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1) 건축기법과 특징

1) 건축기법과 특징

 건축문화의 흐름에서 계기가 된 시점을 경계로 하여 시기를 구분하면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유사 이래 신라통일이 이룩된 무열왕대까지, 제2기는 문무왕대로부터 고려 원종대까지, 제3기는 고려 충렬왕대로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제4기는 임란 이후부터 大韓帝國末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 전기는 제3기의 후반에 해당한다.590) 申榮勳,<韓國建築史>(≪韓國文化史大系≫Ⅳ,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0), 131쪽.

 이 시기 건축의 특성은 栱包구성에서 花斗牙系591) 花斗牙는≪三國史記≫ 권 33, 志 2, 屋舍에 보이는 공포의 명칭이다. 흔히 우리가 쓰고 있는 ‘柱心包系의 공포’라는 新造語 대신에 그 이전부터 써왔던 이 명칭을 썼으면 한다.의 공포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흐름에 花栱系592)≪朝鮮王朝實錄≫ 기록에 花栱과 草工이 보인다. 화공을 요즈음 흔히 쓰는 多包系拱包의 재래 명칭으로 보고 사용하려 한다.라고 하는 새로운 법식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양상을 띤다는 데 있다. 화두아는 기둥에만 포작을 쌓아 완성하는 공포이다. 이른바 중국의 下昻이라고 하는 구조와 우리의 柱三包와 같은 공포구조인데, 건축사의 제1·2기에 걸쳐 목조건물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제3기부터는 화공계가 점점 기세를 떨치고 제4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화두아계는 고구려·백제·신라의 문화 특성에 따라 삼국이 제각기 특색있는 발전을 하였다. 제2기에 삼국통일의 영향으로 그 차이가 줄어들었지만 제3기에 들어서면서 목조건물이 지역에 따라 제각기 유형을 달리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제3기의 목조건물은 고구려계의 고려건축, 백제계의 고려건축, 신라계의 고려건축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鳳停寺 극락전, 浮石寺 무량수전, 修德寺 대웅전, 강릉 객사문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런데 제3기 중반 즉 조선 초기에 이르면 이렇게 분류할 수 있었던 특색이 점점 모호해졌다. 한 지역의 뛰어난 작품을 모본으로 삼고 그것을 모방하거나 복사하는 경향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화공계의 등장에 연유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화두아계가 진솔하고 기능적이며 천장을 연등으로 그냥 드러내어 두는 등의 골격을 지녔던 것에 비하여, 화공계는 매우 장식적이며 의도적이어서 화려하고 장대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과 맞물리면서 대단한 선풍으로 주류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공포의 경우에, 기둥 위에만 설치하고 간살이는 비어 두고 담백하게 처리하는 화두아계와 달리 화공계는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에도 포작을 다시 쌓아 공포를 형성하고 포작 자체에도 草刻하며 천장으로 소란반자를 해서 매우 장엄하게 조영하였다.

 화공계는 궁실보다는 사원건축에서 먼저 시험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사원에서의 시험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을 때 유행을 타고 궁실 건축에도 채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最古의 사례가 心源寺 普光殿이라는 목조건물일 뿐 아니라, 사원의 석조 건축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조선 초기에는 민가에서도 화공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점차 가옥이 화려해졌다. 세종은 검약을 위해 ‘家舍制限令’을 내려 백성들 집에 화공을 쓸 수 없다고 제한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허용되거나 묵인되던 고려 이래의 관행이 국가기강 확립이라는 명분으로 억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공으로 대변되는 건축구조는 화사하여 조금만 더 장엄하면 궁실의 건축양상과 대등하게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개국공신의 고대광실의 집이 지나치다고 지적되기도 하듯이 장중하며 화려하였다.

 특히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예의가 일반화되면서 군주와 백성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살림집을 南面으로 짓는 일조차 삼가도록 검약을 강조하고 신분에 따른 격조를 제한하게 되면서부터 집의 장식적 요소는 억제되거나 생략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구애받지 않았던 사원건축물에도 은연중 제약이 가해지는 추세가 되었다. 특히 외부로 드러나는 장엄이 현저하게 위축되어 고려시대까지 지극히 장식적이던 기와지붕이 검소한 형상으로 정돈되기에 이르렀다. 鷲頭 등에 도금하는 일 등도 억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억불정책이 강화되면서 더욱 심해져 성종 이후에는 고려시대의 융성한 모습을 다시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조선 전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재건하는 건축물이 아주 검약한 구조가 되었던 것은 전란 중에 야기된 경제적 파탄에도 원인이 있지만, 초기부터 장려되던 검약의 시류가 파급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고려 중엽 이래 다포계의 건축구조가 사원건축을 위시하여 전 건축계를 풍미하던 흐름은 조선 초기에도 지속되었지만 장식적인 요소가 제거되고 기능 위주였으므로 견실한 형용으로 조성되곤 하였다.

 그러나 긴장된 양상의 지속은 반발을 초래하여, 임진왜란 이후 民藝적인 자유분방한 방향으로 선회하는 계기를 잉태하였다. 역대 건축사에서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반대적인 성향의 새로운 건축이 대두한다는 원칙이 이 때에도 나타나 다시 전환의 시기를 맞았던 것이다.

 건축의 法式은 옛부터 전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아, 삼국시대 이래의 흐름이 의연히 지속되었다. 반면에 技法은 도구의 발달에 힘입어 새 시대에 걸맞게 발전하였다. 그 예를 창과 문의 구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내릴톱과 실톱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가는 나무오리로 짜서 맞추어 무늬를 형성하는 창과 문짝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꽃살무늬만 하여도 이제까지는 널빤지에 무늬 밑그림을 그려 칼로 조각했다. 즉 透刻한 곳으로 빛이 통과하여 조명하는 방도였으므로 투박하고 문이 무거웠다. 이에 비하여 짜서 완성시킨 살대무늬의 창이나 문은 가볍고 밝아 이제까지 보다는 진일보한 것이 되었다. 톱이라는 도구의 향상에서 힘입은 것이다. 또 자귀나 도끼로 판자를 켜내는 작업에서 岐鋸라는 쓸톱의 등장은 획기적인 단계로 접어들게 하였다. 原木에서 여러 장의 판자를 동시에 켜낼 수 있어서 작업의 능률이 제고되었고, 낭비요소가 격감되어 목재수급에 이로운 국면이 열렸다.

 목재 가공기술이 발전한 데 비하여 석수들의 작업은 위축되는 형편이었다. 세종의 가사제한령에서 살림집에는 柱礎 외에는 다듬은 돌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집에 만들어지던 석조기단 등이 억제되었으므로 수요가 격감하여 자연히 감퇴될 수밖에 없었다. 지붕장식이 생략되거나 소략하게 치장하는 흐름에 따라 燔瓦匠들의 기능도 저하되었다. 즉 단순화되어 테라 코타(terra-cotta)에 해당하는 조각이나 공예적인 고급기능의 발휘가 퇴보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건축은 한양 도성건설에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천도 초기 태조 때의 건축은 경비를 절감하는 일에 치중되었다. 이에 비하여 태종은 長廊의 건축 등으로 도성면모를 일신하는 획기적인 사업을 이룩하였다. 세종 때에는 도성을 土築에서 石造로 개축하거나 남대문인 崇禮門을 새로 지을 정도로 재건하였다.

 태조 때부터 백성들의 살림집이 국가에서 나누어 준 집터에 건설되어 초가집이 도성내에 밀집하였다. 세종 때 큰 불이 나서 성내 2/3 가량의 집들이 타버리는 참사를 겪게 되자 도로를 정비하고 방화시설을 갖추며 救火제도를 재정비하였다. 경제기반이 공고하게 되면서 가사제한령에도 불구하고 살림집 규모가 장엄하고 화려해졌다. 그리고 그런 추세에 따라 궁실과 公廨들도 점차 커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결과 중종 때에는 제한을 어겼다는 이유로 관리가 탄핵되고 살림집이 헐리는 사건까지 생겼고, 심지어는 이층 건물이 살림집에 들어서기까지 하였다.

 조선 초기 건축물들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전시대 건축물들이 섞여 있었으므로 훨씬 다기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지어진 건축물들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중앙과 지방의 건축물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건축물이 이 시대까지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난후 복구된 건축물이 그 이전의 건실한 기풍을 차츰 잃게 되었다는 점을 서로 비교하면 조선 초기 건축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문헌으로 논증할 수밖에 없지만 후기에 남은 잔형을 통해 초기의 면모가 어느 정도 추정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의 사원건축의 변모는 이미 조선 전기에 잉태되기 시작하였다. 즉 금당에서 佛壇이 위축되거나 후방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라 법당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초기에는 바닥에 塼을 깔다가 후기에는 마루를 깔게 되었으며 조명이 쉽고 보온할 수 있는 문을 달게 되는 변화를 초래했다. 그 후 이런 변화가 궁실·관아에도 채택되고, 그 여파가 살림집에까지 미쳤다. 이는 결국 한옥을 定制化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는 새로운 양식을 시험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가장 한국적 특성을 배양하는 시기이기도 하며, 한옥의 기본이 마련되는 제4기를 준비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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