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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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설화와 소학지희

5) 설화와 소학지희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조선 전기에도 구전설화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리라고 생각되나 구체적으로 다룰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헌설화인데, 문헌설화는 구전설화의 모습을 어느 정도나마 나타내주는 자료이면서 또한 기록하고 다듬은 사람의 작품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갖는다. 여기서는 두번째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설화 또는 설화집이 그 시대 산문의 판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무슨 의의를 가지는가 살피고자 한다.

 조선 전기에 기록된 설화라면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창업에 관련된 것들을 먼저 들어야 마땅하다. 우선≪高麗史≫에서도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왕실 또는 궁중의 형편과 민간의 풍속을 나타내는 설화를 다수 동원했다. 공민왕이 요승이라고 한 辛旽에게 휘둘린 다음에도 정상에서 벗어난 음란한 짓을 하다가 무뢰배에게 피살되었다던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아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사실인지 설화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민간에서는 요망한 무리가 허황된 말로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었기에 질서를 잡자면 왕조교체가 필요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도 설화가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효자나 열녀는 이름 없는 백성이라도 그 행적을 찾아내서 기려야 한다는 취지를 살리느라고 설화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새 왕조 창업의 필연성과 위훈을 나타내는 설화는 애써 모아서≪태조실록≫을 편찬할 때 반영하고,≪용비어천가≫를 짓는 데 이용했다. 설화를 역사화하고, 그것이 다시 민간으로 설화가 되어 퍼져나가기를 바랐다.

 그 다음 시기가 되면 망국의 설화든 창업의 설화든 좀더 과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成俔의≪慵齋叢話≫에서는 고려 초기부터의 설화를 모아서 姜邯贊이 노승으로 변한 호랑이를 물리쳤다던가 하는 말을 앞세우고, 신돈의 이야기를 다시 하되, 신돈은 양기를 돋구기 위해서 이상스러운 짓을 일삼았고, 누런 개를 보면 깜짝 놀랐으며, 늙은 여우의 정기라고 일컬어졌다 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이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계속 보태지다가 외경심을 자아내기보다는 흥미거리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려가 망할 때 72인의 충신이 세상을 등지고 杜門洞으로 들어갔다던가, 왕족인 왕씨는 10만이나 잡혀 죽고 남은 사람들은 성을 바꾸었다던가 하는 등으로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 모를 말들이 생겨나 조선왕조에 대한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야사임을 표방하는 인물전설은 잡기류의 저술마다 넘치게 실려 있으나 문학 갈래의 동태를 살피는 데서는 그리 긴요하지는 않다 할 수 있고, 그 대신에 서거정의≪太平閑話滑稽傳≫에서 시작되는 滑稽傳類는 대체로 보아 전설이 아닌 민담을 모으고, 그 가운데서도 음담패설에 특히 깊은 관심을 보였기에 별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거정은≪東人詩話≫·≪筆苑雜記≫를 짓고, 그 둘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해 한가한 이야기나 하며 즐기겠다는 뜻을 밝혀놓고, 서문에서 변명을 했다. 늘 긴장을 하고 지낼 수는 없으니 웃음을 찾아 마음을 늦출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골계전을 지은 것은 세상 근심과 무료함을 없애고자 할 따름이라고 했다. 하기야 서거정은 이미 이룬 지위가 대단하니 다소 탈선을 해도 격하될 염려가 없으며, 규범이 될 만한 본격적인 시문을 지을 때에는 너무 긴장해서 그런 휴식이 필요했을 만하다.

 사실은 거기 수록된 이야기야 대부분 자기 주위에서 늘 주고받던 것들이었으나 글로 쓰는 데는 용단이 필요했다. 앞에 실은 이야기는 거의 다 잡기류에 흔히 들어 있을 법한 인물전설에 지나지 않고, 뒤에 가서야 특정 인물과 결부되지 않은 민담이 나오고, 사대부로서의 위엄을 떨쳐버린 내용이 보이기 시작한다. 김선생이라는 인물이 벗을 찾아갔는데 대접이 소홀하자 자기가 타고 간 말을 잡아서 안주를 하자고 했고, 그러면 무엇을 타고 돌아가야 하겠느냐는 말에 뜰에서 노는 닭을 타고 가면 될 것이 아닌가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만 해도 묘미가 있다.

 어떤 대장이 아내를 호되게 무서워했다. 그래서 어느 날 부하 장졸들에게 아내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따로 세운 기 앞에 서라고 했더니, 한 사람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용기를 가졌는가고 길게 칭찬을 하자. 자기 아내가 늘 사람많이 모이는 데로 가면 여색에 관한 말이나 하니 조심하라고 하길래 사람이 없는 쪽에 가 섰다고 한다.

 姜希孟은 다 같이 점잖은 처지였으면서도 그런 한계를 넘어섰다. 서거정의≪골계전≫에 서문을 붙인 데서는 “사실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고, 풍속을 경계하는 것이 소중하며, 말에는 다듬어지고 거친 것이 없고 이치에 이르면 귀중하다”고 해서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찾았고, 자기가 엮은≪村談解頤≫에 음담패설을 서슴지 않고 넣었다.≪촌담해이≫는 시골에서 하는 이야기로서 턱이 빠질 정도로 우스운 것을 뜻하는 말이다. 강희맹은 자기 자신이 농부들과 직접 어울려서≪衿陽雜錄≫에서는 민요를 채록하더니 민담까지 찾아 하층의 전승을 받아들였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선비가 아름다운 첩을 친정에 보낼 때 염려가 되어 玉門이 미간에 있다고 하는 멍청이 하인을 뽑아서 동행하게 했다. 그래도 미심쩍어 몰래 뒤따라가 보았더니, 둘이서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가 하인을 추궁하자 하인은 얼른 알아차리고, 물을 건너다가 아씨가 넘어져서 어디 다친 데가 없는가 살피다가 배꼽 밑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꿰매려고 했다고 대답했다. 선비는 그 말을 듣고 안심을 하고, 본래부터 있던 구멍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했다 한다.

 농부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아서 그런지 내용이 거칠다. 그러나 자세하게 살피면 상당히 묘미를 갖추고 있다. 선비는 어리석은 하인을 속이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기가 속았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안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속이고 속는 사연이되, 어리석어 쉽게 속는다고 가장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임을 일러준다. 상전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없는 하인은 이런 지혜를 발휘해야 상전을 골탕먹일 수 있다. 저자는 그 이야기 끝에 ‘太史公曰’이라고 하는 거창한 말을 붙여서, 간계를 알아차려 미리 다스리지 못한 것을 나무랐지만,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 딴전을 부렸다 하겠다.

 宋世琳은 강희맹과도 다른 처지에서≪禦眠楯≫을 지었다. 문과에 급제해서 말직에 있다가 연산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병을 구실삼아 물러났던 사람이다. 재능과 포부를 지녔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서 여생을 헛되이 보내게 된 울분을 달래느라고 음담패설이나 찾았던 사정을 자기 아우가 붙인 서문과 鄭士龍의 발문에서 밝힌 바 있다. 책 이름은 잠을 막는 방패라는 뜻으로 정해 대단치 않은 것으로 위장했으나, 모아놓은 이야기는 유학의 교화에 대해서 거칠게 반발했다 할 만큼 원색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은근히 암시를 하는 데 그쳐도 될 내용도 구체적으로 지적해 샅샅이 드러내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서거정은 골계전이 따로 있을 만하다는 선례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강희맹은 시험삼아 음담패설에 관심을 가져보았다고 한다면 송세림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난잡한 내용으로 흥미를 삼고 노골적인 표현에 솜씨를 발휘했다.≪어면순≫이야말로 최초의 본격적인 음담집이기에 널리 익히고, 많은 영향을 미쳤다. 成汝學의≪續禦眠楯≫ 이하 후대의 음담집은 대부분≪어면순≫을 모형으로 삼았다.

 成俔의≪慵齋叢話≫는 좁은 의미의 골계전이나 음담집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거기 들어 있는 이야기 중에는 음담패설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것들이 더러 보인다. 여색을 탐내는 중이 상좌에게 골탕을 먹었다고 하는 연쇄담이 그 좋은 예이다. 여색을 탐하는 중이 상좌에게 속아서 공연히 나무 위에 올라가고, 까무라쳐 넘어지고, 물을 건너고 하는 짓이 불도를 닦는다고 하는 이면의 허위를 폭로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용재총화≫에서 인물전설이나 음담패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설화가 적지 않게 들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제5권의 安生 이야기나 제7권 말미의 朴生 이야기 따위이다. 주인공은 성만 나와 있고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소개된다.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서 길게 이어진다. 설화의 전승적인 유형을 따왔다고 하기보다는 실화에 가까운데,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갖추었기에 관심거리로 등장했던 것이다.

 笑謔之戱는 재담으로 웃기는 놀이이다. 한 사람이 자문자답할 수도 있고, 몇이서 배역을 나누어 할 수도 있다. 탈을 쓰거나 해서 특별한 분장방법은 택하지 않고 소도구 같은 것은 필요한 대로 동원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만담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어 연극으로 인정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조선 전기 여러 문헌에서는 優戱·俳優戱라고도 일컬었으며, 소개해 놓은 내용을 보면 연극으로 손색이 없는 갈등의 전개를 갖춘 것이 더러 있다.

 소학지희는 궁중의 놀이가 아니고 광대의 무리가 민간에게 재주를 팔면서 하던 것이다. 고려 때의 전통과 연결시켜 보자면,≪고려사≫ 列傳, 廉興邦 대목에 있는 기사가 다시 주목된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벼슬아치 염흥방이 어디를 가다가, 길거리에서 광대가 세력이 대단한 집 종이 백성을 괴롭혀 소작료를 거두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 것이 바로 소학지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민간에서 하던 것은 기록에 오르지 않는 대신에 산대희에 포함되거나 그런 기회가 아니더라도 임금 앞에서 공연한 것은 관심거리가 되고 좀더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기도 했다.

 광대가 임금 앞에서 소학지희를 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광대는 천인 중에서도 천인이고, 하는 수작이 도무지 엉터리이다. 그런 수작을 듣고 임금이 웃는 것은 체모에 어긋난다. 이런 명분론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임금은 항상 근엄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파격적인 심심풀이를 원했다. 위계질서의 맨 위에 있으니 그만한 재량권을 가지고,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래도 도리를 갖추어야 했기에, 임금이 소학지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민정을 파악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고 소학지희의 내용을 기록한 문헌마다 주석을 달아놓았다.

 소학지희는 내용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 같은 기발한 내용이 인기를 끌었으며, 이 점에서 탈춤과는 아주 다르다. 그 당시 용어로 ‘時事之事’라 한 것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그런 것이라야 임금에게 도움이 된다는 명분에 맞고 흥미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 광대는 임금을 즐겁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을 못살게 구는 관원의 횡포를 임금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활용했다. 그 결과 잘못을 시정하는 데 이르기도 했지만, 임금의 비위를 거슬리면 벌을 받아야만 했다. 임금 앞에 불려간 광대는 벌을 받을 각오까지 하면서 백성의 뜻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으며, 허튼 수작을 언론의 수단으로 삼았다.

 임금 앞에서 풍자를 한 사례는 세조 때에 나타난다. 세조는 신유학의 명분에 매이지 않으려고 했기에 그럴 수 있었을 것 같다. 나례를 하는 광대가 관리의 탐욕에 따르는 사연과 민간의 세세한 일들을 자문자답으로 연출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고 한다. 세조 10년(1464) 12월의 일로≪世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조 14년 5월 高龍이라는 광대가 맹인이 다른 사람을 취하게 하는 내용의 소학지희를 하자 세조가 보고서 웃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처럼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풍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임금의 진노를 산 사례는 연산군 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연산군 5년(1499) 12월에 孔潔이라는 광대가≪大學≫의 강령과 조목을 희롱거리로 삼다가 무례하다고 매를 맞고 쫓겨나 역졸이 되는 벌을 받았다 한다. 孔吉이라는 광대는 이상적인 군주는 만나기 어렵지만, 훌륭한 신하야 어느 때든지 있게 마련이라는 내용으로 소학지희를 벌이다가 매를 맞고 귀양갔다. 연산군의 폭정에 아무도 나서서 간할 수 없을 때에 미천한 광대가 그런 용기를 가졌던 것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수난이 계속된 것은 아니고, 그 뒤의 자료에서는 광대가 풍자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었다는 사례가 흔히 보인다. 중종 때쯤 되면 소학지희를 통해서 민심을 파악하는 관례가 어느 정도 공인되지 않았나 싶다. 자료가≪조선왕조실록≫이 아닌 개인 저작에 실린 것들도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풍자했는지를 좀 더 알아낼 수 있다. 漁叔權의≪稗官雜記≫를 보면 좋은 예가 둘 나란히 실려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가에서 巫稅布를 아주 엄중하게 징수해서, 관가 차사가 문에 당도해 고함지르고, 들이받아 무너뜨릴 때마다, 온 집안이 창황하고 분주하게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고, 기일을 늦추어 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며칠씩 계속되기도 하며, 괴로움과 피해가 아주 심했다. 마침 때가 되어 優人이 이 일로 놀이를 지어 궁중 안뜰에서 공연하자, 임금이 그 세를 면제하라고 명령했다. 우인 또한 백성에게 유익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까지 우인들이 놀이를 전하면서 그 일로 사건을 삼는다고 했다.

 어느 임금 때의 일인지 밝히지 않은 것은 세상에 전하는 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무세포는 무당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며, 천민을 수탈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광대는 무당 가문에서 나왔거나 무당과 가까운 관계에 있기에 무세포 때문에 겪는 고통을 소학지희의 내용으로 삼아서 임금 앞에서 그것을 공연했던 것이다. 여기서 광대의 처지와 관심사를 좀더 확인할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일은 기록을 할 당시까지 광대의 무리가 그 놀이를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학지희는 매번 새로 창작되지 않고 전승되기도 하며 민간에게도 인기를 모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기사에서 다룬 소학지희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해 보건대 무당굿놀이에서의 재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중종 때에 定平府使 具世璋은 탐욕스럽기만 하고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말 안장을 파는 백성을 관가 뜰로 불러들여 자기가 직접 값을 흥정하면서, 비싸다느니 싸다느니 하며 며칠을 힐난하다가 마침내 관가 돈으로 그것을 샀다. 우인이 때가 되자 그 일로 놀이를 꾸몄다. 임금이 물으니 정평부사가 말 안장을 사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잡아다가 심문하라고 명령했으며, 결국 죄를 다스렸다. 우인과 같은 자도 능히 탐관오리를 규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사례는 시기와 규탄의 대상이 되는 벼슬아치의 이름도 명시했다. 물론 놀이를 할 때에는 누구라고 밝히지 않은 채 거동만 보이며 대사를 주고받았을 터인데, 임금이 물으니 유래를 말했던 것이다. 놀이는 놀이 자체로서 흥미롭게 진행되고 일반화된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는데, 유래를 밝히자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고, 정평부사 구세장의 죄를 다스리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 신문에 나는 비판적인 기사와 같은 구실을 했다.

 작자미상의≪芝陽漫錄≫에서는, 명종이 심사가 불편해서 광대를 불러다가 소학지희를 하게 했다고 하고 그 내용을 소개했다. 특별한 기회가 아닐 때 심심풀이로 소학지희를 찾은 좋은 예라 하겠다. 그 내용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못나 조카와 바보스러운 사위를 서로 정실로 등용하는 사건을 연출하자 임금이 크게 웃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이조판서나 병조판서가 높은 지위에 이른 벼슬아치를 뜻하고 특정인을 나타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에 임금은 웃는 것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柳夢寅의≪於于野談≫에는 貴石이라는 광대가 했다는 소학지희의 두 가지 사례를 자세하게 들었는데,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갖는다. 귀석은 우선 ‘서울의 優人으로서 俳戱를 잘하기에’ 명종이 어머니를 위해서 進豊呈을 할 때 뽑혀서 놀이를 했다 한다. 진풍정이란 궁중에서 하는 큰 잔치의 하나이며, 산대희를 그 절차에 포함시키는 것이 관례이다. 산대희의 일환으로 소학지희도 했던 것이다.

 귀석이 그 때 했다는 놀이가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풀을 묶은 꾸러미 넷을 바치는데, 큰 것이 둘, 중간 것이 하나, 작은 것이 하나였다. 수령으로 자칭하는 자가 동헌에 앉아서 진상하는 일을 맡은 아전을 불렀다. 우인 하나가 그 아전이라고 하고서 무릎으로 기어서 수령 앞에 갔다. 귀석은 소리를 낮추고서, 큰 꾸러미 하나를 들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조판서께 바쳐라”하고, 큰 꾸러미를 또 하나 들며 “이것은 병조판서께 바쳐라”했다. 중간 것 하나를 들고서는 “이것은 대사헌에게 바쳐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작은 꾸러미를 들고서, “이것으로 진상을 하라”고 했다고 했다.

 귀석은 이 연극을 창작하고 주연했다. 자기는 수령의 역을 하면서 동헌이라고 가상한 곳에 앉았고, 다른 사람 하나로 하여금 상대역이 되어 진상품을 맡은 아전 노릇을 하게 했다. 배역을 나누어서 공연했던 상황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진상품이라면서 풀을 묶어서 만든 꾸러미를 사용했으니 소도구를 갖추었다. 그러나 마당에서 공연했을 따름이었겠고, 무대장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용은 지방 수령이 이조판서·병조판서 그리고 대사헌에게 개인적으로 보내는 뇌물만 소중하게 알고, 임금에게 공식적으로 바치는 진상품은 하찮게 여기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맨 나중에 든 작은 꾸러미가 임금에게 바칠 진상품이라니, 누가 보아도 웃을 일이고, 임금은 은근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지방 수령과 조정의 고관들이 결탁해서 임금을 속이고 무엇이든지 함부로 가로채는 데 불만을 나타내자고,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인 설정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세운 이조판서·병조판서·대사헌이야 위세를 자랑하는 고관을 뜻할 뿐이지 특정인은 아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서로 든 놀이는 귀석이 자기 주인의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한 것이다. 이번에는 귀석이 宗室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종실의 종이면서 광대로 이름이 났다는 말이다. 귀석의 주인인 종실 양반은 實職을 얻지 못해 딱한 처지면서도 여러 陵이며 殿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을 맡도록 뽑혀 수고만 많았다. 귀석이 진풍정 놀이에 참가해서 소학지희를 맡은 기회에, 다른 광대 몇 사람과 함께 그 일을 두고 스스로 지은 연극을 연출하고 주연했다고 한다. 등장인물이 여럿이고, 말도 두 필이나 필요한 연극이다.

 종실 양반이 비루먹은 말을 타고 가고, 귀석은 연극 속에서도 그 양반의 종 노릇을 하며 고삐를 잡았다. 그러나 어느 재상으로 가장한 광대가 준마에 올라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며 갔다.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데, 종실 양반이 걸려들었다. 종인 귀석을 잡아다 땅에 꿇리고 매질을 했다. 귀석은 원통한 처지를 큰 소리로 하소연하였다. 자기 주인은 재상보다 지위가 낮지 않은 처지이면서 고생만 하고 있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런 횡포를 부리느냐고 했던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임금 앞에서 자기 주인의 사정을 대변하고자 해서 연극을 한 것이다. 그 얼마 후에 자기 주인이 실직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귀석의 작품은 소학지희가 상당한 규모를 갖춘 연극으로 발전했음을 입증해 준다 하겠는데, 그 뒤에는 오히려 그런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며 소학지희는 두드러진 구실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그 대신에 탈춤의 시대가 찬연하게 열렸다. 그래도 소학지희가 없어지지는 않았을 터이니, 어떻게 계승되었는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를 불러서 놀 때 광대가 선비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는 儒戱는 소학지희의 연장이 아닌가 싶고, 줄타기를 하는 광대의 재담에도 그런 요소가 보인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축소된 모습이다. 소학지희가 탈춤이나 판소리로 계승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우니, 그 행방을 추적하는 작업이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연극의 형태를 두고 본다면, 무당들의 연극인 무당굿놀이 또는 거리굿이 소학지희와 가장 가깝다 할 수 있으나, 이런 관계는 소학지희의 모체가 된 연극이 그것대로 전승되고 발전을 보인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趙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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