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3. 언어
  • 1) 문자생활
  • (1) 한자와 한글

(1) 한자와 한글

 조선 초기의 문자생활은 앞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한자로 행해졌다. 나라의 공적인 기록이나 문서는 모두 한자로 씌어졌던 것이다. 한자로 된 글은 중국의 古典漢文,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문이거나, 한자의 새김[釋·訓]이나 소리[音]를 빌어서 국어를 표기한 吏讀文(흔히 吏讀[이두]라고만 부르기도 한다)이다. 역대의 實錄이나 각종 法令, 關文이나 牒呈 등 관아의 공문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 중에서 이두문이 나타나는 경우는 실무와 관련된 법령이나 공문 등이다. 중국과 우리 나라가 당시에 주고받은 外交文書에서 실무와 관련된 것은 吏文으로 작성되었는데, 나라 안에서의 이두문은 바로 그 이문과 같은 성격이다.448) 安秉禧,≪國語史硏究≫(文學과 知性社, 1992), ‘제3부 차자표기법 연구’ 참조. 이러한 이두문 사용의 예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刑律로 사용된≪大明律直解≫(태조 4년;1395)의 번역문에서 단적으로 보게 된다. 질이 매우 나쁜 죄 열 가지 곧 ‘十惡’의 하나인 ‘惡逆’에 대한 규정(권 1, 4)을 원문과 번역인 이두문으로써 예시한다. 이두문에 나오는 이두는 밑줄을 치고, 이두문의 현대어 번역을 괄호안에 넣어 붙인다.

謂毆及謀殺祖父母父母夫之祖父母父母 殺伯叔父母姑兄姉外祖父母及夫者

祖父母及父母果 夫矣祖父母及父母等乙 打傷爲旀 謀殺爲旀 父矣兄弟在 伯叔父果 伯叔妻在母果 父矣同生妹在姑果 吾矣兄果 長妹果 母矣父母果 夫果等乙 謀殺爲行臣卜乎事(조부모 및 부모와 남편의 조부모 및 부모 등을 때려 상하게 하거나 살해하려고 음모하며, 아버지의 형제인 백부, 숙부와 백숙부의 아내인 백숙모와 아버지의 동복누이인 고모와 나의 형과 누나와 어머니의 부모와 남편 등을 살해하려고 음모하는 일).

 원문과 이두문을 대조하면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대명률≫이 중국 명나라의 법률이어서 우리 나라 실정에 맞추어서 원문 내용을 가감하거나 바꾸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위 ‘惡逆’의 규정에서는 백숙부 등을 살해하는 것으로 되었으나, 이두문은 살해하려고 음모하는 일로 적용범위를 확대하고 있다.449) 安秉禧, 위의 책, ‘제3부 제22장≪大明律直解≫의 이두’에 원문과 이두번역의 차이가 논의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 나라 法制史의 연구대상은 되지만, 국어의 역사를 살피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국어사의 관점에서는 이두문과 원문을 대조하여 이두문의 성격을 밝히는 일이다. 그러한 대조로 드러나는 이두문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문장의 핵심이 되는 어구는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하나 한자어의 어순은 국어의 어순으로 바꾼다. 위의 이두문에 나타나는 ‘打傷, 謀殺’이란 타동사는 목적어 뒤에 나타나나, 원문의 타동사 ‘毆及謀殺’은 목적어 앞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둘째 어구의 문법적 관계를 위하여 국어의 助詞와, 動詞 ‘하-’와 繫辭(이른바 指定詞 또는 잡음씨) ‘이-’의 活用形이 이두로 표기된다. 위의 조사 ‘果[과/와], 矣[의], 乙[을/를]’, 활용형 ‘爲旀[하며], 在[인], 爲行臣卜乎事[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자로 행하는 문자생활, 곧 한문과 이두문에 의한 문자생활은 공적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자들의 문집이나 민간에서 서로 주고받는 文書 등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문집은 한문으로 이루어지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재산 매매나 증여의 文記, 和會文記 등 문서는 이두문으로 작성되는 것이 관례였다. 한문과 이두문의 구별된 사용이 공적인 문자생활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자생활은 진솔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한문은 말할 것도 없고, 국어가 어느 정도 표기되는 이두문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에 제시된 이두문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국어가 완벽하게 표현되지 못한다. 더욱이 이두문을 읽고 작성하는 일은 한문의 그것에 비교하면 쉽지만, 천민은 말할 것도 없고 아녀자나 양민에게도 결코 쉽지 않다. 한자와 한문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세종이<訓民正音序>에서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어리석은 일반 백성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세종 25년(1443) 겨울에 音素文字이면서 音節文字인 훈민정음 곧 한글이 창제되었던 것이다.

 한글은 한자에 비하면 배우고 사용하기가 여간 쉬운 문자체계가 아니다. 한글로 쓴 문장은 한문이나 이두문이 나타내기 힘든 미묘한 감정이나 일들도 쉽고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한자로는 엄두도 못내던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문자생활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한자에 의한 문자생활을 대신하지 못하였다. 공적인 문자생활은 여전히 한자로만 행해졌다. 공적이 아닌 문자생활에 국한하여 한글이 사용되었다. 한자나 한문을 공부하기 위하거나 백성의 교화나 종교의 홍보를 위한 문헌의 간행에, 아녀자들의 주고받는 편지에 한글이 사용된 것이다. 사사로이 전답이나 노비를 물려주거나 매매할 경우에도 법적인 보호를 받기 위하여는 모든 문서가 이두문으로 작성되어야만 하였다. 한글이 창제됨으로써 형성된 한자와 한글에 의한 우리 나라 문자생활의 이러한 二重構造는 조선 초기에 이루어져서 19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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