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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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언어
  • 2) 언어
  • (1) 한글문헌과 그 언어

(1) 한글문헌과 그 언어

 한자를 빌어서 국어를 표기한 자료, 곧 이두와 같은 차자표기자료는 국어의 모습을 매우 암시적으로 보일 뿐이다. 예컨대 조사를 표기한 ‘果·矣·乙’이나 동사를 표기한 ‘爲弥’가 현대에의 ‘과/와, 의, 을/를’이나 ‘하며’에 해당하는 어형을 나타내는 사실은 인정되나, 표기될 당시의 실제 어형이 어떠하였으리라고 명확하게 나타내지는 않는다. 명사 말음에 따른 ‘과/와, 을/를’의 교체나 모음조화에 따른 ‘/의, /을’ 등의 교체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비하면 한글문헌의 국어자료는 당시 국어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音素文字인 한글은 표기될 당시의 언어사실을 그대로 文字化하였기 때문에, 한글문헌은 語彙와 文法體系는 말할 것도 없고 音韻體系까지도 소상히 알려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글이 창제된 15세기 중엽의 국어에는 어떤 음운이 어떤 체계로 존재하였고, 그것이 16세기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한글문헌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문헌이 보여주는 모든 언어사실이 그대로 실재한 것일 수는 없다. 자료의 성격이나 표기자의 규범적 태도, 또는 方言의 교섭 등에 따라서 언어사실이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첫째로 조선 초기의 한글문헌은 대부분이 諺解書인 사실을 주목할 것이다. 언해서는 한 大文씩 한문의 원문에 한글로 구결을 달고서 번역을 대조하는 체제로 되어 있고, 그 번역은 거의 直譯이다. 지나치게 한자어가 나타나는가 하면, 한자 ‘以, 得’ 등을 ‘, 시러곰’으로 옮겨놓는 일이 있다. 이것으로 입말[口語]에서 한자어의 사용을 주장하고 轉移語 ‘, 시러곰’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자료의 지나친 믿음이 가져온 잘못이다.

 둘째로는 조선 초기, 특히 15세기 중엽의 한글문헌이 보이는 자료의 규범성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한글문헌의 한자음이≪東國正韻≫에 따라 표기된 사실이다. 다 알다시피≪동국정운≫은 당시의 한자음을 크게 교정하여 인위적으로 규범화한 것이다. 그리하여≪동국정운≫에 따른 한자음은 당시의 실재한 한자음이 아니다. 예컨대 15세기 한글문헌에서 ‘骨髓, 氣韻, 對答, 時節’은 ‘, 킝, 됭답, 씽’(이상≪月印釋譜≫권 1)과 같이 한자에 夾註로 표기된다. 이는≪동국정운≫에 따라 표기된 교정된 한자음인 것이다. 한자 없이 한글로만 표기될 경우에는 ‘골슈(牧牛 2b), 긔운(金三 1, 6b), 답(杜詩 25, 45b), 시졀(內訓 3, 32a)’로 나타난다.452) 조선 초기 한글문헌을 인용할 경우에는 국어학계의 관례를 따라 문헌 이름을 약호로 한다. 예컨대 ‘牧牛, 金三, 杜詩’는 각각≪牧牛子修心訣諺解≫,≪金剛經三家解≫,≪杜詩諺解≫(原刊本)를 가리킨다. 이것이 당시의 실제 한자음이다. 이와 같이 심하지는 않으나 고유어의 표기에서도 어느 정도의 ‘교정된 표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창제 당시에 한글을 가리키는 말인 ‘訓民正音’을 ‘百姓 가르치시는 正한 소리’(訓諺 1a), ‘正音’을 ‘우리 나라 말을 正히 반드시 옳게 적는 글’(釋詳序 5b)이라고 한 데서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다.

 셋째로 당시의 한글문헌은 당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말, 곧 共通語를 반영하는 사실이다. 方言은 교통의 불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류가 빈번하지 못할 때에 생겨난다. 교통이 발달하고 교육제도가 정비되어 국어교육을 강화하고, 거기에 대중매체가 발달하면 方言差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조선 초기 국어의 방언은 현대어보다 훨씬 큰 차이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의 한글문헌은 언어의 동질성을 보인다. 이것은 위에 말한 언어의 규범성을 확보하려는 표기태도가 작용하였겠지만, 한글문헌이 그 배경에 규범성의 바탕으로서 서울말인 공통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6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지방판 한글문헌에서는 간혹 15세기나 16세기 중앙의 그것과는 다른 국어의 모습을 보이는 일이 그 근거다. 선조 4년(1571)에서 선조 6년 사이에 함경도 咸興에서 간행된≪村家救急方≫과 선조 10년 전라도 順天의 松廣寺에서 간행된≪蒙山法語諺解≫와≪誡初心學人文≫등에는 口蓋音化가 완성되었음을 말하는 어형이 나타난다. 선조 8년 전라도 光州에서 간행된≪千字文≫에는 다른 문헌에 보이지 않는 독특한 어형이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西南방언(전라방언)과 東北방언(함경방언)의 존재를 알리는 문헌이다. 더욱이 전라도 출신인 柳希春이 편찬한≪新增類合≫을 본 선조가 한자의 새김에 ‘土俚’가 많다고 하여 수정을 지시하였는데,453) 柳希春,≪眉巖日記草≫丙子(선조 9년;1576) 7월 22일.
安秉禧, 앞의 책(1992b), 413∼437쪽 참조.
이 ‘토리’는 서남방언을 가리킨 것으로 공통어와 방언 사이의 차이를 증언하는 것이다.

 위의 사실을 감안할 때, 적어도 15세기 한글문헌에 보이는 국어는 오늘날의 표준어에 필적하는 서울말임을 알 수 있다. 물론 한문 원문에 지나치게 이끌린 직역이나 교정된 한자음은 서울말의 언어사실이 아니다. 여기에 음운, 문법, 어휘로 나누어서 설명하려는 조선 초기의 국어는 바로 그러한 언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지방판이 보이는 중요한 방언현상은 필요할 경우에 언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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