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2) 도성의 건설
  • (3) 태종의 도성건설

(3) 태종의 도성건설

 태종의 도성건설에 대해서는 감역관 朴子靑의 행보를 따라 살펴보면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태종은 우선 박자청·李稷·辛克禮를 제조로 임명하여 향교동에 이궁을 짓는 일부터 시작하였다.616)≪太宗實錄≫ 권 2, 태종 5년 10월 정해. 이 궁을 昌德宮이라 하였고 내전과 외전의 일곽이 구성되었다.≪太宗實錄≫에는 중요 건물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과 견주어 보면 정궁과 이궁과의 규모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617)≪太祖實錄≫ 권 8, 태조 4년 9월말의 기록과≪太宗實錄≫권 10, 태종 5년 10월 신사의 기록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태종 6년(1406)에 박자청은 中軍摠制에 繕工監을 겸하게 되었는데, 기술인으로서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이직과 더불어 문묘를 새로 짓는 일에 감역하였고 문묘가 준공되자 중군도총제 및 繕工監事로 진급되었다.

 태종 7년 8월에 개경의 迎賓館을 본따 커다란 연못까지 구비된 慕華樓를 지었다. 박자청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廣延樓의 연못과 慶會樓의 연못, 대규모의 경회루 조영의 공역을 치루어 냈다. 貞陵의 정자각, 齋陵의 조포사인 衍慶寺를 개건하는 일도 하였는데, 이 때 興敎寺의 탑을 연경사에 이건하였으며 興天寺 舍利閣을 수리하였다. 상왕이 붕어하자 박자청은 국장도감과 造墓都監의 제조를 맡았고 이직의 협조를 얻어 健元陵 조성을 주관하였다.618)≪太宗實錄≫ 권 22, 태종 8년 5월 을묘.

 태종 10년에는 大市를 열고 장사하는 데 편의를 도모하게 하였다.619)≪太宗實錄≫ 권 19, 태종 10년 2월 갑진. 태종의 도시계획구상에서 行廊을 대규모로 지으려는 의도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행랑의 조성과 함께 태종의 도성건설에서 대표적인 업적은 開川작업이었다.

 태종 11년 윤12월에 開渠都監을 열고 제조들을 임명하였는데 공조판서 박자청이 이직과 더불어 중심인물이 되었다.620)≪太宗實錄≫ 권 22, 태종 11년 윤12월 경오. 개거할 자리의 측량과 설계가 진행되었고 이듬해 정월 보름부터 전라·경상·충청도 군인을 징발하여 시공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반대도 있었으나 개천하는 일이야말로 도성내의 수로를 정비하는 것이고, 개천이 확고해지면서 동서관통의 도로가 확정되고 그에 따라 도로망이 설정되므로 그 사업은 필연적이었다. 태종 때의 개천은 제1차사업인데 장의동에서 종묘, 창덕궁 문앞에 이르는 구간이 준설되고 호안이 석축되거나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소광통교와 혜정교, 정선방동구와 신화방동구의 다리는 모두 돌로 가설되었다.621)≪太宗實錄≫ 권 23, 태종 12년 2월 경오.

 개천작업이 마무리되자 태종은 그날로 개거도감을 行廊造成都監으로 대체하고 역도 2,315인을 동원하였는데, 역도 중에는 승군 500인이 포함되었다. 태종의 행랑건설은 세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1차 사업은 개천역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태종은 이미 행랑을 지을 자리를 정하고 측량과 설계를 하였으며 소용될 재목을 확보해 놓았으므로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었다.622)≪太宗實錄≫ 권 22, 태종 11년 윤12월 기사 및 권 23, 태종 12년 2월 을축. 472칸이 완성되고 창덕궁의 정문인 敦化門 5칸도 함께 준공되었다.623)≪太宗實錄≫ 권 23, 태종 12년 6월 을사.

 태종 13년(1413) 2월에 행랑조성역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복궁 남쪽부터 종묘 앞까지 길 좌우로 881칸을 짓고, 종묘 남쪽에 층루 5칸을 세우고 청운교 서편에 있던 종루 2층 5칸을 巡禁司 남쪽으로 이건하였다. 광통교의 북쪽과 용산강에 軍資庫를, 서강에 豊儲倉을 새로 지었다. 2,641명의 부역군과 500인의 승군을 전판사 李暕 등이 감독하되, 공조판서 박자청, 星山府院君 이직, 知議政府事 李膺 등의 지휘를 받아 시행토록 하였다.624)≪太宗實錄≫ 권 25, 태종 13년 2월 을묘.

 태종 14년 7월에 시작된 제3차 사업에서는 종루에서 남대문까지와 종묘 앞 누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구간에 행랑을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동북·서북면의 승군 600인과 경기 豊海道의 船軍 1,000인을 부역시키고 박자청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행랑을 지을 자리에 있는 여염집들은 보상해주고 철거하였는데,625)≪太宗實錄≫ 권 28, 태종 14년 9월 경진. 기와집 126칸과 초가집 1,360칸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3차 사업에서 몇 칸의 행랑이 축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2차에 1,232칸을 지었으므로 적어도 2,000칸 이상이 이룩되었을 것이다.

 3차에 걸친 행랑조성사업의 결과 동대문에서 종루를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대로 좌우와, 종묘에서 창덕궁 문앞까지와 경복궁 문앞까지의 도로에 행랑이 들어서게 되었다. 대규모 사업에서 일부의 하자가 있었고,626)≪太宗實錄≫ 권 30, 태종 15년 7월 임자. 화재로 인한 손실도 있었으므로 방화벽을 쌓고 물을 비축하여 화재에 대비하게 하였다.627)≪太宗實錄≫ 권 30, 태종 15년 10월 계축.

 태종대에 토목공사는 계속되었지만 개천과 행랑조성으로 도성의 골격이 형성되어 그 면모를 갖추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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