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2) 도성의 건설
  • (2) 태조의 도성건설

가. 정도

 수도를 정한 후 남경의 판도에 따라 도성의 터전을 정하느냐, 아니면 河崙의 毋岳명당설에 따라 도읍을 경영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남경의 형국에 따라 坐向을 설정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중론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正宮은 白岳山을 背山으로 하고, 남향할 것이냐 동향시킬 것이냐의 의논은 鄭道傳 등의 君主南面說에 따르기로 하였다.

 도성 성벽은 주변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의 터전을 정하였는데, 태조 스스로 참여하여 확정하였다. 여기에는 도성의 보전을 고려한 武將 출신다운 태조의 식견이 발휘되었다.600)≪高麗史≫ 권 39, 世家 39, 공민왕 9년 7월 신미.
고려 말엽 왜구의 발호가 극성스러웠다. 공민왕이 천도 의사를 가졌던 것은 예성강 어구까지 넘나드는 왜구의 예봉을 피하려 한 데 기인한다.
태조가 무장이던 시절에 왜구와 싸운 경험이 있었으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白岳을 주산으로 삼아 도성을 배치하기로 하자, 백악·仁旺·木覓과 駱山의 능선을 이어나가면 훌륭한 성채가 되리라 판단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방어선 구축에 중점을 두는 바람에 도성 안에서 이용할 수 있는 면적은 축소되고 말았다. 아직 개성에 주요 행정기관이 있었을 때 圖上으로 신도시에 이주할 대소 신료들에게 분급할 집터를 산정한 바 있었다. 고려시대 이래 도성내에 신분에 따라 나누어 주던 면적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방어선 구축 후의 성내 사용가능 면적은 500結에 불과하여 정1품에게 60負를 주려던 당초계획을 수정하여 35부로 반감하게 되었고 백성들에게는 10부씩을 줄 수밖에 없었다.601)≪太祖實錄≫ 권 7, 태조 4년 정월 기유.

 태조와 無學大師 自超, 정도전은 백악에서 龍首의 모습을 발견하는 신비를 보았다. 태조는 그런 백악을 鎭國伯으로 봉하고 사당을 지어 큰 제사로 받들었다. 그리고 목멱산은 목멱대왕으로 봉해 백성들에게는 치성드리지 못하게 하였다.602)≪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12월 무오. 산천에서의 發福이 국가에 이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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