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2) 도성의 건설
  • (1) 도성건설의 개요

(1) 도성건설의 개요

 한양의 도성건설은 태조에 의하여 발의되고 착수되었으나, 태종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 이후의 역대 임금은 태종이 갖추어 놓은 골격을 조금씩 보완해 가면서 도성건설을 지속하였다.

 태조는 등극하자 곧 도읍을 옮기기를 희망하였지만,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았던 세력에 의하여 일단 좌절되었다. 태조는 등극 이전에 南京에 주목하였으므로, 혁명에 성공하자 李恬에게 한양부를 수리하게 하였다.593)≪太祖實錄≫ 권 1, 태조 원년 8월 임술·갑자. 당장 옮기고 싶었으나 侍中 裴克廉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 후 계룡산이 吉地란 설에 따라 도성건설에 착수하였으나594)≪太祖實錄≫ 권 3, 태조 2년 2월 을유. 마땅한 곳이 아니어서 곧 중지시켰다.595)≪太祖實錄≫ 권 3, 태조 2년 12월 임오.

 우여곡절 끝에 한양에 천도하기로 하고, 태조 3년(1394) 9월 건설에 착수하였다.596)≪太祖實錄≫ 권 3, 태조 3년 3월 병오. 도성건설은 매우 큰 토목사업으로, 백성들의 부담에 의하여 이룩될 수밖에 없는 工役이었으므로 임금이 독단적으로 단행할 수 없었다. 국세가 튼튼해진 이후에 도성을 건설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반대를 무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597)≪太祖實錄≫ 권 6, 태조 3년 11월 기해. 그러나 태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도성의 궁실과 성곽 신설을 강조하였고,598)≪太祖實錄≫ 권 11, 태조 6년 4월 임인. 한편으로는 공역이 계속되었다.

 도성건설이 진척되고 윤곽이 드러나게 되자 태조와 추종세력들은 새로운 도성 면모에 우선 안도하였다. 그러나 반대세력들도 은연중 의견을 모아 태조의 도성건설을 중단시켰다. 그 후 태조는 정종에게 양위하였고, 정종은 開京으로 환도해야 하는 형편에 몰렸다. 물론 정치적 이유도 있었으나 경제적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즉위하고도 바로 한양천도를 단행할 형세가 되지 않았다. 上王과의 약속도 있었으므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태종은 5년(1405) 10월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599)≪太宗實錄≫ 권 10, 태종 5년 10월 임신. 그런데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이 싫었으므로 鄕校洞에 離宮을 지었다. 태종의 수도건설은 자기가 머물 집을 건축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청계천 정비로 기틀을 잡았다. 都市街廓 설정과 도로개설이 그에 따라 완성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태종은 청계천 준설, 護岸정비, 도로와 가곽이 확정되자 行廊(長廊)을 경영하였고, 이것이 완성되자 비로소 도성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만족스러워 하였다.

 태종에 의하여 근간이 이룩되었고 세종 이후로는 부족한 부분을 단속적으로 보완되었으므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건설공역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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