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3. 언어
  • 2) 언어
  • (2) 음운

(2) 음운

 454) 이하 音韻, 文法의 서술은 주로 다음 저서가 바탕이 되어 있다.
李基文,≪國語史槪說(改訂版)≫(塔出版社, 1972).
허 웅,≪우리옛말본≫(샘문화사, 1975).
安秉禧·李珖鎬,≪中世國語文法論≫(學硏社, 1990).
조선 초기 국어는 音節의 높낮이가 단어의 뜻을 구별하는 聲調言語(tone language)이다. 성조는 한글창제에서 글자 오른쪽에 찍히는 傍点으로 표시하도록 규정되었다. 방점이 1점이면 去聲으로서 높은 성조, 0점이면 平聲으로서 낮은 성조, 2점이면 上聲으로서 처음이 낮고 나중이 높은 성조를 나타낸다. 현대국어는 음절의 長短으로 말뜻이 구별되는 ‘눈[雪]:눈[眼], 말[語]:말[斗], 밤[栗]:밤[夜]’(각각 앞의 말이 長音) 등이 ‘눈(상성, 雪):눈(거성, 眼), 말(상성, 語):말(거성, 斗), 밤(상성, 栗):밤(평성, 夜)’ 등과 같이 음절의 높낮이로써 말뜻이 구별되어 방점으로 다르게 표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성은 평성과 거성이 결합된 複合聲調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예컨대 ‘부텨’[佛]는 두 음절이 모두 낮은 성조인 평성이나, 여기에 높은 성조인 거성의 主格조사 ‘이’가 결합되면 ‘부톄’로 되고 그 성조는 평성과 상성으로 되는데, 이것이 복합성조의 예증이다.

 성조를 나타내는 방점표기는 16세기 후반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15세기 말 문헌인≪神仙太乙紫金丹≫에 이미 방점표기가 폐기되었고, 16세기 문헌에서는 표기에 상당한 혼란이 나타나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그 뒤에 새로이 간행된 문헌에서는 방점표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18세기에도 방점표기가 있는 문헌이 간행되었으나, 그것은 원간본에 방점표기가 있는 문헌을 복각한 데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성조는 16세기에 들면서 혼란을 보이다가 장단에 자리를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곧 평성과 거성은 짧은 소리, 상성은 긴 소리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방언 중에는 동남방언(경상방언)과 동북방언에서 15세기의 성조체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아직도 성조가 존재한다는 보고가 있다.

 母音에는 현대어에 없는 ㆍ[Λ]가 존재한다. 이 모음은 제2음절 이하에서는 16세기에 ㅡ로 변하였고, 제1음절에서도 근대어의 ㅏ로 변하였다. 예컨대 ‘[刃]>날, [月]>달, [心]>마음, 치-[敎]>가르치-’ 등이다. 현대어의 單母音 ㅐㅔㅚ는 조선 초기에는 글자 구조 그대로의 二重母音이다. 이들이 단모음으로 변한 것은 근대어의 일이다. 그러므로 15세기 국어는 ㆍㅗㅏㅡㅜㅓㅣ의 7母音體系를 갖는다. 이들이 한 形態素 안이나 語幹과 語尾의 통합에서는 陽性母音인 ㆍㅗㅏ와 陰性母音인 ㅡㅜㅓ는 각기 그들끼리 결합하고, 中性母音 ㅣ는 결합에서 중립적이나 음성모음과 더 많이 결합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母音調和라고 부르는데, ㆍ의 소실과 ㅐㅔㅚ의 單母音化로 현대어에서는 擬聲語와 活用에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子音에는 현대어에 없는 有聲摩擦音 ᄫ[β], ᅀ[z]이 더 있다. 이들은 모두 有聲音 사이에만 나타나는데, ᄫ은 15세기 후반에 /w/로 변하고 ᅀ은 16세기 후반에 탈락하였다. 예컨대 ‘사>새우, 글>글왈>글월, 아>아우, 두>두어’, 이 밖에 유성마찰음 ‘ɦ’도 하나의 音素로 존재하다가 16세기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동사 ‘말-’[勿]에 어미 ‘-고라, -오라’가 통합된 활용형인 ‘말오라(<말고라), 마로라’에서 ‘말오라’가 ‘마로라’와 달리 표기되는 것은 ‘말오라’의 ‘-오라’에는 頭音으로 /ɦ/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자음의 결합에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은 語頭子音群의 존재이다. 단어의 頭音에 ㅂ과 다른 無聲子音의 결합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은 ㅂ系 合用竝書로 표기되었는데, ‘[意], [米], [隻], [蜜], [時], 디-[析]’ 등이 그 예이다. 이들에서 예사소리와 된소리 앞의 ㅂ은 후행하는 자음에 동화되어 된소리로 되고, 거센소리 앞의 ㅂ은 탈락되어 어두자음군이 없어진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그러나 複合語에서는 ‘좁쌀[粟], 접때[며칠 전]’ 등 그 흔적이 현대어에도 남아 있다.

 조선 초기 국어의 ㄷ, ㅌ은 i나 半母音 y 앞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나나, 근대어에서 구개음화를 일으켜 ㅈ, ㅊ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의 지방판 문헌에서는 이 구개음화뿐 아니라, 語頭의 ㄱ, ㅎ도 구개음화를 일으킨 예가 나타난다. 1577년 松廣寺 간행의≪誡初心學人文≫등에 ‘논지(<논디, 蒙法 1b), 住쥬持디人인(<듀디인, 初心 10b), 定졍(<뎡, 初心 19a), 兄셩弟뎨道도(<형뎨도, 法語 15a)’ 등이 나타나고, 1572년경 함흥에서 간행된≪村家救急方≫의 첫머리 ‘鄕名’에 ‘디남셕(<지남셕, 指南石), 사새지(<…기, 沙月鳥油)’ 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울말인 共通語와는 달리 서남방언과 동북방언에서는 구개음화가 16세기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자료가 없으나, 근대어의 자료 등으로 미루어서 동남방언도 사정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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