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3. 언어
  • 1) 문자생활
  • (2) 한글의 사용과 보급

(2) 한글의 사용과 보급

 한글은 공적인 문자생활에 등장하지 못하였으나, 창제 이후 꾸준히 보급되고 사용의 영역을 확대하여 나간 것으로 보이나, 쉽게 보급되고 당장 널리 사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이는 한글이 사용된 문헌 이른바 한글문헌을 살펴보면 짐작되는 것이다.

 한글창제 이후의 약 50년, 곧 15세기 후반기의 한글문헌은 상당한 양에 이른다.450) 한글문헌에 대하여는 安秉禧,≪國語史資料硏究≫(文學과 知性社, 1992)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세종 28년의≪訓民正音≫(解例本)을 비롯하여 연산군 3년(1497)의≪神仙太乙紫金丹≫까지 약 40부의 문헌이 현재 전한다. 그 중에는 1부이면서 25권인≪月印釋譜≫, 24권인≪釋譜詳節≫도 있으므로 상당한 분량의 책이 간행된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가장 많은 것은 불교관계 문헌으로, 전체 한글문헌의 약 60%를 웃돈다. 그 밖에 語學書·詩歌書·儒敎書·醫學書 등으로 나뉜다. 한편 이름만 알려지고 책은 전하지 않는≪初學字會≫등 漢字학습서도 있다. 여러 방면의 한글문헌이 간행된 셈이다.

 이들 문헌에서 주목할 일은 모두 서울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금속활자로 간행된≪釋譜詳節≫·≪月印千江之曲≫·≪楞嚴經諺解≫·≪杜詩諺解≫등과 목판으로 간행된≪훈민정음≫(해례본)·≪龍飛御天歌≫·≪月印釋譜≫·≪三綱行實圖≫등은 校書館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목판으로 된≪능엄경언해≫·≪法華經諺解≫등 刊經都監의 한글문헌 9부는 모두 중앙의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책들이다. 한문본 불경이 간경도감에서 왕명을 받아 全州·羅州·尙州·晉州 등에서 간행된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15세기 말기의 한글문헌인≪六祖法寶壇經諺解≫와≪施食勸供≫도 仁粹大妃의 명령에 따라 정교한 목활자로 간행되었으므로 교서관이나 圓覺寺와 같은 중앙의 사찰에서 이루어진 문헌임에 틀림없다. 책의 엉성한 됨됨이와 刊記에 따르면 한글문헌의 地方版은 15세기의 마지막 해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들면 점차 많아진다. 그 최초의 책은 연산군 9년(1500) 陜川 鳳栖寺에서 간행된≪牧牛子修心訣諺解≫이다. 그러나 이 책도 중앙의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것을 복각한 책이다. 다시 말하면 중앙의 原刊本을 중간한 것이다. 지방에서의 원간본인 한글문헌은 金安國이 관찰사로 있으면서 중종 13년(1518) 경상도에서 간행한≪二倫行實圖≫·≪呂氏鄕約諺解≫·≪正俗諺解≫등이 최초의 예가 아닌가 한다. 그 뒤로 중앙의 원간본을 복각한 책과 함께 원간본인 한글문헌이 지방에서도 잇따라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한문으로 된 문헌은 고려시대에도 지방판이 있는 사실에 비추어서 한글의 보급이 지방에서 한글문헌을 간행할 정도로 잘 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한글의 보급이 15세기 후반의 중앙에서도 잘 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증거가 있다.451) 조선 초기의 한글사용과 보급에 대하여는 安秉禧, 앞의 책(1992a), ‘제2부 제16장 훈민정음 사용의 역사’ 참조.≪世宗實錄≫권 136∼147, 樂譜 중의 권 140∼145에는≪용비어천가≫의 한글가사도 실려 있다. 이 악보는 성종 3년(1472)에 된 필사본인데, 한글가사의 표기에는 상당한 誤字가 나타난다. 오자에는 한글의 合字法에 어긋나는 것도 있다. 한글가사를 베낀 사람이 한글을 제대로 몰랐다고 인정되는 오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방에서의 한글보급은 16세기 전반에도 미미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며, 그것을 증언하는 기록도 있다. 崔世珍이 중종 22년(1527)에 편찬한≪訓蒙字會≫凡例의 한 항목이 그것이다. 어린이에게 한자를 익히게 하기 위하여 편찬된 이 책의 앞머리에는 ‘諺文字母 俗所謂反切二十七字’라는 제목으로 한글자모와 그 합자법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최세진은 범례의 한 항목에서 시골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諺文字母’로써 한글을 먼저 익히게 하여≪훈몽자회≫를 공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 증언은 위에서 설명한 한글문헌의 지방판 간행이, 적어도 원간본의 경우 16세기 이후의 일이라는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16세기 중기에 들면서는 한글보급이 전국에 걸쳐 광범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분명한 증거는 제시할 수 없으나, 첫째로 1세기에 걸쳐 여러 방면의 많은 한글문헌이 간행되어 널리 읽혔을 것이고, 둘째 한자와 한문의 학습에서≪훈몽자회≫범례의 한 항목에서 말한 이유로 經書諺解를 읽기 위하여 한글학습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셋째 한글로 표기된 가사나 시조 등 국문학의 발달이 한글의 보급과 사용을 촉진하고, 넷째 이른바 諺簡 등으로 여성에 의한 한글의 사용이 보편화된 정황으로 미루어서 한글의 보급과 사용의 광범함을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1977년 봄 淸州市 北一面의 順天金氏 묘에서 나온 한 무더기의 언간은 1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여성에 의한 한글편지가 성행하였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16세기에 들면서 서서히 나타나서 중기 이후로 각처에서 간행된 한글문헌도 그러한 한글보급을 전제하여야 설명할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한글은, 비록 한자와 같이 공적인 영역이 아니지만 우리 나라 문자생활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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