로 교화를 베풀기에 앞서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爲己之學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훈민시조를 내놓지 않았다.

 이황은 시조를 지어야만 했던 이유를<陶山六曲跋>에다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한시는 읊을 수 있을 따름이고 노래 부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말 노래를 찾다가, 韓林別曲類라고 한 경기체가는 방탕스럽게 들떠 있는 것이어서 배격하고, 李鼇의<六歌>가 전하는데 완세불공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한 맛이 부족해 불만이지만 그 형식을 본따서<陶山六曲>전후편 12수의 시조를 짓는다고 했다. 시조가 모두 12수여서,<도산육곡발>을<도산십이곡발>로,<도산육곡>을<도산십이곡>으로 일컫는 관례가 생겼다. 발문의 한 대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言志이고, 하나는 言學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익혀서 부르게 하고, 几席에 비기어 듣는다.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부르고 스스로 춤추며 뛰게 해서, 비루한 마음을 거의 다 씻어버리고, 느낌이 일어나 마음이 녹아 서로 통하게 한다. 노래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서로 유익함이 없을 수 없다.

 시조는 노래부르고 춤추는 데 소용된다고 했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을 듣고 보노라면, 넘치는 감흥 때문에 마음이 맑아져서, 뜻을 바르게 하고 배움의 길을 찾는 데 크게 유익하다고 했다. 노래는 도학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흥취로 체득하게 하는 더욱 중요한 구실을 맡아야 한다는 것을 기본 이론으로 삼고, 그렇게 하자면 시조가 한시보다 소중하다고 했으니, 시조를 당대 문학의 최고 수준에다 올려놓는 데 모자람이 없는 논리이다.

當時에 녀던 길흘 몃 를 려두고

어듸 가 니다가 이제 도라온고

이제나 도라오나니 년   마로리

 <도산십이곡>본문은 이황이 친필을 새긴 목판으로 전한다. 보다시피 ᅀ음까지 보이고, 시조 자료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이다. 언학이라고 한 후반부의 두번째 작품을 들면 이와 같다. 12수로 된 연시조이지만, 각기 독립된 내용이어서 따로 살펴도 좋다. 여기서는 고향으로 돌아온 감격을 노래했는데, 예전에 다니던 길이 바로 학문의 길이기도 하다. 두 가지 뜻이 겹쳐서 학문을 통해서 바른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향을 찾자는 심정과 다를 바 없다고 했으니, 꾸미지 않는 가운데 깊은 생각을 간직한 표현이 이루어졌다. 다른 작품들도 어찌 보면 너무 직설적이고, 말마저 어둔한 듯하지만 뜻하는 바가 단순하지 않다.

 李珥는 도학에 침잠하면 올바른 마음이 스스로 나타나 교화가 베풀어진다는 생각에 반론을 펴고, 나서서 세상을 바로잡는 방책을 강구해야 도리가 실현된다고 했으며, 은거를 자처하는 체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산십이곡>과 견줄 수 있는<高山九曲歌>10수를 지어서 강호가도를 다시금 구현했다. 맨 첫수에서 밝혔듯이 주희의<武夷櫂歌>시를 본떠서 고산구곡을 노래하며 그 뒤를 잇는다 하면서도, 관념은 배제하고 산수경치만 그린 것 같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一曲은 어오 冠巖에  비쵠다

平蕪에 거드니 遠山이 그림이로다

松間에 綠罇을 노코 벗 오 양 보노라

 제1곡을 들면 이와 같다. 첫 마디에서 ‘一曲은 어듸오’라고 한 말은 제9곡에 이르기까지 숫자만 바뀌고 거듭 나와 일관성이 있게 하면서 단조로움이 생기게 한다. 해가 비치고 안개가 걷힌다고 하면서 선명하기는 하지만 특별한 흥취는 없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 대목에서 천지운행의 질서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작품에 제시된 것은 아니다. 소나무 사이에 술동이를 놓고 아침 햇빛을 벗 오는 양 본다는 데서는 주흥까지 곁들인 완벽한 조화를 제시했다 하겠으나 다시 살피면 말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경치를 그려 이치나 도리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를 살리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이는 시를 짓기보다는 논하기를 더 잘 했다.

 호남가단을 처음으로 마련한 사람은 宋純이다. 30년 정도 먼저 태어난 이현보나 10년쯤 나이가 적은 이황과 마찬가지로,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에 묻혀 풍류를 일삼았다. 그러면서 몇 가지 점에서 그 두 사람과는 달랐다. 돌아가는 데 대한 자기 합리화의 설명은 늘어놓지 않고 작품을 통해서 감회를 짓고 시조도 즐기는 동안에 주위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서, 자기 당대에 가단을 이루어 함께 읊조리는 동안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송순의 가사와 시조는 문집에 한역한 것들만 실어놓아서 원문을 찾기 어렵다.<俛仰亭短歌>라고 한 것 7수,<五倫歌>5수를 위시해서 20수쯤 되는 시조를 지었던 것 같은데, 여러 시조집을 뒤져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 10수 가량이며 그것마저도 작자가 엇갈린다. 문집에 한역가만 실은 것은 송순이 가사나 시조를 한시에 못지않게 즐겨 지으면서도 그 의의를 입증할 만한 이론을 스스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론을 다지거나 이유를 묻지 않고 풍류를 생활화하는 것은 그 후에도 호남가단의 지속적인 풍조였다.

늙었다 믈너가쟈 음과 議論니

이 님 바리고 어듸러로 가쟌 말고

아 너란 잇거나 몸만 몬져 가리라

 <致仕歌>세 수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조정에 더 머무를 것인가 물러갈 것인가 하는 고민은 다른 사람이 다룬다면 심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님이라고 한 임금에 대한 도리를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웃음이 나오도록 흥미로운 말로 떠나는 사연을 삼았으니, 고민은 어디 가고 여유만 남아 있다. 이현보나 이황의 무거운 거동, 어둔한 문구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金成遠이라는 사람이 星山 고을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자, 여러 사람이 거기 모여들었고, 정철이<星山別曲>을 지었다. 그 모임을 흔히 성산가단이라고 한다. 중심 인물 김성원은 많은 작품을 지었을 듯한데, 전하는 것은 한 편뿐이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것을 원망하면서 밝은 세상을 그리워한 사연이다. 이황과 더불어 오랜 논쟁을 한 奇大升도 성산가단에 가담했다고 하지만, 부귀를 탐내보아야 삶이 허망할 따름이라고 한 시조만 남겼다. 잠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낙향해서 지낸 끝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게 되는 高敬命도 함께 어울렸다.

 鄭澈은 관직에 진출했던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반생을 호남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그 곳에서 송순 이래의 전통을 잇고 성산가단의 풍류를 체득하는 동안에 자기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수련을 쌓았다. 가사를 여러 편 지었을 뿐만 아니라 시조 또한 문집에 실린 것만 해도 79수나 된다. 영남가단은 이황 이후에 차차 움츠러들었다 하겠고, 호남가단은 정철에 이르러서 절정을 보인 점이 좋은 대조가 된다.

오도 다 새거나 호믜메고 가쟈라

내 논 다여든 네 논졈 어주마

올 길혜 다가 누에 머겨 보쟈라

 먼저<訓民歌>를 들어보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누구나 쉽게 익혀서 부를 수 있는<훈민가>18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16수가 전하며 이런 노래가 있다. 훈민은 조선왕조가 들어섰을 때부터 줄곧 강조했다. 훈민의 의도를 시조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송순이나 주세붕이 이미 훈민시조를 지었으며, 정철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정철의<훈민가>는 내세우고자 하는 덕목은 전례와 같이 구비했으면서 순탄하게 이어지는 말로 인정과 세태를 생동하게 그려내서 주목된다. 이 노래는 서로 협동하며 부지런히 일할 것을 가르친 셈이지만, 민요의 사설을 그대로 갖다놓은 듯한 느낌을 주어 그런 의도에 구애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어와 동냥 뎌리 야 어이 고

헐더 기운 집의 의논도 하도할샤

뭇 지위 고 자 들고 헤다가 말려다

 정철은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당쟁이 시작되자 서인의 영수 노릇을 했다. 정치적인 활동을 두고서는 엇갈린 주장이 있으나 대단한 치적을 거두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조에서는 당쟁을 개탄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아주 잘 나타냈다. 나라를 집에 비교해, 대들보가 되는 재목을 함부로 다루어서 어쩔 것이냐 하고서, 뭇 목수가 먹통과 자를 들고 허둥대다가 말겠느냐고 걱정했다. 헐뜯어 기운 집이라고 했듯이 나라 형편이 임기응변으로 어려움을 수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는 줄 알았기에 걱정이 더 컸다. 그러나 당쟁이 서인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때면, 정철은 밀려나야만 했고 다음과 같이 시조에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머귀닙 디거야 알와다 힌 쥴을

細雨 淸江이 서럽다 밤 긔운이야

千里의 님 니별고  못드러 노라

 <思美人曲>에서 보인 것과 같은 사연인데, 감각적인 표현이 한층 묘미를 얻었다.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을 전하자는 것보다는 생동하는 느낌을 살려서 얻을 공감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여느 시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도치법을 써서 처음 두 줄에서는 말을 앞뒤로 바꾸어놓아, 가을밤이 쓸쓸하고 서늘하다는 감각이 새삼스러운 충격일 수 있게 하고, 잠 못 드는 심정의 뜨거운 열기와 대조가 되게 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선이 되어서 학처럼 날아가겠다는 상상에서 탈출을 찾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데서는 천진스럽고 분망한 생각을 거침없이 엮어냈다.

재 너머 成勸農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운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고

아야 네 勸農 계시냐 鄭座首 왔다 여라

 시조가 한시보다 나은 점은 조용히 관조하는 시에 그치지 않고 넘치는 흥취를 움직임으로 살릴 수 있다는 데서 인정된다. 우리말이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서술어의 활용형이 큰 구실을 해서 그런 효과를 돋보이게 한다. 여기서는 ‘…듯고’와 ‘…고’로 연결되어 석 줄이 한 문장이고, 누운 소를 발로 박차 지즐탔다는 말까지 들어가서 단숨에 재넘어 간 거동이 선연하게 나타났다. 정철의 시조는 설명이 아닌 표현으로 규범화된 수사를 배격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생동하게 나타내서 충격을 주었다.

 林悌는 울분에 찬 생애를 보내며, 벼슬을 버린 채 명산을 찾아 기개를 토로하면서 호남가단의 맥락을 이었다. 한문과 한시에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조도 즐겨 지었다. 한시에서 艶情詩를 짓는 솜씨를 자랑했듯이, 시조에서도 기생과 관련된 사연을 앞세웠다. 그런 노래나 짓고 돌아 다니는 것은 선비의 처신이 아니고 강호가도 구현과 거리가 멀다 하겠으나, 임제는 그런 명분에 매이지 않았다.

北天이 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나니

산의 눈이 오고 들에 챤 비 온다

오은 챤 비 마시니 얼어 가 노라

 이 시조는 寒雨라는 기생을 만나 지은 것이라고 한다. 기생 이름에다 빗대어 희롱을 하다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궁상맞고 처량한 느낌을 아주 잘 나타내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임제가 기생을 상대로 시조를 지어 희롱거리로 삼았던 것은 기생이 시조를 넉넉히 이해했던 사정을 말해 준다. 기생이 시조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짓기도 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시조는 술자리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기생이 사대부의 술자리에서 시중을 들자니 시조를 부를 줄 알아야 격이 높다 했을 것이다. 제대로 자격을 갖춘 기생이라면 가무, 음률을 두루 익히고 한시에도 입문을 해야 했으니, 시조를 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원래는 사대부문학이기만 했던 시조의 작자층이 확대되는 전환이 이루어졌다.

 명종 때쯤 송도에서 명기로 이름이 난 黃眞伊는 뛰어난 재능과 발랄한 개성을 자랑하며 여러 명사들과 어울렸다 하며, 徐敬德만은 유혹하지 못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기녀가 갖추어야 할 기예에 두루 능했으며 한시도 어지간히 지었다고 하지만, 특히 시조를 통해서 뛰어난 창조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기녀시조답게 사랑 노래를 지으면서 사대부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추어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뎌 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더면 가랴마 졔 구야

보고 그리 情은 나도 몰라 노라

 황진이의 시조는 작자가 엇갈려서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으나 대략 여덟 수쯤 되는데, 이별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의 노래는 곧 이별의 노래라는 고려 속악가사에서 볼 수 있던 전례를 이어 후대로 넘겨줄 전통을 확인했다 하겠다. ‘어뎌’라는 말을 앞세워서 이별을 하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그리움을 깨닫게 된다는 사연을 그냥 말하듯이 나타냈으면서 기발하고 신선하다. ‘졔 구야’는 앞뒤에 다 걸리는 말이다. 앞에 걸려서는 ‘졔 구야 가랴마’의 도치형을 만들고, 뒤에 걸려서는 ‘졔 구야 보내고’라는 뜻을 가지며 ‘졔’라 한 자기도 경우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된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여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여기서는 시간을 휘어잡고자 했다. 님이 오는 봄밤은 짧고 님이 오지 않는 겨울밤은 길다는 것이야말로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逆說같은데, 긴 밤의 허리를 잘라 이불 아래 넣는다면서 그런 역설을 그냥두지 않았다. 이별의 슬픔을 되씹고 있는 노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서리서리’와 ‘구뷔구뷔’라는 말로 주어진 불행을 자아확대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구체화했다.

梨花雨 훗릴 제 울며 고 離別 님

秋風落葉에 져도 날 생각가

千里에 외로운 만 오락가락노매

 전라도 扶安 기생 梅窓이라고도 하는 李桂娘이 지은 시조에 이런 것이 있다. 이계랑은 아리땁고 애절한 마음씨를 한시로 나타내는 솜씨가 상당했으며, 시조에서도 그런 특색을 보였다. 배꽃에 비가 흩뿌릴 때 울며 잡고 님과 이별했다는 것으로 이별이 갑자기 미친 듯 닥쳐와 좋지 못한 사랑을 마구 흔들어 상처를 잔뜩 남긴 사연을 아주 선명하게 집약했다. 그리고는 움직임이 스산해지게 하고, 자기 혼자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사연이 앞 대목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게 했다.

 조선시대 가사의 첫 작품은 丁克仁의<賞春曲>으로 알려져 있다. 정극인은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전라도 泰仁에 돌아가 만년을 보내는 동안에, 성종 3년(1472)에<不憂軒歌>와 <不憂軒曲>을 지어 임금의 은혜에 감격함을 노래하는 한편, 같은 무렵<상춘곡>을 마련해 산림에 묻혀지내는 생애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과연 정극인이 지었던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후대에 편찬된 문집에 비로소 수록되었으며, 표기법이 도저히 정극인 시대까지 소급될 수 없다는 것을 우선 증거로 삼고, 형식이나 표현이 너무 가다듬어져 있으며, 나타낸 내용이 정극인의 평소 생각과 다르다는 점까지 들어 정극인 창작설을 부정한 견해447) 최강현,≪가사문학론≫(새문사, 1986).가 있다. 그러나 좀더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당대에 표기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문시가나 소설을 다룰 때 거의 공통적으로 당면하는 고민이다. 시대가 흐르면 작품을 전사하는 사람이 표기법을 바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기에 그 점이 작자 판별에서 결정적인 증거력을 갖지 않는다. 가사는 고려말에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온전한 틀을 갖춘 민요의 한 형식을 받아들였으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형식이나 표현이 산만하지 않다고 해서 구태여 의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평생 진출하기를 열망하고, 직위를 높여준 은전에 감격한 정극인이 산림처사로 자처하고 세상을 멀리하며 참다운 기쁨을 찾는다는 노래를 지은 것은 사대부의 양면성을 아주 잘 나타내주는 처사였다. 그러므로<상춘곡>이 정극인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는 있으나 아직 부정할 단계는 아니다.<상춘곡>이 후대 누구의 작품이라는 추론은<상춘곡>이 정극인의 작품이라는 기존의 견해보다 증거력이 상대적으로 모자란다.

紅塵에 뭇친 분네 이 내 生涯 엇더고

녯 사 風流 미가  미가

天地間 男子 몸이 날만 이 하건마는

山林에 뭇쳐 이셔 至樂을  것가

數間茅屋을 碧溪水 앏픠두고

松竹 鬱鬱裏예 風月主人 되어셰라

 서두가 이렇게 시작된다. 산림에 묻혀, 몇 칸 초가를 푸른 시냇물 앞에 두고, 송죽이 울창한 가운데 풍월주인 노릇이나 하는 것이 적막한 일이고, 천지간에 남자로 태어나 구태여 찾을 바가 아님을 전제로 삼고서, 그런 생활을 여러 모로 변명하고 합리화했다. 옛사람의 풍류를 따르는 길이 거기 있다 하고, 지극한 즐거움을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거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부귀와 공명이 자기를 꺼리니 청풍이나 명월이 아닌 다른 벗이 없다고 해서 내심을 더 드러냈다. 산림처사로서의 생활을 다루는 隱逸歌辭는 이런 내용을 되풀이해서 지녔다. 밀려나서 은거를 하는 것이 바라지 않던 바일수록 자기는 신선인 양 자부하고, 세속의 먼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엾다고 해야 심리적인 보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자연과 화합하는 즐거움을 찾는 미의식이 생동하는 표현을 얻어 사대부문학의 가장 큰 성과로 축적되고 국문 시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曺偉의<萬憤歌>는 절실한 사연과 능란한 표현을 갖춘 장편 가사여서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조위는 金宗直의 처남이자 문인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杜詩諺解≫를 맡아서 냈으며, 시로써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戊午士禍를 만나 평안도 義州로, 다시 전라도 順天으로 귀양을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만분가>는 순천에서 귀양살이가 원통하다는 것을 하소연한 작품인데, 최초의 유배가사여서 주목된다.

 李緖의<樂志歌>또한 유배가사이지만 이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서는 왕족인데 누명을 쓰고 전라도에서 14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귀양이 풀린 다음에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潭陽에서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낙지가>는 이름부터 뜻을 즐기는 노래라고 하고서, 귀양살이의 원망을 늘어놓지 않고 수난에서 오히려 기쁨을 찾으려고 했다. 유배가사이면서도 은일가사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먼저 자기가 자리잡은 고장부터 자랑했다. 곤륜산 일지맥에서 시작해서 8도를 다 돌아 호남으로 가서는 자기가 거처하는 삼간초옥에 이르렀다. 버림받은 처지이면서도 자기 위치가 천하의 중심과 연결되어 있다 하고서, 다음 순서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넘어가 고금 隱士들의 행적을 들고서 자기는 예외자일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중국 後漢 때 사람 仲長統의<樂志論>을 본받겠다고 했다. 중세적인 수사법의 온상인 전례나 고사에 대입시켜야 스스로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기에 한문에 토를 단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한자어 투성이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수난에 굽히지 않는 의식을 다지자는 은일가사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宋純의<俛仰亭歌>는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송순은 늦게까지 벼슬해 지위가 우참찬에 이르렀다가 만년에 치사하고 고향인 전라도 담양으로 돌아가 그 근처의 여러 문인과 교류하며 여생을 풍류로 즐겼다. 못 다 이룬것 때문에 좌절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거추장스러운 고장에서 우뚝하게 서서, 구김살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연에서 저절로 얻는 흥취를 자랑한다고 했다. 사철의 경치마다 흥겹다는 것을 두루 말한 다음에, 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은일가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人間을 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업다

니것도 보려 고 져것도 드르려코

람도 혀려 고 도 마즈려코

으란 언제 줍고 고기란 언제 낙고

柴扉란 뉘 다드며 딘 곳츠란 뉘 쓸려료

오리 不足거니 내일리라 有裕랴

 이렇게 분망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자연은 한가롭게 멈추어 있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며 생동한다. 자연의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그 생동감에 동참하는 분망함이 풍류일 수 있다. 그런 풍류를 즐기노라니 괴로움도 쓸쓸함도 없다. 이 작품에 이르러서 자연의 흥취를 즐기는 정서가 흡족한 표현을 얻어, 그 뒤에 두고두고 모범이 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신선이 된 듯이 행세하고 마는 것은 유가의 도리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아, ‘이 몸이 이렁굼도 亦君恩이샷다’는 말로 마무리를 삼았다.

 白光弘의<關西別曲>과 楊士俊의<南征歌>는 둘 다 명종 10년(1555)에 이루어진 견문가사이면서 여러 모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 해에 백광홍은 멀리 북쪽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평안도 지방을 순행한 경험을 가사로 다루고, 양사준은 남쪽에서 일어난 왜란을 평정하는 데 참가했다가 스스로 겪은 바를 가사에다 전했다. 문인이 무인의 임무를 맡은 계기가 있어 이루어진 이 두 작품은 사대부 가사가 작자 신변의 문제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세계를 찾아나설 수 있는 소중한 전례를 보여주었다.

 백광홍은 전라도 출신의 선비로서 일찍이 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여러 명사와 교유하며, 자기 아우 白光勳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얻었다. 평안도 병마평사로 갔다가<관서별곡>을 지었다. 그 무렵 북쪽 국경지대에서 별다른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견문하고 체득한 것이 작자에게는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충격을 표현하는 방법에서는 사대부 문인다운 수법을 사용했다. 임금의 명령을 받아 관서로 떠났다는 서두에서는 행장에 지닌 것이라고는 칼 하나뿐이라면서 기개를 나타냈으나, 세태보다는 경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둘러보는 명승지마다 한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를 동원해서 자기 감회를 나타냈다. 멀리 장백산을 바라보며, 오랑캐 땅의 동정을 살피고, 압록강에 배를 띄우기까지 하고서, 국경에 아무 일도 없어 나라가 태평하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자세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기존의 개념을 앞세웠다.

 楊士俊은 楊士彦의 아우인데,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명종 10년에 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종군해서<남정가>를 지었으며,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고 한다. 을묘왜변은 임진왜란을 예고한 변란이다. 왜적이 전라도 지방에 침입해서 여러 고을을 유린해 한때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는데, 영암전투를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양사준은 金景錫의 막하에서 靈巖전투에 참가하고, 스스로 겪은 바를 보고했다. 우리쪽의 시체가 들에 가득한 참상을 먼저 그리고, 작자 일행이 전장에 도착하게 된 경위를 말한 다음에, 치열한 전투장면을 노래했다.

 정철의 가사는 사대부 가사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었다. 정철은 이이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10년 가까이 더 살았다. 사림파가 집권세력으로 등장해서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시기에 서인의 영수로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도학으로 이름을 얻지는 않았으며, 정치적인 활동에는 시비가 있으나, 시조와 가사에서 이룬 업적은 탁월하다. 원래 서울 사람이었으나 아버지를 따라 가서 전라도를 고향으로 삼았으며 송순의 영향을 깊이 받고, 그 곳 명사들과 교유하는 동안에 이미 개척된 작풍을 두루 계승하고 발전시켜 시조와 가사를 대단한 경지로 올려놓았다. 정철의 작품은 목판으로 새겨 문집에 실어놓았으므로 작자 시비가 있을 수 없고, 이본에 따른 차이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모습이 충실하게 전하고 있다고 인정된다. 정철에 이르러서 국문시가가 작품수, 표현기교, 취급방식에서 한시에 못지않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정철의 가사는<星山別曲>·<關東別曲>·<思美人曲>·<續美人曲>의 네 편이다.<將進酒辭>를 가사에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시조와 더 가까운 독립된 형태의 작품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성산별곡>은 호가 樓霞堂이었던 金成遠이 息影亭이라는 정자에서 노니는데 찾아가 주인의 생활을 흠모하면서, 적막한 강산에 묻혔어도 모든 시름을 잊을 만한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을 아주 화려한 문체로 나타낸 작품이다. 송순의<면앙정가>를 본받았으면서도, 계절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경치를 묘사하며 자연과 더불어 느끼는 흥취를 표현하는 수법이 더욱 뛰어나다 하겠다. 그래서 마치 신선의 경지라도 체득한 것처럼 자랑하는 한편, 험한 세상에 나아가서는 뜻을 이룰 수 없기에 부득이 물러났다고 거듭 암시했다. 기발하게 생동하는 표현으로 풍류를 기리는 것은 소외와 좌절에 대한 보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관동별곡>은 서두에서부터 말이 다르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다가 “關東 八百里에 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聖恩이야 가디록 罔極다”하며 일어났다. 임지로 떠나는 거동이 가볍고 걸음마다 흥이 난다. 가는 곳마다 경치를 노래하면서 아주 득의한 심정으로 현란한 수식을 거칠 것 없이 늘어놓았다. 안축의<관동별곡>을 가사로 재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경기체가이기에 막혀 있던 물결을 터놓은 듯이 흐름이 도도하다. 백광홍의<관서별곡>과는 이름에서부터 대조를 이루면서, 정철은 국토를 놀이터로 삼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풍류에 도취하는 기백으로 바꾸어 놓았다.

놉흘시고 望高臺 외로울샤 穴望峰이

하의 추미러 므일을 로리라

千萬겁 디나록 구필 줄 모다

 이렇게 묘사한 바위에서는 아득히 높은 것을 지향하는 불굴의 정신을 느끼게 하지만, 그런 주제를 일관되게 내세우지 않았다. 부드럽고도 기괴하고, 예사롭지만 놀랍고, 섬세하다가 갑자기 커지는 것을 뒤섞어, 말로 쌓아올린 금강산을 이룩했는데도, 인공이라고는 가하지 않고 자연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 전에 볼 수 없었던 국토 예찬이고, 능란한 수법의 眞景山水畵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국문시가의 표현능력이 한시를 오히려 능가한다는 것을 입증한 성과 또한 대단하기에 뒤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감탄하며 칭송했다.

 <사미인곡>과<속미인곡>은 이른바 ‘忠臣戀君之詞’라고 한 시가의 흐름을 이었고, 가까이는 조위의<만분가>를 모형으로 삼았다. 자기 처지를 천상 백옥경에서 버림받아 하계로 내려온 여인에다 비한 것이 그 증거이고, 말도 비슷한 데가 있다. 그러나 내용보다 표현을 중요시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무슨 연유에서 배척을 받았으며, 다시 나아간다면 어떤 경륜을 펴겠다든가 하는 말은 아무데도 비치지 않으면서, 설득은 버려두고 공감을 얻으려고 했다. 버림받은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절실하게 하소연하는 사설이 순탄하면서도 긴장되게 맺혀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휘어잡는 맛이 있어, 표현능력이 뛰어나다.

 가사는 오랫동안 사대부 남성의 문학이었다. 사대부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이룩해서 여성은 규방에다 감금해 놓고, 한문학에서는 물론 국문문학에서도 문학창작의 능력을 남성이 독점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속을 뚫고 여류가사가 등장하는 것이 또한 필연적인 추세였다. 여성은 국문을 익히는 데 열의를 가졌으며, 가사로 하소연해야 할 사연을 더 많이 지니고 살았다. 여자들이 길쌈 같은 것을 하면서 흥얼거리던 민요에는 글로 적으면 바로 가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아 가사의 저층을 이루었다.

 여류가사가 어떤 작품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고증하기 어렵다. 그러면서 許楚姬가 지었다고 하는<閨怨歌>가 이른 시기 작품으로 인정될 따름이다. 허초희는 許蘭雪軒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불행하게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시를 통해서 번민을 하소연하고 선계의 환상을 찾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룩하는 한편 가사도 지었다고도 하나, 허초희의 생애와 관련된 사연을 지니고 있다 하겠고, 표현의 절실함을 허초희의 한시와 견줄 수 있다.

 <鳳仙花歌>라는 작품도 허초희가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낸다. 허초희의 한시에 그 비슷한 것이 있어서 작가 추정의 증거로 쓰인다. 봉선화로 손톱에 물을 들이는 풍속을 소재로 해서, 봉선화를 자세하게 관찰해서 묘사하고, 여성다운 꿈과 소망을 나타낸 가사이다. 섬세하고 예리한 표현이 인상 깊게 나타나 있다.<규원가>같은 신세타령과<봉선화가>같은 꽃노래는 민요에서 나란히 존재하며 여성의 두 가지 관심사를 나타내고, 조선 후기 규방가사의 自嘆歌類와 花煎歌類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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